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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미야자키 도덴(宮崎滔天):중국혁명을 지지한 일본낭인

by 중은우시 2012. 7. 16.

글: 유계흥(劉繼興)

 

 

 

 

 

 

미야자키 도덴의 본명은 미야자키 도라조(宮崎寅藏)이다. 그는 손중산(孫中山), 황흥(黃興)등의 일본친구이다. 그는 평생동안 중국혁명사업을 지지했고, 끝까지 일관했다. 동아시아의 구질서를 바꾸기 위하여 그는 온갖 심혈을 기울였으니, 일본의 '대륙낭인'중에는 보기 드문 '특이한 인물이다.

 

1871년, 미야자키 도덴은 일본의 큐슈(九州) 쿠마모토(熊本)현의 한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집안에서 여덟째 아들이었고, 막내였다. 부친인 미야자키 쵸조(宮崎長藏)은 향사(鄕士)로 검술에 정통했고, 일찌기 무술을 수련하러 사방을 돌아다녔고, 사람이 호쾌했다. 도덴은 형인 미야자키 하치로(宮崎八郞), 미야자키 다미조(宮崎民藏), 미야자키 야조(宮崎彌藏)의 4사람과 합쳐서 미야자키형제라고 부른다. 도덴은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함께, 부친을 따라 이천일류(二天一流) 검도을 배운다. 그의 형인 미야자키 야조는 청년때 중국혁명사업에 뜻을 두어, 미야자키 도덴의 혁명이상형성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미야자키 도덴은 일찌감치 중국혁명에 투신한다. 1892년, 미야자키 도덴은 처음 중국으로 건너간다. 친구인 쿠사카베 마사이치(日下部正一)에게 여비를 사기당하여, 상해에서 주머니에 돈이 없어 곤경에 빠져 그냥 귀국하게 된다.

 

다음 해, 미야자키 도덴은 조선의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金玉均)을 방문하고 그에게 중국혁명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한다. 김옥균은 흔쾌히 응락한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김옥균의 친구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등과 교분을 튼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다음 해(1894년) 김옥균은 상해에서 암살당한다. 같은 해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미야자키 도덴은 입대하여 중국인들과 싸우는 것을 거절한다.

 

1897년 5월, 미야자키 도덴은 일찌기 형인 미야자키 야조와 접촉한 바 있는 중국혁명당인 진소백(陳少白)을 알게 된다. 그후 홍콩, 마카오등지에서 손중산이 일본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귀국한다. 이해 9월, 미야자키 도덴은 히라야마 슈(平山周)와 요코하마의 진소백의 집에서 손중산을 만난다. 처음에 미야자키 도덴은 손중산에게 의심을 품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자서전인 <삼십삼년의 꿈>에서 미야자키 도덴은 자신의 걱정을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과연 중국 400주군을 등에 업고 설 수 있는 자인가? 4억창생에 군림하면서 호령을 내리는 깃발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인가? 보좌하여 나의 평생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인가?"

 

이번 만남으로 미야자키 도덴은 손중산의 기질과 이상에 탄복한다. 그는 이렇게 감탄하여 말한다: "언뜻 보기에, 외모와 기질은 세상을 잘 모르는 젊은이같고, 순진무구한 농촌처녀같지만, 그의 사상은 깊이가 있고, 그의 견식은 발군이었으며, 그의 포부는 원대했고, 그의 감정은 진지했다." 미야자키 도덴은 손중산을 이누카이 쓰요시등 일본 정치계, 경제계의 요인들에게 소개해준다. 그리고 손중산을 널리 선전하고, 손중산이 쓴 <런던몽난기>를 일어로 번역하여 제목을 <청국혁명영수 손일선유수록(孫逸仙幽囚錄)>이라고 하여 <큐슈일보>에 연재한다.

 

이때부터, 미야자키 도덴은 손중산의 곁을 지키며, 중국혁명에 진정으로 참여한다.

 

1898년 9월, 중국에서 무술정변이 일어난다. 미야자키 도덴은 광동에서 만목초당학생을 보호하고, 도망친 강유위와 연락하고, 일본 주홍콩영사와 교섭하여, 강유위가 일본에 망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중에 강유위, 손중산 두 사람의 면담도 추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1899년 9월, 미야자키 도덴은 가로회, 삼합회와 흥중회간의 합작을 추진하는데 참여한다. 그 동안 스무살도 되지 않은 중국의 혁명청년 사견여(史堅如)를 알게 되고 그의 혁명이론과 결심에 경탄한다.

 

1900년 혜주의거시기에 처음에는 성공한다. 미야자키 도덴은 일본으로부터 전 필리핀혁명당인들이 남긴 군수물자를 전선에 보급하는 것을 책임진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위탁한 상인 나카무라 야로쿠(中村彌六)가 의거경비를 사적으로 빼돌리고, 군수물자를 사적으로 팔아버린다. 그리하여 무기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의거는 실패로 끝난다. 다음 해 1월,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 사견여, 양구운(楊衢雲)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미야자키 도덴은 그후 쿠릴열도로 원정간 바 있는 군지 나리타다(郡司成忠)를 통하여 군수물자상인 쿠라치 시게타다(倉地鈴吉)를 찾는다. 쿠라치는 이때부터 "중국혁명의 유일한 막후지원자"가 되어, 군수물자공급을 책임진다.

 

혜주의거가 실패한 후, 미야자키 도덴은 곤궁에 빠진다. 일본정부의 대중국간첩조직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고, 전직하여 작가가 된다. 도츄켄 쿠모에몬(桃中軒雲右衛門)을 스승으로 모시고, 자신의 필명을 도츄겐 규에몬(桃中軒牛右衛門)이라 한다. 일본각지에서 강연을 하면서 혁명경비를 모은다. 미야자키 도덴은 이 기간동안 가족들에게 "나는 혁명의 경비는 벌 수 있지만, 집안을 먹여살리는 경비는 벌 수가 없다. 정말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해라."

 

그후, 미야자키 도덴은 주로 일본에서 일본으로 간 혁명지사들을 접대하는 것을 책임진다. 많은 중국의 열혈청년들이 그의 이름을 흠모하여 내방한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손중산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황흥, 송교인, 정가성, 진천화등이 그들이다. 그후 역시 장병린, 왕조명(왕정위), 호한민, 유사배, 주수인등을 알게 된다.

 

1901년에서 1902년까지, 미야자키 도덴은 <이륙신보>에 <광인담>, <삼십삼년의 꿈>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를 책으로 만든다. 그중 자서전인 <삼십삼년의 꿈>은 중국혁명의 단계적 총결산이다. 중국혁명에 커다란 귀감의 작용을 한다. 1903년 장사쇠는 이를 요약하여 번역하고, <대혁명가 손일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천하에 널리 퍼지고, 사람들마다 앞다투어 보니, 혁명을 고취시키는 유력한 저술"이 된다. 도덴의 명성은 크게 오른다.

 

1905년, 미야자키 도덴은 손중산을 따라 황흥을 찾아간다. 쌍방은 만나자 마자 옛친구를 만난 듯했다. 그리고 풍락원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20여일후, 손중산, 황흥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동맹회가 성립된다. 미야자키는 파격적으로 회원이 된다. 오랫동안 중국혁명을 지지한 생애에서, 미야자키 도덴은 손중산, 황흥과 깊은 우의를 맺는다. 황흥은 귀국하여 혁명사업을 할 때, 일찌기 자신의 아들 황일구(黃一歐)를 미야자키 도덴에게 맡겨서 돌봐달라고 부탁한 바 있다. 황흥이 채무위기를 맞이하여, 고리대금때문에 사방으로 도망쳐 다닐 때, 미야자키 도덴은 적극적으로 그를 위하여 자금을 모아주었다.

 

1911년(선통3년) 신해혁명이 발발한 후, 미야자키 도덴은 여비를 빌려서 중국으로 다시 간다. 진강(鎭江)에 도착할 때, 한양(漢陽)을 빼앗기고 동쪽으로 도망쳐온 황흥과 만난다. 황흥은 만감이 교차했다. 7언율시를 써서 그에게 준다. 미야자키 도덴은 남경임시정부의 성립을 옹호하고, 임시대총통 손중산의 정치고문을 맡는다. 그리고 손중산이 중화민국임시대총통에 취임선서하는 역사적 사건을 친히 목격한다. 8월, 손중산이 원세개의 요청을 받아 북상하는 것을 극력 말린다. 손중산에게 북벌을 강력하게 건의한다. 10월에 그는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간다. 1913년, 손중산은 귀국하여 반원세개 투쟁을 벌일 때, 그는 손중산을 보좌한다.

 

2차혁명이 실패한 후, 손중산,황흥의 사이가 나빠진다. 미야자키 도덴은 손중산, 황흥의 갈등을 해소시키려 극력 노력한다. 미야자키 도덴은 이렇게 말했다. 손중산이 황흥과 수십년간 합작한 후 서로 사이가 나빠지게 된 것은 두 사람이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가 달라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친구에게 손중산은 "추심치복(推心置腹)"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준다. 황흥은 "유협자류(儒俠者流)"라는 글을 써서 미야자키 도덴에게 준다. 이 두 폭의 글은 지금도 여전히 미야자키 도덴의 고향집에 걸려 있다. 미야자키 도덴과 손중산 ,황흥 두 사람의 우의를 잘 보여준다. 나중에 황흥이 죽고, 미야자키 도덴은 일본에서 호남으로 장례식에 참석하러 간다. 미야자키 도덴의 행동은 호남성립제1사범학교의 두 학생을 감동시킨다. 그들은 미야자키 도덴에게 서신을 써서 그를 칭송한다: "고의관어일월(高誼貫於日月), 정신동호귀신(精神動乎鬼神)" 그 두 학생중 한 명이 모택동(毛澤東)이다.

 

1921년 마지막으로 중국에 갔을 때, 미야자키 도덴은 광주에서 손중산을 만난다. 1922년 12월 6일, 51세의 미야자키 도덴은 신장병과 요독의 합병증이 발병하여 일본 동경에서 병사한다. 그가 죽엇다는 소식을 듣고 손중산은 "중국인민은 좋은 친구를 하나 잃었다"고 애통해 한다. 그리고 상해에서 친히 미야자키 도덴의 추도회를 주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