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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풍도해전(豊島海戰): 청일전쟁의 분수령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하중원(何中原) 

 

역사상 당나라의 백강구해전(白江口海戰), 쿠빌라이의 2차에 걸친 일본정벌 그리고 명나라때 7년에 걸친 항일원조(抗日援朝, 임진왜란, 정유재란)전쟁의 3번에 걸친 전쟁을 보면, 중일간에 누가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우세한 해군은 중일 양국의 전쟁시, 육군부대의 보급을 통해 공격할 때는 적국으로 진공하고, 퇴각할 때는 본토로 물러나 있을 수 있다. 중일양국의 전쟁사상, 역사가 남긴 교훈은 바로, 어느 편이든 바다를 장악하지 못하면 끝장이고, 그저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풍도해전: 청일갑오전쟁의 분수령

 

1894년 5월, 조선에서 동학농민의 의거가 일어난다. 조선의 봉건통치자들은 청나라군대에 출병을 요청하고, 청나라정부는 제독 섭지초(葉志超)로 하여금 육군 약 1500명을 이끌고 6월 상순 조선으로 파병가도록 조치한다. 이들은 아산(牙山)에 주둔하였다. 일본은 교민보호를 핑계로 계속 조선에 만여명을 파병한다. 이는 중국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전쟁은 일촉즉발의 상태가 된다. 국내여론의 강렬한 요구에 따라, 청나라조정은 부득이 증원하게 된다. 7월 21일, 청나라정부는 북양해군의 "제원(濟遠)", "광을(廣乙)", "위원(威遠)"의 3척의 군함을 위해위(威海衛)에서 출발시켜, 용선 "애인(愛仁)", "비경(飛鯨)", "고승(高昇)"호등 3척의 영국상선을 호송하여, 대고구(大沽口)에서 2500명의 청나라군대를 싣고 아산으로 증원보낸다. 여기에는 군량과 대포를 수숭하는 '조강(操江)'호 포함도 있었다.

 

천진에 잠입한 일본간첩은 이 소식을 탐지한 후, 즉시 동경에 보고한다.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일본해군은 긴급히 출동한다. 조선의 아산만입구에 있는 풍도 서남해역에서 중국해군전함을 습격한다. 이것은 일본이 먼저 도발한 전쟁이다.

 

일본과 긴장하며 대치하고 있던 아산의 청나라군대에 증원병력을 보내기 위하여 이홍장(李鴻章)은 고승호, 비경호 및 애인호라는 3척의 영국상선을 빌려 육군을 수송한다. 이것은 영국이라는 국기로 일본을 겁주려는 것이었다. 이홍장의 조카인 유분(劉芬)은 즉시 선단의 출항일정, 항선인원수와 같은 일급기밀정보를 일본간첩 석천오일(石川五一)에게 팔아먹는다. 일본해군은 즉시 전함중 화력이 가장 강하고, 항속이 가장 빠르며, 가장 최신의 전함인 낭속(浪速), 추진주(秋津州), 길야(吉野)의 2척의 순양함을 청나라군의 항로상에 매복시킨다. 이렇게 하여 풍도해전이 발발한 것이다.

 

7월 25일 새벽, 청나라군대를 아산에 상륙시키는 임무를 완성한 "제원", "광을"호는 닻을 올리고 회항한다. 출항한지 얼마되지 않아, 돌연 일본연합함대의 "길야" "낭속" "추진주"이 가로막고, "길야"가 먼저 포를 쏘기 시작한다. 선전포고없이 전쟁을 개시한 것이다. 북양해군은 어쩔 수 없이 황급히 응전했다. 졸지에, 풍도해상은 포탄이 비오듯 날아다녔고, 물기둥이 하늘로 솟았다.

 

먼저 포격을 받은 "제원"호는 어쩔 수 없이 3척의 적함과 격전을 벌여야 했다. 적과 아군의 역량차이가 아주 큰 상황하에서, "제원"의 장병들은 두려움없이 함내의 모든 포화를 발사하여, 여러번 "길야"를 명중시킨다. 그러나, 목숨을 아까워하는 "제원'호의 관대(管帶) 방백겸(方伯謙)은 이때 선실내로 숨어든다. 방대대부(幇帶大副) 심수창(沈壽昌)은 우뚝 서서 지휘를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망대가 적의 포탄에 맞고, 파편이 그의 머리에 맞아 그 자리에서 희생된다. 이부(二副) 가건장(柯建章)이 지휘를 넘겨 받았으나, 얼마후 그도 가슴에 탄을 맞아 전사한다. 견습생 황승훈(黃承勳)은 스스로 나서서 망대에 올라가 지휘를 한다. "막 지휘하고 있는데, 적의 탄이 날아와서 팔에 맞아, 팔이 끊기고 쓰러진다." 여러 수군들이 급히 그를 선실내로 들고 들어가서 상처를 싸매려고 했으나, 그는 고집을 부리며 고함쳤다: "너희는 각자 자신의 일을 해라, 나를 신경쓰지 말라" 얼마후 그도 장렬히 전사한다. 나이 겨우 스무살이었다.

 

이때, "제원"호는 이미 30명이 희생되고, 27명이 부상당했다. 더 이상 막아내지 못하고, 전속력으로 서쪽으로 퇴각한다. 일본의 3척은 회합하여 함께 '제원'을 추격한다. 바로 이때, 1100여명의 청나라병사를 태훈 '고승'호와 '조강'호가 이 해역에 도착한다. '낭속' '추진주'는 각각 '고승'과 '조강'을 추격한다. '길야'는 계속 '제원'을 추격한다. '길야'의 항속은 23노트에 가까운데, '제원'의 항속은 15노트였다. 두 척은 갈수록 가까워졌다. 이때, '제원'의 관대 방백겸이 백기를 걸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다시 일본군기를 추가로 걸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길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포를 쏘며 공격했다. 이 긴요한 순간에, 수군 왕국성(王國成)이 나선다. 선미의 대포위치로 가서, 크게 소리지른다. "누가 나를 도와주겠는가?" 도 다른 수군인 이사무(李仕茂)가 대답하고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길야'호를 향해 연속 4발을 쏜다. 첫째 포는 타루(舵樓)를 명중시키고, 둘째 포는 선수(船首)를 명중시키며, 세째 포는 빗나갔고, 넷째 포는 적함의 핵심부위를 맞춘다. '길야'는 배를 돌려 도망쳤다. '제원'은 다음 날 새벽 위해항으로 되돌아온다. '길야'를 포격한 왕국성은 문등영진 문등영촌 사람이다. 당시의 군대규율에 따르면, 왕국성과 같은 2등수군은 포를 쏠 자격이 없었다. 그는 방백겸의 포를 쏘지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연속 4발을 쏘았고, '길야'호를 낭패해서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는 중국의 존엄을 살렸고, 제원호를 살렸다.

 

일본군함 3척이 제원호를 포위공격할 때, '광을'호도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배는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이 제조한 1000톤짜리 순양함이었다. 장갑(裝甲)이 없고, 그저 구식 후당포(後膛砲)만이 배치되어 있어, 방어능력과 공격능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광을"은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적과 싸웠다. '길야'를 향해 어뢰를 발사할 준비를 할 때, 불행히도 측익의 '추진주'가 쏜 포에 외루(桅樓)와 갑판을 맞아, 피해가 컸다. 적함의 연속공격하에, 선타가 파괴되고, 선신이 기울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적함과 전투를 게속했다. 나중에 "낭속", "추진주"가 "광을"을 협공하였지만, 포연이 자욱하여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광을"은 더 이상 손상을 입지 않았다. 얼마후 '광을'은 '낭속'의 뒤에서 나타난다. '낭속'의 함장인 동향평팔랑(東鄕平八郞)은 좌현의 대포에 포격을 명령한다. '광을'은 손상이 심각해서 함상의 장병은 30여명이 사망하여 더 이상 싸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우측으로 현을 돌려 숨을 수밖에 없었다. '낭속'은 후미에서 추격한다. '광을'이 포로 반격했는데, '낭속'의 좌현에 명중한다. 그히아셔 묘기(錨機)를 파괴한다. 제1유격대 대장 평정항삼(坪井航三)은 '광을'이 이미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 추격을 포기하도록 명령한다. '광을'은 도망친 후 조선 서해안의 십팔가도(十八家島)로 가서 가라앉는다. 관대 임국상(林國祥)은 불을 질러 배를 불태우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육지에 상륙하여 아산으로 달려간다. 아산에 이르러 섭지초가 이미 평양으로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영국배인 '아시아'를 타고 귀국한다. 그때 전체 함선의 병사들 중 겨우 17명이 살아남았다.

 

25일새벽, '고승'호는 아산만 바깥에 도착하여, 조선의 섬들을 볼 수 있었다. 오전 8시경, 4척의 철갑선이 허도(許島)의 뒷면에서 나타나서, 고승호를 향하여 다가온다. 그중의 1척은 일본기를 달고 있었고, 배에는 백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 배는 '고승호'를 지나갈 때 돌연 백기를 내렸다가 다시 올려서 경의를 표했다. 이 배는 원래 중국전함 '제원'호였던 것이다. 제원호는 3척의 일본전함에 쫓겨서 이곳까지 도망쳐온 것이다.

 

얼마후 3척의 일본전함이 나타난다. 앞장선 '낭속'호는 신호를 내걸었다. '고승'호에게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곧이어 두 발의 공포를 쏜다. 닻을 내리라는 신호를 보낸다. 고승호는 정지하였다. 이때 중국전함 1척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서쪽에서 다가왔다. 그것이 바로 북양함대의 운송선 '조강'호였다. 무기, 군자금을 싣고 '고승'호와 함께 아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일본전함 '추진주'호는 먼 곳에서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즉시 전속력으로 '조강'호에 다가간다. 그리고 정지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공포를 1발 쏜다. '조강'호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동쪽으로 항해했다. '추진주'호는 죽어라 쫓으면서 놓치지 않았다. 두 배간의 거리는 계속 좁혀지고, 약 2000미터가량으로 좁혀졌을 때, '추진주'호는 포를 쏘아서 경고한다.

 

'조강'호의 관대 왕영(王永)은 일본전함이 가까이 다가오며 포를 쏘자, 마음 속으로 '조강'호는 목재로 만든 운송선으로 항속이 느리고 선령도 이미 20년이 넘어서, 비록 5문의 구식포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의 신식전함을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에 배 안에는 20만냥의 군자금이 있어서, 만일,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목이 몇 개라도 모자란다는 것을 잘 알았다. 차라리 죽는 편이 형벌을 받는 것보다 나았다. 그는 일시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붓을 들어 유서를 하나 남긴다: '정제독 여창대인. 비직은 명을 받들어 '조강'호를 이끌고 군수물자와 군자금을 운송하였습니다. 불행히도 조선반도 해상에서 왜함과 만났습니다. 우리 배는 낡고 오래되었으며, 대포설비가 없어서, 저항을 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와전보다는 옥쇄를 선택하겠습니다. 이로써 대황제폐하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그는 유서를 다 쓰자 칼을 들어 목을 그으려 했다. 그 때 누군가 들어와서 관대가 자살하려는 것을 보자, 한달음에 달려와서 칼을 쳐서 땅바닥에 뜰어뜨린다. 그리고 크게 소리친다: "목숨을 가볍게 해서는 안됩니다."

 

왕영이 놀랐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자 온 사람은 덴마크의 기술자였다. "왜 나를 죽지 못하게 하는가?" 그 덴마크 기술자는 말한다. "당신은 한 배의 선장입니다. 큰 적을 앞에 두고 어찌 이런 하책을 쓴단 말입니까. 당연히 용기와 담량이 있으면 방법을 강구해서 국면을 전환시켜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왕영이 급히 묻는다. "네가 보기에 어떻게 해야 국면이 반전될 수 있겠느냐?" 그는 답한다. "먼저 뱃머리에 백기를 거십시오. 그리고 일본국기를 추가로 거십시오. 다시 중요한 문건과 암호책은 불살라버리십시오, 마지막으로 배 위의 20만은량은 바닷 속에 던져버리십시오. 이 세 가지 일을 마친 후에는 상황을 봐서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왕영은 꿈에서 깨어난 듯이 아..하고 소리치고 관대실을 나섰다. '조강'호의 뱃머리에는 백기와 일본국기가 올라갔다. 보일러실의 수군은 문서를 하나하나 불 속에 던져 넣었다. 아랫선실의 백은은 한포대 한포대 바닷속에 던져넣어졌다. 바로 이 때 20여명의 일본 병사들이 총을 들고 '조강'호에 오른다. 일본병사들은 왕영을 '추진주'호로 데려간다. 나머지 사람들은 뒷선실에 가둔다. 곧이어 '추진주'는 남으로 항해한다. '조강'호는 따라간다. 7월 28일, '조강'호의 82명 청나라병사들은 '팔중산(八重山)'호로 일본 사세보(佐世保)로 압송되고, 감옥에 갇힌다.

 

'조강'호가 포로로 잡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고승호는 일본전함 '낭속'에 저지당한다. 작은 배 하나가 낭속호에서 나왔다. 인견선오랑(人見善五郞)을 우두머리로 한 몇 명의 장교가 '고승'호에 오른다. 선장실로 들어가서 집조(執照)를 보여달라고 한다. 선장인 영국인 고혜제(高惠悌)는 집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배는 영국배"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우리는 일찌감치 이 배는 영국배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안에 실은 것은 중국병사이다. 그렇지 않으냐?" 인견선오랑은 갑판의 청나라병사를 가리키며 말한다. "그럼 너희는 무슨 의도이냐. 고승호를 너희가 가져가겠다는 것이냐." 고헤제가 말한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사령관이 결정할 것이다. 배는 이 곳에 세워두고 움직이지 말라. 신호를 기다려라." 인견선오랑은 말을 마치고, 다른 몇 명의 장교와 함께 작은 배를 타고 '낭속'호로 되돌아간다.

 

바로, 고혜제는 신호를 받는다: "즉시 출항하라. 우리와 함께 간다! 중국 장교는 당연히 신호의 의미를 알았다. 배가 막 출항하려는 것을 보았다. 영무처 방판 고선계(高善繼)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 절대로 왜병들에게 잡혀서 욕을 당해서는 안된다. 모두 나와 함께 가자." 사람들은 고선계를 따라 선장실로 간다. 고선계는 칼을 뽑아들고 눈을 부라리며 선장 고혜제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왜인들에게 항복하려면 내 칼을 받아야 할 것이다." 고헤제는 꾹 참으며 말한다: "반항은 소용이 없다. 일본인들이 포 한방을 쏘면, 모두 물고기밥이 될 것이다." 고선계가 말한다. "우리는 죽는 한이 있어도 투항할 수는 없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소리친다. "우리는 싸울 것이다. 절대로 투항하지 않을 것이다." 수십개의 칼이 모두 그 영국선장을 향한다. 고헤제는 할 수 없이. 신호를 보낸다: "배를 보내서 협의를 하자."

 

금방 작은 배가 하나 온다. 인견선오랑은 '고승호'에 올라탄다. 고혜제는 인견선오랑에게 말한다: "중국인들이 '고승호'가 포로가 되는 것을 거절한다. 결사적으로 대고구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다시 지적한다. "이것은 영국선이다. 중국해항을 떠날 때 아직 선전포고가 없었다." 인견선오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데리고 작은 배로 내려가서 돌아간다. 작은 배가 '낭속'호에 도착하자 즉시 신호를 보낸다: "유럽인은 즉시 떠나라" 고승호는 신호를 다시 보낸다: "중국인들이 떠나지 못하게 한다. 다시 작은 배를 보내라."

 

작은 배는 오지 않았다. '낭속'호에서는 붉은 기를 걸었다. 이는 어뢰를 발사한다는 신호이다. '낭속'호이 함장 동향평팔랑은 '고승'호에 도수를 쓴 것이다. 펑 하는 소리와 함게 배가 크게 흔들린다. 어뢰가 배의 중심에 명중한다. 이와 동시에 몇 개의 대포가 함께 발사된다.

 

'고승호'가 침몰하는 정경을 나중에 한 독일퇴역군인인 한나겐(이홍장이 조수)은 이렇게 증언한다: "바로 이 때, 우리는 모두 바다로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수영할 때 나는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선미가 먼저 내려갔다. 이 때, 포는 계속 쏘았다. 가련한 사람(청나라병사)들은 삶의 기회가 없는 것을 알았으나 용감하게 반격했다. 나는 무장사병을 가득태운 일본의 작은 배를 보았다. 그들이 우리를 구하러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비참하게도 나는 잘못 생각했다. 그들은 가라앉는 배를 향하여 총을 쏘았다. 침몰하는 배이 사람들은 이런 신념이 있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 고승호는 어뢰를 맞은 후, 반시간내에 모조리 침몰한다. 배에 탔던 1116명중 겨우 251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북양함대의 주력이 위해위에서 출발하여 호응해야 했다. 출항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홍장이 제지한다. 그리하여 일본함대에 보복할 기회를 놓쳤다. 풍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대승을 거둔다. 그러자, 일본군은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청나라군은 사기가 바닥에 가라앉는다. 이홍장은 배를 지키고자 했다. 북양함대외 회군은 그가 정계에서 힘을 쓰는 밑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육군이 계속하여 조선해협을 건너 동아대륙으로 상륙하여, 신속히 청나라군에 대하여 병력상의 우세를 확보하였고, 청나라군대는 한반도에서 전투중에 바로 궤멸한다. 직예총독 섭지초등 청나라장수들은 모두 유명한 도망장군이 된다. 금방 지금 북한의 수도인 평양까지 도망친다.

 

청나라군이 평양으로 패퇴하자, 각 일본군은 즉시 뒤를 따른다. 중국과 일본의 평양대회전이 곧 전개될 참이었다. 이 때 일본해군은 기본적으로 아산 청군과 중국국내의 해상교통선을 절단했다. 풍도해전 1주일 후, 즉 1894년 8월 1일 중국과 일본은 상호 선전포고한다.

 

1894년 9월 17일, 북양함대의 주력인 16척의 전함이 운송선단의 호송임무를 완성한 후, 압록강입구 대동구에서 여순으로 돌아온다. 일찌기이 곳에서 중국함선을 섬멸할 기회를 노리던 일본해군연합함대와 조우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일양국의 50년운명을 결정할 황해대해전이 여기서 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