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나라의 멸망책임: 숭정? 만력?

중은우시 2011. 7. 5. 15:40

 

 

: 장낙양(張洛陽)

 

명나라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듯이, 만력제(萬曆帝)의 게으름은 아주 유명하다. 그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는데, 그것은 바로 28년이라는 장기간동안 조회(朝會)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의문스럽다. 우리가 배운 역사관에 따르면 국가에 지도자가 없으면, 28년이 아니라, 하루라고 하더라도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28년간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조회에 참석하여 정무를 살피지도 않았는데, 국가는 망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오히려 게으른 만력제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지런하고 능력있는 숭정제의 손에 의하여 망하게 된다.

 

이건 무슨 이유때문인가?

 

원인은 명나라때 형성된 완전하고 성숙한 관료체계와 사회체계때문이다. 이러한 체계하에서, 황제가 매일 조회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국가는 여전히 굴러가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체계는 당시의 소농경제사회에나 적합하다. 그저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고, 사회적 발전은 추구하지 않았다. 이런 안정은 사회발전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명나라때 혼군(昏君)들이 여럿 출현했지만, 200여년을 존속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소농경제였다. 일단 천재(天災)나 인화(人禍)가 발생하면, 농민들은 생존위기에 부닥치고, 관료체계 자체의 폐단으로, 재난이 나타나념,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되고, 오히려 재난을 악화시킨다. 이렇게 된 결과는 바로 농민의 난이다. 역사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농민의 난은 모두 재난이 닥쳤을 때 피동적으로 시작한다.

 

관료체계는 어떻게 굴러가는가? 먼저, 관료체계는 황제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체계의 완비는 관리들 자신이 이루어야 한다. 다음으로, 상권(相權)과 황권(皇權)이 효과적으로 나누어진다. 비록 명나라때 승상을 두지는 않았지만, 수보(首輔)가 승상과 마찬가지의 직책을 행사했다. 정부에 있어서, 수보가 바로 정부의 수뇌이다. 황제는 그저 국가의 상징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많은 관리들은 절대적인 권위를 수립한다. 백성은 아들이고, 관리는 부모이다. 이러한 백성은 법률하에서나 도덕하에서나, 반드시 정부에 복종하고, 관리들의 권위에 복종하다.

 

사회체계는 존비의 질서가 있고, 아들이 부친의 기업을 계승하다. 존비의 질서는 바로: 장존유비(長尊幼卑), 남존여비, 관존민비등등이다. 원래 상인들은 당시에 지위가 없었다. 다만, 관상이 결탁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어왔다. 일부 상인들은 돈을 내고 관직을 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부존궁비(富尊窮卑). 아들이 부친의 기업을 계승한다는 것은 바로 부친이 무엇을 했으면 자식도 그것을 한다는 것이다. 부친이 농민이면 자식도 농민이고, 부친이 관리면 자식도 관리가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유일하게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를 통과하는 것이다. 현재의 젊은이들이 대학을 통하여 운명을 바꾸려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의 모든 사람들은 사회체계와 관료체계의 지배를 받는다. 마치 바둑돌과 같다. 그저 시키는대로 원래 정해진대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의 황제가 오랫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더라도, 제국은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파괴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숭정제가 즉위하자 명나라는 멸망한다. 이건 또 무슨 이유때문인가? 먼저 숭정제는 대권을 혼자서 거머쥐었다. 상권을 박탈하여, 황권과 상권이 효과적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숭정제는 전횡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특히 내우외환의 상태하에서 왕왕 잘못된 결정 하나가 전체적인 실패를 몰고올 수 있다는 것을. 다음으로, 관료체계의 불안정이다. 숭정제는 사람을 쓰면서 의심이 많았다. 관리의 이동이 빈번했고, 이로 인하여 관료체계가 불안정해진다. 군사적으로, 숭정제의 의심많은 성격과 독단적인 전횡은 대명군대로 하여금 연속적인 실패를 가져오게 한다. 전형적인 사례는 원숭환을 죽여서, 동북변경에 좋은 장수가 더 이상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토사호비(兎死狐悲)의 느낌을 갖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숭정제의 개인적인 운도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태평스러운 시대라면, 숭정제는 아마도 더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먼저 누르하치와 홍타이시의 두 군사강자를 만나서, 군사적으로 연이어 패배했다. 그리고 패배의 결과 군비가 증가되고, 군비의 증가는 다시 세금을 증가시키게 되고, 이는 모조리 일반잭성들에게 전가되었다. 그후에 다시 천재지변을 맞이한다. 서북등은 연속3년간 큰 가뭄을 만난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관료체계는 천재지변때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재난을 가중시킨다. 이때 숭정제는 공무원을 줄여서 비용을 절약하고자 한다. 그 결과 이자성이라는 명퇴공무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숭정제는 확실히 근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근면과 독단전횡은 마치 약효가 강한 약이 되어 명나라라는 허약한 신체를 더욱 빨리 붕괴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