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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장멘헝(江綿恒): 장쩌민의 아들

by 중은우시 2012. 6. 9.

글: 손운(孫芸)

 

장쩌민(江澤民)의 조카가 최근 상해시 정법위서기에서 내려왔다. 장씨집안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장쩌민의 장남 장멘헝은 중국의 최근 들어 가장 중대한 몇 건의 부정부패사건에 연루되었다: "저우정이(周正毅)사건", "류진바오(劉金寶)사건", "황쥐(黃菊) 전비서 왕웨이공(王維工)사건". 중국최대의 금융스캔들인 "상해초고(上海招沽, 신주인수권)사건"등. 이들 사건은 모두 천문학적 숫자의 부정부패, 공금유용에 관련된다.

 

1994년, 장멘헝은 수백만 인민폐의 '대출'을 이용하여 상해시 경제위원회가 1억위안 이상으로 평가한 상해연합투자공사를 매입하여, 장멘헝의 개인자산으로 바뀐다. 1999년, 장멘헝은 당시 중국망락통신유한공사(즉, 왕통), 상해자동차공업(집단)공사, 상해공항집단공사등의 동사회 구성원이 되고, 당시에 '전신대왕'으로 불리웠다. 장멘헝은 여러 국유기업에 들어간 후, 장쩌민은 공개적으로 '국유기업의 개혁과 발전'을 고취시켰고, '일련의 대기업, 대집단을 국민경제의 주력군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장멘헝이 조종하는 국유기업은 은행, 중앙으로부터 계속 돈을 받아낸다. 이들 대형국유기업은 실제로 은행과 중앙에서 받은 돈을 각종 우회적인 "대출, 경기부양정책, 외자합자"등의 빙식으로 기업의 경영진 가족의 이익으로 돌렸다.

 

최근 몇년동안 낙마한 금융계의 고위직들 예를 들어 왕쉐빙(王雪氷), 장언자오(張恩照), 류진바오등은 모두 거액의 '대출'이 부실채권이 된 것에 관련있다. 보도에 따르면, 많은 은행의 부실채권은 모두 장쩌민 부자가 전화하거나 메모쪽지를 보내어 금융계의 고위직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 부실채권의 상당한 일부분은 결국 장씨부자의 개인호주머니로 들어갔다.

 

최근 들어, 린바오화(林保華)는 개방 잡지에서 황치판(黃奇帆, 충칭시장)이 보시라이, 왕리쥔이 낙마하고, 많은 관리들이 구속되고 조사를 받고있는데, 황치판은 배후에 장쩌민계와 우방궈(吳邦國)가 강력하게 막아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치판은 장쩌민 부자가 돈을 버는데 큰 은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전에 신세기에서도 글을 통하여 황치판은 우방궈가 인정하는 심복이자 막료이고, 우방궈의 동생돠 친한 친구라고 한다. 그리하여 장쩌민계와 우방궈의 이중보호하에서 황치판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사평론가인 샤사오창(夏小强)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의 대규모 제도적인 부패는 장쩌민이 집권하고 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장쩌민이 집권한 후, 사람들을 자유, 신앙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기 위하여, 고의로 전체 사회를 일종의 미친듯한 '돈벌기운동'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장쩌민은 크고 작은 관리들이 모두 권력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었다. 장쩌민 자신의 가족의 부패는 더더욱 부패의 길로 들어서는 항로표시등이 되었다. 부패는 사회적으로 일상이 되었다. 관리들이 이익을 나눠갖고, 공동으로 부패하는 정책은 신속히 중국공산당 수천만관리들을 전체적인 부패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당정군의 각 계통은 여러 탐관오리로 구성된 장쩌민 방파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현재 장쩌민계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 작년 11월 18일, 중국공산당 인력자원및사회보장부는 국무원의 국가공무원임명에 관한 소식을 내놓았다. 당시 59세인 장멘헝은 더 이상 중국과학원 부원장의 직무를 담당하지 않게 되었다. 일찌기 2009년말, 2년에 1번씩 있는 중국과학원 원사 선거에서 장멘헝은 낙선했다. 이와 동시에 전 중국임업과학원 원장이자 장쩌민의 여동생인 장저휘(江澤慧)도 선발되지 못했다.

 

홍콩의 중국인권민운정보센터는 일찌기 그가 상하이 및 베이징의 두 비서를 통해서 장멘헝이 폐암을 앓고 있다고 확인했다. 내부소식통은 "장멘헝의 몸은 계속 좋지 않았다. 심각한 간병을 앓고 있다. 신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는 일찌감치 관료로서의 발전을 포기했다."

 

<동방일보>도 보도한 바 있다. 미국 주상하이총영사관은 2007년 12월 4일자 전문을 통하여, 난징대학의 구((顧)씨성의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장쩌민은 원래 정치적으로 장남 장멘헝을 잘 키우려고 생각했었는데, 장멘헝이 암을 앓는 바람에 최소한 2번의 수술을 했다. 장쩌민은 너무나 많은 정치자본을 써서 장멘헝의 정치적 앞날을 준비해주었었기 때문에, 차남 장멘캉(江綿康)도 마찬가지로 희망이 없었다.

 

장멘헝의 아들 장즈청(江志成)은 1986년생이다. 일찌기 소문에 따르면, 장즈청은 장멘헝이 미국유학후에 출생했다. 그러나 장씨집안의 사정을 잘 아는 소식통에 따르면, 장즈청도 상하이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출생 1년후에 모친 왕샤오린(王小林)을 따라 미국으로 가서 부친과 만났다. 미국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유학한 장즈청은 졸업후 골드만 삭스에서 일을 한다.

 

중국에 들어간 많은 외자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골드만 삭스는 중국시장을 개척하기 위하여, 고위층을 뚫는 노선을 선택한다. 중국고관의 후손을 채용하여 고위층에 접근하는 것이다. 인맥관계와 가정배경을 이용하여 중국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장즈청은 골드만 삭스(홍콩)에서 그다지 오랜 기간 일을 하지 않고 떠났다. 그후 사모기금(PE)으로 들어간다. 장멘헝의 처인 왕샤오린도 상하이 토박이이고, 배우를 한 적이 있다.

 

장쩌민의 둘째아들인 장멘캉은 장멘헝보다 두 살이 어리다. 1954년생이다. 현재 상하이 성시발전자신연구센터 주임, 상하이시경제학회 부회장, <상하이성시발전> 잡지사 사장, 중국 Gis협회 상무이사를 맡고 있다. 장멘캉의 외동딸은 장즈윈(江志雲)이고, 1988년생이다. 현재 미국 위스콘신대학 매디슨분교에서 본과에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