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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심의권(心意拳)과 형의권(形意拳): 산서표호를 보호한 무림고수들

by 중은우시 2010. 7. 13.

글: 유계흥(劉繼興)

 

무술은 중국의 전통운동이다. 몸을 건강하게 하면서 공격과 방어를 가능하게 해준다. 진상(晋商, 산서상인)은 자주 수천리바깥으로 가서 장사를 했으므로 자주 생각지도 못했던 곤란과 위험을 겪는다. 심지어 도적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리하여, 진상은 역대이래로 무술을 중시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무술을 익혀서 도적의 습격을 방비했고, 심지어 군사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명나라 가정33년(1554)에 산서 섬서의 염상은 일본해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활을 잘 쏘고 용감한 자 500명을 뽑아서 양주를 지키게 하였다. 융경원년(1567)에는 강소의 송강에 왜구가 침입해왔다. 산서섬서의 여러 상인들은 용감한 자들을 뽑아서 힘을 합쳐서 막아냈다. 명나라때 택주사람인 공가는 "상인을 모시고 멀리 나갔다가 하루는 대강에 도착했는데, 밤에 강도를 만났다. 공가가 나서서 막아냈다. 도적은 놀라서 흩어졌다."고 한다.

 

청나라초기 소주의 산서섬서 상인중에는 무술이 뛰어난 자가 38명이었다고 한다. 청나라때 흔주사람 노영예는 아크수에서 장사를 하는데 도광6년(1828년) 장격이의 반란이 있었고, 성이 무너졌다. 노영예는 스스로 지도를 그리고, 부대를 찾아가서 형세를 설명했다. 며칠후 청나라군대가 이 지도를 가지고 성을 함락시킨다. 노영예는 공로로 5품의 관직을 받는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장사를 하면서 무술을 익힌 사례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주서구(走西口, 산서사람들이 외지를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것을 가리킴)의 수백년동안, 진상은 호위가 필요했고, 이는 표국의 발전을 가져왔을 뿐아니라, 심의권과 형의권의 고수를 다수 배출하게 된다.

 

중화무술에서 심의권과 형의권은 아주 활짝핀 꽃과 같다. 심의권과 형의권의 발상과 발전은 모두 산서표호의 고장인 기현, 태곡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진상의 지지를 받아서 번성하였다.

 

심의권은 소림의 지파(支派)이다. 창시자는 명말청초의 산서 영제 사람인 희제가(姬際可)이다. 희제가가 처음에 심의권을 만든 것은 반청복명의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을 펼치기 어려웠다. 나중에 이를 조계무(曹繼武)에게 전하고, 조계무는 다시 산서 기현 사람인 대룡방(戴龍邦)에게 전수한다.

 

옹정5년(1727), 청나라정부는 무술을 금한다. 타향에서 무술을 사용할 곳이 없던 대룡방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대룡방은 고향에서 심의권을 연구하고 외인에 전수하지 않는다. 그저, 아들 조카 및 친척들에게만 전수했다. 가경7년(1801), 대룡방이 사망한다. 그는 임종전에 아들 대문웅(戴文雄) 즉, 대이려(戴二閭)에게 '심의권을 절대로 외인에 전수하지 말라. 분명히 기억해라, 분명히 기억해라'고 재삼 당부한다.

 

이 대이려는 부친으로부터 진전을 이어받아 가경,도광때 가장 유명했던 심의권 고수이다. 그리고 표국에서 이름을 날렸고, 명성이 전 무림에 떨쳤다.

 

도광16년(1836), 직예 심주(하북 심현) 사람인 이노농(李老農)은 대이려의 대명을 듣고, 집안 재산을 팔아서 현금으로 만들어 기현으로 대이려를 찾아간다. 그러나 대이려는 그에게 무술전수하기를 거절한다. 이노농은 포기하지 않고 땅을 빌려 야채를 심으면서, 매일 대이려의 집에 야채를 보내준다. 3년동안 비바람이 불어도 계속했고, 돈은 한푼도 받지 않았다. 대이려는 그의 성의에 감동했고, 모친의 명을 받아 도광19년(1839) 이노농을 정식제자로 받아들이고 심의권을 전수한다.

 

이노농은 무술을 배운 후, 스승을 따라 표국에서 5년간 일했다. 도광29년(1849) 태곡현의 상인 맹발여의 초청을 받아 맹발여의 집에서 호위를 담당한다.

 

함풍6년(1856), 이노농은 사부 대이려의 동의를 받아, 태곡의 차이(車二) 즉 차의재(車毅齋)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동치2년(1863) 이노농은 태곡의 표국에 들어가고, 업무에 바쁘다보니, 제자인 차이를 스승 대이려에게 부탁해서 무술을 가르치게 한다.

 

차이는 대이려로부터 진전을 전수받은 후 자주 사부 이노농, 사제 하운형(賀雲亨), 이광형(李廣亨), 제자 이복정(李復禎)등과 무술을 익힌다. 그리고 심의권을 개혁하여, 스스로 하나의 권술을 만든다. 그리고 '형(形)'자로 '심(心)'자를 대체하여 '형의권'을 만든다. 형의권의 수법은 아주 엄밀하고, 권법의 변화가 많아서, 독특하였다. 태곡성에는 형의권을 수련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서 새로운 하나의 권파를 이룬다.

 

광서14년(1888), 일본의 무림고수 판산태랑(板山太郞)이 천진에 비무대를 만들었다. 판산태랑은 기고만장했고, 중국인들은 모두 이 일본무림고수를 누가 혼내주기를 바랐다. 차이는 천진으로 가서, 형의검술로 판산태랑을 이긴다. 차이의 명성은 바로 크게 올랐고, 청나라정부는 차이에게 '화령오품군공'을 내려 치하한다.

 

청말에 이노농의 다섯제자는 태곡현에서 형의권을 전수하니 민간에서는 '오성취태곡(五星聚太谷)"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 다섯 무림고수는 무공이 뛰어나서, 태곡은 형의권의 고수들이 모인 곳이 된다. 그리하여 태곡은 형의권의 발상지로 불린다. 광서21년(1895), 이노농의 제자인 이광형이 태곡의 '중흥정(中興正)'에서 호위를 담당하고, <<심의정의>>라는 책을 쓴다.

 

광서24년(1898) 다른 성의 무술인인 이존의(李存義)가 사부의 명을 받아 산서의 차이에게 무술을 배우러 온다. 광서26년(1900) 이존의는 의화단의 난에 가담한다. 의화단이 실패한 후, 이존의는 태곡으로 피난온다. 차이는 제자 이복정에게 이존의의 안전을 지켜주도록 명한다. 그리고 이존의를 태곡의 상인 맹씨집안에서 호위를 맡도록 알선해준다. 선통3년(1911), 이존의는 천진에서 중화무술회(中華武術會)를 창립한다.

 

1918년, 차이의 지시를 받아 형의권고수 한모협(韓慕俠)이 북경에서 러시아 대역사 캉태이를 물리쳐 형의권은 다시 무림에 이름을 날린다.

 

기현의 심의권과 태곡의 형의권이 발전하는데, 부유한 상인들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심의권과 형의권의 고수는 대부분 기현, 태곡 등지의 상인들에게 호원권사로 초빙되었다. 예를 들어, 산서 태곡 북광촌의 부유한 상인인 조씨집안의 삼다당에는 호원무사가 500명이 있었다. 삼다당은 동남의 두 곳에 각각 호원권사 1인을 두었고, 남산 청룡채에 수채권사 1인을 두었다. 일부 형의권 고수들 예를 들어 이노농, 신천보, 풍극지, 호탁, 이발요, 무명국, 오본충, 차의재, 하운형등이 조씨의 삼다당에서 호원권사를 지낸 바 있다. 이들 권사들은 상인의 집안에서 존경을 받고 좋은 대우를 받았다.

 

권사의 또 다른 직업은 표국표사이다. 표국은 산서상인들이 활동한 지방에 많이 개설했다. 위취현의 <<산서표호사>>에는 "표국의 비조는 산서사람 신권 장흑오(張黑五)라는 자이다. 달마왕에 청하여, 건륭에게 글을 올려, 성지를 받아 흥륭표국을 북경 순천부 전문외대가에 만들었다." 위취현은 이렇게 추론한다. 표국은 명말청초에 고염무, 부산, 대정식이 반청복명과 상인보호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표국의 기원에 관하여, 학술계에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표국이 도대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따지지 말자. 한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바로 산서인들은 표국에 종사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청나라말기까지도 적지 않은 산서인들은 표국을 열었다. 예를 들어 산서 유차사람인 안진원은 장가구에 '삼합표국'을 열었다. 왕복원은 몽고 삼차하에 '흥원표국'을 열었다. 이외에 '지일당' '장생' '삼의' '무적'등의 표국이 있었다. 태곡의 차이, 기현의 대이려등은 모두 유명한 표국의 사부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차이의 제자인 이복정은 북경,천진,요녕일대의 표물을 호송했다고 한다.

 

광서30년(1904), 이복정이 제자를 데리고 태곡현 왕장의 부유한 상인을 위하여 표물을 호송했다. 북경에서 행당, 영수를 거쳐 십팔반을 지날 때, 흑노아(黑老鴉)와 만난다. 흑노아라는 별명을 가진 자는 온 몸에 검은 옷을 걸치고, 경공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흑노아는 자주 영수일대에서 상인과 백성들을 약탈했다. 흑노아는 십팔반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복정의 표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나가서 무력을 사용했다. 흑노아는 쌍도를 들고 이복정을 핍박했고, 이복정은 창을 들고 맞이했다. 두 사람이 몇 합을 겨루었는데, 이복정의 창에 흑노아는 1장여를 날아가서 땅에 쓰러지고 피를 줄줄 흘렸다. 흑노아의 일당들은 이를 보고 모두 도망쳤다. 이후 영수에서 십팔반까지의 길은 평안무사했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청나라말기에 산서 기현의 사씨집안에서 연 대성괴라는 상호가 있었다. 기현의 교씨가 연 복성공이라는 상호도 있었다. 이 둘은 모두 유명한 상호들이다. 그러나 화물을 운송하는 낙타무리가 여러번 몽골초원에서 토비의 약탈을 당하고, 큰 손실을 입는다. 그 중의 우두머리는 '유시아(流矢兒)'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는데, 무술이 고강했다고 한다. 팔힘이 세서 소를 들 정도이고, 발로 걷어차면 말이 상처를 입을 정도였다고 한다. 씨름은 초원에서 당할 자가 없었고, 활은 백보거리의 버드나무를 관통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사람을 포졸들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관리들의 표물을 호송하기도 했다. 그의 공개적인 신분은 권사였는데, 암중으로 마적과 결탁하여 초원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다.

 

사씨, 교씨집안은 많이 당하다보니 여러번 유명한 표사를 청하여 유시아를 물리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모셔온 표사들은 모두 '유시아'에게 패배했고, 다시는 초원에 얼굴을 들이밀지 못했다. 유시아는 초원에서 갈수록 기고만장해지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기현은 대씨심의권의 발상지이다. 비록 시조인 대룡방, 유명권사 대이려가 이미 사망하였지만, 대씨의 일맥을 이은 대규(戴奎)는 여전히 은거한 무림고수였다. 그를 불러낸다면 유시아는 문제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대규는 사람됨이 홀로있기를 좋아하고 오만하여, 상인들이 그를 모실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중에 이단(二旦)이라는 상인이 많은 선물을 들고 대규를 찾아간다. 이단은 대규를 만난 후에 사씨, 교씨의 두 상인이 엄청나게 피해를 보고 있다고 얘기한다. 대규가 화를 내는 것을 기다려 이단은 다시 후한 예물을 주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대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단을 쫓아내며 예물도 돌려준다.

 

이단은 어쩔 도리가 없어, 기운없이 빠오터우로 돌아왔다. 산서에서 빠오터우까지 가려면 살호구(殺虎口)를 반드시 지나야 했다. 이곳은 도적이 많이 출몰하는 곳이다. 이단이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토비들이 둘러싸고 천냥의 통행료를 요구했다. 만일 주지 않으면 죽여서 황야에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단이 위급할 때, 돌연 대규가 나타나서, 토비들을 몇몇 물리치고, 이단을 끌고 달아났다.

 

몇리를 못가서 다시 토비들이 길을 막고, 통행료를 요구했다. 우두머리는 자칭 '유시아'의 대제자인 비낙타(飛駱駝)였다. 대규는 '유시아'라는 말을 듣자 크게 노하여, 이단을 인근 지붕에 두고, 땅바닥에 내려서 토비들을 쓰러뜨린다. 금방 7,8명이 쓰러지자, 비낙타가 친히 나선다. 대규는 한방에 비낙타를 땅바닥에 쓰러뜨린다. 토비들은 그 모습을 보고 속속 도망친다. 대규는 쫓지 않았다. 그리고 비낙타에게 "나는 기현의 대규이다. 졌다고 인정하기 싫으면 빠오터우로 나를 찾아와라."는 말을 남기고 이단을 데리고 떠난다.

 

5일도 지나지 않아 유시아는 대규에게 싸우자는 서신을 보낸다. 대규는 제 날짜에 맞추어 빠오터우에서 귀화로 갈 때, 유시아는 일찌감치 수백명의 제자와 각 정부관리를 데리고 대규와 자웅을 겨루겠다고 기다렸다.

 

유시아는 키가 크고 몸이 건장했다. 마치 나한과 같았다. 그는 대규가 장작개비처럼 마른 것을 보고는 더욱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300근무게의 원추석을 들어올려서 대규의 발앞으로 던진다. 대규는 허허 웃으면서 오른발로 걷어차니, 돌이 두 바퀴를 돌았다. 다시 한번 걷어차니, 돌은 공중으로 솓아올랐다. 돌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칩룡등천'의 수법으로 돌을 걷어차서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유지아와 그 일행은 깜짝 놀란다. 유지아도 더 이상 만만히 보지 않고, 대규를 공격한다. 대규는 상대방의 공격을 계속 피하고, 유시아는 더욱 미친듯이 공격했다. 대규가 집안의 절기를 써서 유시아가 맹공할 때, 상대방의 왼팔을 공격하여 겨드랑이아래의 '협와혈'을 짚는다.

 

불가일세의 유시아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일어설 줄을 몰랐다. 그저 머리를 늘어뜨리고 침을 질질 흘릴 뿐이었다. 두 눈은 멍했고, 얼굴색은 사람의 얼굴색이 아니었다. 유시아는 제자들에게 '부축해달라. 돌아가자'고 어렵게 말했다.

 

유시아는 집으로 돌아간 후 7일도 되지 않아 죽는다. 그 소식이 빠오터우에까지 전해졌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대규는 사씨, 교씨집안의 사례를 사양하고 기현으로 되돌아갔다.

 

이를 보면, 무술과 권사는 진상의 활동에 대하여 안전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상도 무술과 권사를 지원하고 무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진상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공을 익혔다. 기현의 부자인 교씨집안의 구소야는 바로 뛰어난 무공을 지녔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