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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장애령(張愛玲)의 집안내력

by 중은우시 2011. 2. 11.

 

: 유계흥(劉繼興)

 

절대재녀 장애령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장애령의 작품은 속세생활에서 소재를 찾았고, 서방 현대심리분석파의 요령과 중국고전소설의 서사필법을 기묘하게 결합시켰으며, 상상력은 화려하고 풍부하다. 서방학학계에서 중국현대문학연구의 선구자이자 권위자중 하나이며, 영문저작 <<중국현대소설사>>를 쓴 하지청(夏志淸)은 중국현대소설가중 장애령을 제일고수로 꼽았다. 하지청에 따르면, 전종서는 비유가 교묘하고, 심종문은 농촌풍경을 잘 그려, 묘사에서 장애령과 비교할만하지만, 의상(意象)에서는 장애령이 독보적이라고 하였다. 장애령 소설 속의 세계는 모두 시각적인 상상력으로 그릴 수 있고, 화려한 정도는 키츠(John Keats)와 비견할 만하다. 그녀의 여성의복과 액세서리에 대한 묘사는 <<홍루몽>>과 흡사하다.

 

장애령의 작품에서의 비범한 의상(意象)은 그녀가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따는 경력에서 오는 것이다. 현대의 유명한 작가들 중에서, 장애령이 유일하게 귀족혈통을 가진 인물이다.

 

장애령은 자신의 혁혁한 집안내력을 거의 말하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년에 쓴 <<대조기(對照記)>>는 예외이다. 아마도 사람이 늙으면 근원을 찾게 되나보다. <<대조기>>에는 모두 54장의 사진을 수록했는데, 대부분은 장애령의 개인사진 및 그녀와 집안친구들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이외에 가장 많은 것은 그녀의 조부모 사진이다. 장애령은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황량하다. 단지 나의 조부모의 인연만이 색채가 선명하고, 나에게 아주 큰 만족을 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비율이 맞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장애령의 증조부는 장인당(張印塘)이다. 자는 우초(雨樵)이며, 일찍이 안휘안찰사(安徽按察使)를 지냈다. 함풍연간에, 이홍장(李鴻章)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단련(團練)을 만들 때, 장인당의 도움을 받았고, 두 사람은 함께 태평군을 진압했다. 이렇게 집안간의 세교(世交)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인당의 아들 장패륜(張佩綸)은 바로 장애령의 조부이다. 부친대의 관계로 당시 권력자인 이홍장의 주목을 받는다. 광서5(1879), 장패륜의 모친 모씨가 사망하자, 이홍장은 사람을 시켜 장패륜에게 막료로 들어오라고 요청한다. 곧이어 장패륜의 본부인인 주지향(朱芷薌)도 사망하자, 장패륜은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천진을 지나면서 이홍장을 만나고, 막료로 들어오라는 요청은 사양한다. 그러나, 이홍장이 장례비로 쓰라고 준 백은천냥은 받아간다. 장패륜은 이에 감격한다. 그리하여 일기에 이 일을 기록했다: “선대의 세교가 이처럼 오래 이어지고 있다. 고아로서 정말 감격하였다.”

 

조부인 장패륜은 일생이 전기적인 색채를 띈다. 어려서는 경서를 공부하여 23세에 진사가 되고, 한림이 된다. 1875년에는 시강으로 승진하며 일강기거주관이 된다. 1882년에는 도찰원 좌부도어사가 된다. 붓 하나를 가지고, 장패륜은 여러 탐관오리를 탄핵하고, 그러다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운털이 박힌다. 이로 인하여 청류건장(淸流健將)이라는 평가를 받아. 천하에 이름을 떨친다. 중프전쟁때 일개서생으로 병력을 이끌고 서양총, 서양대포로 무장한 프랑스군대와 싸운다. 전쟁패배후 조정에서는 그를 삭탈관직하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수년후, 장패륜은 죄신의 신분으로 당시 양무파의 우두머리인 이홍장의 인정을 받는다. 이홍장은 장패륜의 품행과 식견을 높이 샀다. 그리하여 그를 자신의 딸과 혼인시킬 생각을 갖는다.

 

광서14(1888), 이홍장의 큰 딸 이국우(李菊耦)는 장패륜에게 시집가서 계실(繼室)부인이 된다. 이국우는 당시 23살이었다. 글과 예의범절에 밝았고, 꽃처럼 아름다웠따. 이때 장패륜은 이미 나이 40이었다. 북경의 동료들에 따르면 그는 이미 수염이 나서 미염수(美髥鬚)’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또한 결혼도 이미 2번이나 했다(원부인 주지향과 계실 변수옥은 모두 작고했다), 게다가 유배에서 갓 돌아온 죄신이다. 두 사람은 어떻게 보아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떠오르는 해와 같던 이홍장은 자신의 사위로 그를 점찍는다. 이는 당시 문인들이 부러워하던 일이다. <<얼해화(孼海花)>>에서는 생동감있게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혼인을 소개하고 있다. 호사가는 이 결혼을 비꼬기도 했다. 예를 들어 양정분은 장패륜에게 그림을 한장 그리고, 시를 한 수 써넣었는데, “궤재학서미학전, 전패소요주동방(齋學書未學戰, 戰敗逍遙走洞房)”(궤재 즉 장패륜은 책은 읽었지만 전투는 몰랐고, 전쟁에서 지고 놀다가 결혼하여 동방에 들어가네)이라고 썼는데, 풍자하면서도 조롱하는 의미가 있다.

 

장패륜은 이홍장의 천금 이국우를 부인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거금을 들여 남경의 저명한 저택 장후부(張侯府)를 사들인다. 당시의 건축주는 3동으로 지어서 품()자 형으로 지었다고 한다. 남쪽의 한 채가 주루(主樓)이고, 동서양루는 각각 화원으로 연결되어 있다. 장패륜은 동루를 수화루(繡花樓)로 명명하며 이국우, 즉 장애령의 조모가 살도록 했다.

 

장패륜이 재임기간동안은 가난한 관리였지만, 이홍장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혼수로 가져온 재산이 있어서, 장씨집안의 남경에서의 생활은 윤택했다. 화원이 딸린 대저택에 살고 있었다. 장애령은 <<대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조모의 혼인은 아름답고 만족할만했다. 남경에 대화원을 지어서 같이 살면서 시와 술과 풍류가 있었다.” 남경의 화원이 딸린 대저택에서 장패륜 부부는 함께 식보(食譜)를 쓰기도 하고, 무협소설을 공저하기도 했다. 풍류넘치는 생활이라고 할 만하다.

 

장패륜은 박학다식하여 당시 장지동과 나란히 할 정도였다. 그는 일생동안 <<관자(管子)>>연구에 주력했고, 주의(奏議)에 능했다. <<간우집>> <<간우일기>>등의 저작이 있다. 장패륜은 만년에 관료사회의 염량세태를 느끼고, 청나라조장의 사품관직ㄷ 마다한다. 1903년 정월 초칠일 장패륜은 남경에서 병사하니, 향년 56세이다.

 

장애령의 부친 장지기(張志沂)는 남경의 이 화려한 장후부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 곳에서 장애령의 모친인 황일범(黃逸梵)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이국우가 살아있을 때 아들 장기기를 위하여 이 혼인을 정해두었다. 1916,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모두 20살이었다. 신부 황일범은 아주 예뻤다. 그러나, 이 혼인은 비극으로 끝난다. 장애령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모친은 어떤 때 자신의 집안의 옛날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 집을 미워했다. 당초에 결혼한 것은 집안때문인데, 그녀는 일생을 망쳤다고 하였다.”

 

황일범의 집안도 대단하다. 조부인 황익승(黃翼升)은 청나라말기 장강칠성(長江七省)의 수군제독이었다. 이홍장이 회군(淮軍)을 처음 조직하여, 상해로 갈 때, 황익승이 지휘하는 5천수군도 이홍장을 따른다. 이렇게 하여 이홍장의 부수(副手)가 된다. 동치4(1865), 이홍자은 명을 받아 태평군을 진압하러 한다. 전투과정에 황익승의 수군이 운하일선을 지켜서 태평군이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게 막는다. 이렇게 하여 청나라정부에 큰 공을 세워 남작의 작위도 받는다. 황씨집안은 남경에 부동산을 남겼는데, 막수로 주장원항 14호인데, 현재는 군문제독부라고 불리고, 명나라때는 원래 주장원부(朱狀元府)의 일부분이다. 황익승이 남경으로 부임한 후, 서쪽건물을 사당으로 만들어 그의 전공을 기렸다. 황제가 이를 조사하러 보냈을 때, 이홍장이 비호를 해주어 무사했다.

 

1894년 황익승이 사망하니 향년 76세이다. 그에게는 아들 1명이 있는데, 이름이 황종염(黃宗炎)이다. 다른 아들 2명은 모두 요절했다. 황종염은 어려서 거인(擧人)이 되었고, 황익승은 그에게 도태(道台)의 관직을 얻어준다. 작위를 승계한 후에 광서염도를 맡는다. 그도 결혼후에 계속 자식이 없었다. 부임하기 전에 집안에서 장사 고향의 농촌여자를 한 명 사서 그에게 첩으로 준다. 임신한 후에 남경에 남겨두었다. 황종염이 광서로 부임한 후 1년도 되지 않아 장기로 죽고 마니 나이 30살때였다. 황종염이 죽은 후, 온 집안 사람들은 첩의 출산을 기다린다. 1896 11녀의 남녀쌍동이를 낳는다. 여자가 바로 장애령의 모친인 황일범 일명 황소영(黃素瑩)이고, 남자가 바로 장애령의 외삼촌인 황정주(黃定柱)이다.

 

장애령의 부친대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삼대야(三大爺)’ 장인준(張印駿)이다 그는 장지기의 당형이 된다. 장인준은 청나라 최후의 양강총독이고, 총독부는 남경에 있었다. 지금의 남경 장강로 총통부내의 손중산 임시대총통 판공루가 바로 장인준이 두번이나 양강총독을 역임할 때 지은 건물로 1910년에 완공했다. 장애령의 부친 장지기는 재능이 뛰어났다. 부친대의 음덕으로 호화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큰 뜻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부잣집 도령의 모든 나쁜 점은 다 가졌다.

 

장애령의 모친 황일범은 대단한 여자였다. 비록 귀족집안 출신이지만 첩소생이고 부모가 요절하여, 어린 시절이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전족을 한 바 있고, 5.4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0년대에 해외유학도 다녀온다. 외국에서 유화를 배웠는데, 서비홍, 장벽미등과도 잘 알았다. 구미의 바람을 쐬고 돌아와서 그녀는 완전히 신파여성이 된다. 장지기의 처로서 신사상을 받아들인 그녀는 남편이 아편을 피우고, 기생집을 드나들고, 축첩을 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의 혼인은 파탄이 나고, 황일범은 홀로 이국타향에서 외롭게 죽어간다. 혼인이 결렬된 후, 장애령의 부친은 더욱 자유로와진다. 기생집의 기생을 집으로 불러들인다. 나중에 손용시(孫用時)의 소개로 그의 여동생 손용번(孫用蕃)을 재취로 맞이한다.

 

장애령의 계모도 대갓집 규수이다. 광서제의 스승인 손이경()의 손녀로 부친은 손보기(孫寶琦)이다. 두번이나 북양군벌시기에 국무총리를 맡았던 인물이다. 손비기는 치국치가에 모두 청렴하고 엄정하여, 자녀들이 모두 품행이 방정하여, 북경의 여러 대갓집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리하여 손씨집안의 딸은 서로 데려가려 한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이다. 손용번은 손보기의 7째 딸이고, 장씨집안이 몰락한 후에 장씨집안으로 시집와서 장애령의 부친과 백년해로한다. 그러나, 장애령은 손용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이 계모의 뺨을 때린 적도 있을 정도이다.

 

집안이 날로 쇠락하고, 가정은 불행하고, 부모는 이혼하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딸인 장애령에게 씻을 수 없는 그림자를 남긴다. 나중에 그녀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남긴다. 장애령의 성장환경에서는 중국전통의 혈액도 흐르면서, 신선한 서양의 바람도 맞이했다. 전통과 현대, 수구와 개혁, 구식과 신식, 이런 모순의 공생과 교직(交織) 과정에서, 장애령의 뛰어난 문장과 화려한 문학품격이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