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재녀 서묘금(徐妙錦)에 대한 세 가지 의문

중은우시 2012. 8. 15. 17:06

글: 조염(趙炎) 

 

명나라때 미녀 서묘금과 영락제 주체간에 인구에 회자되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야기는 명나라사람들의 필기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서묘금은 대장군 서달(徐達)의 딸로, 천생여질(天生麗質)이며, 재주가 뒤어났다고 한다. 인효문황후가 사망한 후 얼마되지 않아, 주체는 사람을 시켜 중매를 부탁한다. 서묘금을 취하여 황후로 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낙화유의, 유수무정. 서묘금은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혼인을 거절하고 떠나버린다. 이것은 궁중의 애정사건이지만, 후세인들에게 남긴 의문은 실로 너무나 많다. 최소한 3가지 의문은 해명이 잘 되지 않는다.

 

첫째, 역사상 서묘금이라는 여인이 실재했는가?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대장군 서달은 세 명의 딸이 있었다. 모두 주원장의 아들에게 시집간다. 장녀는 영락제 주체의 황후이고, 차녀는 대왕(代王) 주계(朱桂)의 왕비이며, 삼녀는 안왕(安王) 주영(朱楹)에게 시집갔다. 만일 서묘금이 실재한다면, 분명 장녀는 아니다. 그렇다면 차녀인가 삼녀인가? 차녀는 주계와의 사이에 여러명의 아들을 낳고 모두 왕에 봉해진다. 주계는 골치거리였다. 부친과 형이 황제라는 것을 가지고, 자주 법을 어겼다. 주체는 글을 내려 그를 혼내기도 한다. 이런 자의 처라면 영락제가 감히 건드리려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녀가 아니라면 삼녀이다.

 

삼녀와 안왕 주영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이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주영이 1408년 평량(平凉)으로 간다. 명나라사람의 필기에 주체가 구혼한 시기는 1407년이라고 되어 있다. 이런 우연의 일치는 음미할만하다. 후세인들에게 많은 상상의 공간을 남긴다. 주영은 안왕인데 왜 평량으로 갔을까? 혹시 형이 그를 괴롭힌 것은 아닌가? 그는 서달의 삼녀와 결혼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왜 자식을 두지 못했을까? 1417년 나이 겨우 34세인 주영은 왜 갑자기 타향에서 급사했을까? 만일 서묘금이 바로 서달의 삼녀라면, 주영과 관련된 여러가지 의문도 줄줄이 풀린다. 형제간에 처를 빼앗는 것으로 갈등이 발생하고, 형이 황제이고 생사여탈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동생인 주영의 운명은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서달의 삼녀가 서묘금이라면, 나이에서 다시 차이가 난다. 최소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주체가 구혼했을 대, 서달이 죽은지 이미 22년이 지났다. 서달의 장녀는 46세였다. 서묘금은 이때 어떻게 보더라도 30여세일 것이다. 그러나, 주영이 평량으로 갈 때 막 25살이었다. 30여세된 서묘금이 어떻게 주영에게 시집갈 수 있었을까? 만일 야사의 주장대로라면, 서묘금은 한창 젊은 나이이다. 설마 서달의 정력이 넘쳐서 죽기 전에 처를 회임시켰단 말인가?

 

둘째, 서묘금은 왜 혼인을 거절했는가?

 

주체가 서묘금에게 구혼할 때의 나이가 48세이다. 한창 나이이고, 황권이 안정되어 있었으며, 정치적 업적도 있었고, 사해가 모두 귀순했다. 이런 남자라면 매력이 있다. 쉽게 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묘금은 왜 하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가족관계로 보면, 만일 서묘금이 서달의 삼녀라면, 바로 영락제의 처제이다. 동시에 영락제의 제수이다. 큰언니가 죽고, 남편이 배척당하고, 이때 영락제가 그에게 구혼을 하는데, 이때는 그가 새로운 배경을 찾을 좋은 시기이다. 그런데 서묘금은 왜 이를 거절했을까? 역사의 각도에서 보면, 처제가 언니의 뒤를 이어 황후가 되는 것은 순리에 맞는다.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영락제는 진심으로 서묘금의 미모와 재주를 흠모했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한마음 한뜻으로 황후로 삼고 싶어했다. 이런 기회는 일반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묘금은 왜 이를 거절했을까?

 

명나라사람의 필기를 읽어보면, 서묘금이 혼인을 거절한 것은 3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윤리적 요소이다. 서묘금은 글을 많이 읽었고, 송나라 명리학의 훈도를 받았다. 그래서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긴다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째는 감정적 요소이다. 그녀는 남편인 주영과의 사이에 정이 깊었다. 다른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셋째는 문인기질이다. 서묘금은 시사문장이 뛰어난 일대재녀이다. 그녀의 바람은 정신적인 분야이다. 영락제의 패도적인 태도와는 맞지 않았다.

 

다만, 이런 분석도 여전히 제대로 해명이 되지 않는다. 서묘금은 어쨌든 약한 여자이다. 부친도 살아있지 않다. 큰언니도 없다.남편도 무능하다. 그녀가 무슨 배짱으로 구혼을 거절할 수 있을까? 그녀가 매서운 성격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영락제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유명한 철완인물이다. 약한 여자 하나를 상대하는데, '억지로 꺽어먹은 참외가 달지 않다'는 정도에 신경쓸 사람인가

 

셋째, 영락제는 왜 패왕경상궁(覇王硬上弓)의 수법을 쓰지 않았을까?

 

인효문황후가 사망한 후, 영락제는 황후를 다시 세우지 않았다. 이것은 <명사>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어떤 학자는 말한다. 영락제는 서달의 장녀에 대하여 애정이 깊었기 때문에 다시는 황후를 세우지 않은 것이라고; 또 어떤 학자는 말한다. 영락제가 황후를 세우지 않은 것은 후계자를 고찰할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야사기록에 따르면, 영락제는 서묘금이 구혼을 거절하여, 화가난 나머지 다시는 황후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자리를 비워놓고 서묘금이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주장은 대부분 추측에 의존한 것이다. 전인들의 필기를 종합하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서묘금이 구혼거절에 대하여, 영락제는 강제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서묘금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도록 놓아준다.

 

만일 서묘금이라는 여인이 확실히 실재했다면, 만일 구혼거절이 사실이라면 주체의 도량은 대단히 넓엇다고 할 수 있다. 이유를 필기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 영락제는 서씨집안의 조정에서의 지위를 고려해야 했다. 서묘금의 큰오빠인 서휘조는 '정난지역'의 대공신이다. 큰언니는전임황후이고, 둘째언니는 대왕비이다. 서달의 부하들은 대부분 군대내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만일 영락제가 서묘금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렵다.

 

둘, 영락제는 인효문황후에 대하여 확실히 애정이 있었다. 그래서 서묘금을 해치지 않은 것이다. <명사>에는 영락제와 황후가 상경여빈(相敬如賓)하고 서로 사랑했다고 적었다.

 

셋, 서묘금의 구혼거절서는 교묘하게 적었다. 반복하여 자신은 어려서부터 명문대가에서 자라, 성격이 담백하고,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으며, 한 마음으로 부처를 모시고자 했고, 속세를 벗어나서, 고불청등을 벗하며 여생을 마치고 싶다고 하여, 영락제가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런 이유도 그럭저럭 말은 된다. 주원장이 이치를 따지지 않는 사람만 아니라면. 만일 서묘금이 원래 민간의 호사가들이 견강부회로 만들어낸 인물이라면, 모든 분석은 공리공담이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