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문학일반

원명시기의 하반신문학

중은우시 2012. 11. 17. 20:19

글: 조염 (趙炎)

 

송나라이전까지, 일반백성들은 성을 얘기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백의 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대모연중회리취, 부용장저내군하(玳瑁筵中懷裏醉, 芙蓉帳底奈君何)"는 남녀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고, "추초추접비(秋草秋蝶飛), 상사수낙휘(相思愁落暉) 하유일상견(何由一相見), 멸촉해라의(滅燭解羅衣)"같은 류도 있다. 송나라때는 더욱 많았다. 유영의 <옥녀요선패>, 구양수의 <남가자>등등은 모두 남녀의 성생활을 아주 세심한 필치로 잘 그리고 있다.

 

중국인들의 성관념이 사상유례없이 "폐쇄"적이 된 직접적인 원인은 원나라때 이민족의 포학한 통치때문이다.

 

북송말기의 "정강참변"은 하나의 생생한 교훈이다. 만일 이민족이 침입하고 부녀자를 보호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들을 외부세계와 단절시키는 것은 부득이한 방법이다. 동시에 극력 성생활의 구체적인 점을 감추어 외부에서 알지 못하게 한다. 적지 않은 남송유로들의 필기를 보면, 몽골인들이 강남으로 진입했을 때, 문인사대부들은 거의 모두 이렇게 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가솔들을 자살하게 하였다.

 

한인들의 이른 의식은 스스로를 금고(禁錮)시킨다. 몽골칩입자들도 그 영향을 받는다. 그리하여 부지불식간에 '성금기'와 '성폐쇄'의 집행자가 된다. 예를 들어, 몽골귀족여성도 전족을 하는 것이 유행하였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같은 허정교식(虛情矯飾)은 도덕적 구속을 강조하는 <공과격(功過格)>을 탄생시킨다.

 

<십계공과격>과 <경세공과격>에서, 엄격한 행위제한은 모두 성과 관련이 있다. <공과격>은 사람들에게 경박한 문예연출을 즐기지 말라고 경고한다(익숙하지 않은가? 문화대혁명때도 그러했다. 역사는 교묘하게 닮는다). 이거은 다른 한편으로 원나라의 하반신문화의 번영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 유인은 과거제가 몽골통치자에 의하여 폐기되면서, 많은 문인들이 관직에 나갈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예세포를 모조리 여사염곡(麗詞艶曲)을 창작하는데 쏟는다. 예를 들어 <서상기> , <비파기>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황당한 일은 원나라황제는 말다르고 행동달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왕조에 유행했던 "장생불로"에 탐닉한다. 온갖 방법을 써서 신선과 영약을 찾고 사문(邪門)으로 들어간다. 예를 들어 몽골인들은 밀교금강승을 숭배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중에 특히 성력파(性力派)가 그렇다. 원세조 쿠빌라이의 곁에는 많은 밀교술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비한 "쌍수법(雙修法)"을 쿠빌라이에게 권한다. 각양각색의 성생활을 통하여 자신을 해탈하는 것이다. 궁전의 벽에 모신 신도 남녀가 교합하는 형상인데, 이를 '부모'라고 높여 불렀다.

 

밀교성력파의 사는 전통도교의 성양생론과 비길만하다. 이 사설은 명나라 중엽에 크게 유행했던 도교의 지도자인 소원절(邵元節)이 고취시킨다. 그는 가정제에게 방중술을 가리킬 때 이렇게 말한다. "노음모정(老陰耗精), 화동정상교(和童貞相交), 가채음보양(可采陰補陽)".

 

원나라때의 민족압박은 민족갈등을 전례없이 첨예하게 만든다. 한인들은 부득이 유가예교를 가지고 스스로를 금고시킨다. 이런 습속은 명나라때에 이르러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침투한다. 이민족통치에 대한 역반심리로 심지어 어떤 사람은 황제에게 유가서적이외에는 모조리 불살라버리자고 건의하기도 한다.

 

양성의 격잡(隔雜)과 부녀들이 외부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명나라때부터 엄격하게 실행되기 시작한다. 성과 관련된 하반신문학서 예를 들어, 방중서, 희극연출은 대부분 금지된다. 지하에서민간에 유전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모씨가훈>, <모모묘론>, <순양연정부우제군기제진경>과 <자금광요대선연의>등등. 이를 보면, '성'의 정신생식력은 아주 강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금지시키더라도, "야화소부진(野花燒不盡), 춘풍취우생(春風吹又生)"이다.

 

명나라때의 방중서는 혁신의 특징이 있다. 이전 사람들의 책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았다. 어떤 내용은 명나라때의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자의 신체와 심리적 특징의 잏를 강조하고, 처첩간의 오해와 투기를 방지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마찬가지로 황제와 소녀의 대화를 통하여 여자의 성적인 느낌, 생활특징과 성생활의 관계를 얘기한다. "회정술(回精術)"의 구체적인 방법과 "삼봉대락(三峰大樂)"의 의미등등. 이들 내용은 원래 도교 연단술 책에 나오는 것이다. <도장(道藏)>에도 원래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정통연간에 새로 인쇄한 <도장>에는 유생들이 너무 음란하여 교화를 해쳐, 전승시키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모조리 삭제해버린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인 법이다. 정부가 공개적으로 전파하지 못하게 한 것은 오히려 하반신문학을 지하에서 맹렬하게 발전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금병매>와 속편인 <격렴화영>은 모두 명나라때의 퐁숙과 일반민중의 성생활을 반영하고 예술적인 성취가 비교적 컸다. 그외에 <영매암억어>라는 책이 있는데,작자는 모양(모벽강)이다. 그가 쓴 것은 자신의 진실한 생활이다. 진화팔염(秦淮八艶)중 하나인 동소완과 어떻게 서로 생사를 함께하고, 서로 아끼고 사랑했는지의 구체적인 사항을 적어 널리 유행한다. <금병매>보다도 더욱 대담하고 노골적인 소설은 강남재자 이어(李漁)가 쓴 <육포단>이다. 이 책에서는 강남주루 기원의 번화함, 성병의 유행등을 많이 그리고 있다.

 

명왕조가 흥성하다 쇠망하면서, 북방의 만주족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언제든지 이 늙고 썩어가는 제국을 삼키고자 했다. 국가에 생기와 희망이 없는 것을 보고, 정권의 기운이 다한 것을 보고, 매일 풍월기관 차루주루에서 지내던 문인묵객들은 세속의 향락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감한다. 이제는 유수낙화는 봄이 가는 것과 함께 흘러갔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송나라때의 참통한 교훈을 되살려, 산림에 은둔하여 불도를 닦고,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더욱 심하게 지취금미(紙醉金迷 )와 황음방탕한 생활을 보낸다.

 

후자들 즉 퇴폐스럽기 그지없는 문인들이 저속하고 시정의 언어가 뒤섞인 성생활을 묘사한 음란소설들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수탑야사>, <주림야사> 와  <소양취사>등이 그것이다.

 

이와 비교하여 재미있는 점은 춘궁화가 점점 성숙하고 유행하였다는 것이다. 춘궁화의 창시자는 당나라때 나타난다. 명나라때 방중서가 금지되었으므로 춘궁도도 더 이상 문자해설이 붙지 않는다. 그리하여 화가들은 회화기법에서 더욱 성숙되고 노련해진다. 이들 춘궁화는 성지도에 쓰일 뿐아니라, 감상과 오락에 쓰이고, 성도발의 의미가 더욱 강했다. 그외에 명나라때에 적지 않은 춘궁화를 주제로 한 자기가 나타난다. 춘궁화의 나신은 명나라때부터 대량으로 출현하는데, 아주 사실적이었고 그림이 정교했다. 예를 들어 <승봉래>, <풍류염창>, <원앙비보>, <번화려금>과 <강남쇄하>등이 있다. 화면에서는 퇴폐적인 기운이 흘러나온다. 이는 당시 민중생활이 문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원명시기의 하반신문학의 부정적영향은 아주 심원했다. 지금까지도, 문예권에는 여전히 호탈(好脫), 호나(好裸)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학권에는 여전히 남녀간의 그 일을 쓰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하루빨리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심심하고 몸이 근질근질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대중은 성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갈망하는 심리를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일종의 문화적 유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