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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빅토르 위고는 청나라를 찬미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2. 4.

글: 정만군(程萬軍) 

 

"세계의 어느 구석에, 하나의 세계기적이 있다. 이 기적은 원명원(圓明園)이라고 부른다..."

"이 기적이 지금은 사라졌다. 하루는, 두 명의 강도가 원명원에 침입했다. 하나는 약탈하고, 하나는 방화했다. 마치 승리를 획득하면 강도가 되어도 좋다는 것같았다.두 승리자는 원명원을 대거 약탈한 소득을 반반씩 나누었다....그리하여,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유럽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두 명이 강도이야기이다."

"우리 유럽인은 문명인이다. 중국인은 우리의 눈에 야만인이다. 이것이 바로 문명이 야만에 대하여 저지른 짓거리이다."

"역사의 앞에, 한 강도는 프랑스라고 부르고, 다른 한 강도는 영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항의한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성명을 할 기회를 준데 대하여 감사한다: 통치자가 범한 죄행은 피통치자의 잘못이 아니다. 정부는 어떤 때는 강도가 된다. 그러나 인민은 영원히 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이 저명한 글은 1860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하여 원명원을 불태운 후에 쓰였다. 이 프랑스작가는 확실히 반식민지상태의 청나라의 처지를 동정했다.

이 글은 중국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심지어 프랑스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글로 많은 근현대중국인들은 빅토르 위고에 대하여 "중국의 위대한 친구"라 일컫고 그가 중국을 위하여 '올바른 말을 직설적으로 해준"데 대하여 감사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위고의 정의감을 찬양하는 동시에 그의 서신에 나와있는 말에 대하여 깊이 따져보지는 않고 있다: "우리 유럽인은 문명인이다. 중국인은 우리의 눈에 야만인이다."

확실히 원명원을 불태운 것은 영불연합군의 야만적인 강도행위이다. 다만, 위고는 이를 가지고 "중국인이 우리의 눈에 야만인"이라는 편견을 바꾸었는가? 유럽인의 눈에 왜 문명고국인 중국인이 야만인으로 비쳤는가?

위고의 이 편지는 원래 친구에게 보낸 개인적인 서신이다. 그의 친구는 누구인가? 바로 침략자의 한 우두머리인 영불연합군의 바틀러 대위이다. 중국에 원정하고 개선한 바틀러 대위는 원래 친구의 칭찬을 들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위고라는 작가친구의 질책을 받게 된 것이다.

 

만일 당시 보통의 청나라백성이 이 서신을 봤다면 어땠을까? 어떤 느낌이었을까? 위고의 정의감에 감격하는 동시에 놀라지 않았을까? 이처럼 본국정부를 비판하는 문인이 목숨을 부지했을까? 사실상, 위고는 이 서신으로 인하여 문자옥이 살육도 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명성을 크게 떨친다. 그리고 계속 프랑스에서 작가로 활동했다. 이렇게 가정해보자. 이렇게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가 당시의 청나라에 존재했을까?

서신에서 위고는 비록 원명원을 '세계기적'이고 동방예술의 최고모범이며 원명원과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을 예술의 '두 가지 기원'으로 나란히 언급할 정도였지만, 그는 청나라정부가 프랑스정부보다 문명적이라고 칭찬하지 않았고, 청나라사람이 유럽인들보다 문명적이라고 칭찬하지도 않았다.확실히 청나라에 대하여는 그저 동정을 가졌다. 이는 약자에 대한 연민이다. 이 중국의 위대한 친구는 청나라사람들의 생활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프랑스 양국의 문명정도를 보면, 어느 쪽이 문명적이고 어느 쪽이 야만적이었을까? 위고는 또렷한 판단력을 잃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대외적으로 침략하는 것은 야만적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인류의 새로운 정치를 실험하는 그들의 문명정도는 완고하여 개화하지 않는 청나라정부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그후에 발생한 의화단사건, 팔국연합군의 북경진입등 역사적 사건이 증명한다. 원명원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유럽은 '중국인은 야만인"이라는 편견을 고치지 않았다는 것을.

유럽인만이 당시에 이런 편견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웃나라들도 중국을 그렇게 보았다. 예를 들어 메이지유신이후이 일본에서 근대의 대부라는 칭호를 받은 후쿠자와 유키치는 중국은 '미개화국가'로 보았다. 주요이유는 중국은 내재문명과 인간의 존엄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황제는 외국인의 눈으로 보기에 손님을 잘 대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공포가 존경보다 많다. 황제의 앞에서 대청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사치품이다.

 

위고서신의 중심사상을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그것은 문명건축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다른 나라 문명을 긍정한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청나라를 찬미한 것은 아니다. 만일 '내재문명'으로 세계각국을 나눈다면, 당시의 중국,프랑스 양국중 어디가 문명적이고 어디가 야만적인지는 자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