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1910년 중국: 한 미국학자의 관찰

중은우시 2012. 9. 21. 00:16

글: 김만루(金滿樓) 

 

1910년, E. A. Ross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의 사회학자가 중국으로 왔다. 그는 화남(華南)에서 화북(華北)까지 그리고 다시 서남(西南)까지 한바퀴를 돈 후에 "China in E. A. Ross's Eyes"라는 관찰집을 펴냈다. 당시 중국의 사회에 대한 상세하고 깊이있는 기록이다.

 

6개월간의 여정에서, 로스는 중국의 오래된 성벽, 협소하고 붐비는 길거리를 보았다. 사람들은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대로에서 나귀수레를 끌거나, 터덜터덜하는 외바퀴수레를 밀었다; 밤이 되면 길거리는 칠흑이 된다. 북경과 상해등 극소수의 대도시에만 등이 달려 있었다; 많은 곳에서 사람들은 질이 조악하고 두터운 짙은 남색의 베옷을 입었다. 그옷은 가운데가 아니라 옆으로 열렸다.

 

로스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중국의 노동력가격이 아주 저렴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상해생사공장에서 매일 11시간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월수입은 개략 8-11달러였다. 5000명의 노동자를 보유한 한양의 철공장에서 한 보통노동자의 월급여는 3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시카고철강공장에 갓 입사한 노동자급여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당시, 서방경제학계에서는 "황화론"이 성행했다. "중국인들은 총명하면서 근면하다. 일단 그들이 서방의 과학기술과 문화지식을 본국의 경제건설과 인력개발에 쏟게 되면, 중국은 신속히 발전하고 그 영향력은 없애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서방인들이 여전히 고급여를 유지하고 경제를 계속 성장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하여 서방사회는 계속 이렇게 많은 일하지 않고 먹고사는 사람들을 보유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렇게 예측하기도 했다. "중국은 공업제조대국이 될 것이다. 대량의 품질좋고 가격싼 제품으로 서방국가의 제품을 중립국가의 제품시장에서 몰아낼 것이다." 그러므로, 서방국가는 연합해서, 통일적인 정책을 제정하여 자신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스는 이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그는 생각했다. 공업화발전의 기본적인 법칙은 뛰어넘을 수 없다. 중국공업의 굴기는 최소한 몇대의 사람들의 쉼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중국기업은 반드시 먼저 국내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킨 후, 그 후에야 비로소 점차 국제상품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 당시의 평균구매력으로 말하자면, 중국의 실질소비수준은 미국이 7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로스는 또 하나이 특이한 현상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노동력이 싸면 쌀수록 상품의 가격은 오히려 비싸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의 기본자질, 기술수준 및 전체적인 과학기술수준이 낮은 것과 관련있다.

 

로스는 예를 하나 들었다. 화북의 모 철도회사는 벨기에에서 교량건축재료를 수입하여 비용을 줄였다. 다만, 최후의 결산은 사람들의 예상을 훨씬 벗어났다. 중국노동자들이 조립한 후 교량의 가격은 직접 벨기에에서 완성품을 수입하는데 쓰는 비용보다 훨씬 많았다. 그 원인은, 중국노동자의 급여는 비록 벨기에의 5분의 1에 불과했지만, 벨기에 노동자 1명이 창조하는 가치는 5명의 중국노동자가 창조하는 가치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당시 성행하던 '보로운동(保路運動)"에 대하여 로스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나타낸다. 그가 보기에 중국이 보유한 13개의 철로중에는 기본적으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 철도는 모두 '완전히 중국인 자신이 건설했다'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그러나 공사의 모든 비용은 실제 써야할 비용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다. 예를 들어, 월한(광동-무한)철도는 주주들의 말에 따르면, "공사진전의 속도는 거의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과 같다" 공사현장의 노천에는 철궤, 침목이 산처럼 쌓여 있다. 햇볕을 맞고 비를 맞아서 녹이 슬고 썩었다; 안휘철도는 공사비로 500만냥백은을 지급했다. 그러나 1마일의 철궤도 깔지 못했다.

 

로스를 놀라게 만든 점은, 많은 기업 혹은 공사의 책임자들이 모두 표준적인 관료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문지식도 없고 실무경험도 없었다. 그러나 경영업무는 '구체적이고 속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내부는 친척관계가 성행했다. 일부 사람들은 매일 담뱃대를 들고 담배나 피우고 있는데도 상당한 금액의 급여를 받아갔다. 일부 지방관리는 "개인기업의 사활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수탈과 상납요구였다. 그리하여 많은 부유한 화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투자하려 하지 않았다. 그외에, 리베이트를 받는 누습이 거의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성행했고, 집안의 여종들조차 마찬가지였다.

 

여러가지 이유로, 로스는 중국의 공업화가 단기간내에 큰 성취를 거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외국인의 질투, 자금의 결핍, 노동자의 무지, 관료의 부패무능과 수탈부패, 친척관계, 전문가결핍, 경영관리효율저하등 불리한 요소가 장기간 그 발전에 장애가 될 것이고, 설사 대량의 염가노동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많은 관찰가들과 마찬가지로, 로스의 결론은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는 중국공업발전의 위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는 우리의 손자들이 고려할 문제이다.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중국이 발전과정의 여러가지 불리한 요소를 극복한다면, 20세기 후반기에 중국의 현대경제관념은 점차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나아가 전체 세계의 정치경제추세에 영향을 줄 것이다."

 

로스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경고한다. 비록 중국은 시시때때로 변화하고 진보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과학기술 배우의 도덕이다. 구식교육을 포기한 후(즉, 과거와 유학교육을 폐지), 중국이 만일 이기적인 물질주의를 발전시키고, 사회공공도덕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부유해지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부유가 아니라, 재난이다.

 

로스의 책은 1911년에 출판되었다. 즉 신해혁명이 일어난 해이다. 1백년이 지났다. 책을 덮고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의 여러가지 예측이 들어맞은데 대하여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