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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정덕제(正德帝): 극한의 욕망을 추구한 황제

by 중은우시 2011. 3. 7.

 

 

: 양려광(楊黎光)

 

중국고대사회에 황제는 최대의 졸부(卒富)이다. 사람들의 가장 큰 꿈은 황제노릇을 하는 것이다. 조건만 된다면,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극도의 사치와 극도의 욕망을 만족시키려 할 것이다. 심지어 변태적인 욕망까지도. 유가이든 도가이든 중국의 전통사상은 민족을 위하여 인간적이고 건강한 성관념을 수립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인 이결비(李潔非)는 이렇게 말한다: “황제의 곁에 있는 무리들이 황상(正德帝)가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니, 자연스럽게 온갖 방법을 써서 그러한 것을 찾아주게 되고, 이를 통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으려 했다”(표방비사, 이결비 저, <<장성>>2007년 제1)

 

당시 정덕제의 곁에있는 자들 중에서 금의위(錦衣衛)에 우영(于永)이라는 색목인(色目人)이 있었다. 그는 음도비술(陰道秘術)’에 능한 자였다. 소위 색목인’이라 함은 원나라 이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내지 유럽의 여러 민족을 통칭하는 말이다. 당나라때부터, 색목인들중에 중국으로 와서 거주하는 자들이 있었다. 원나라때는 많은 색목인들이 몽골군을 따라 중국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몽골인들과 함께 지배계급이 된다. 명나라때에도 여전히 일부 고관은 색목인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한화(漢化)되어 원래의 성씨를 버리게 된다. 우영도 나중에 지은 한족식 이름인 것이다. ‘음도비술은 방중술을 말한다.

 

젊은 정덕제는 우영이 방중술에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는 아주 기뻐하며 즉시 만나본다. 이 우영은 윗사람의 뜻에 잘 맞추고 따르는 인물이다. 방중술을 전수하면서, 정덕제에게 색목의 미녀들이 석윤(晳潤)하고 최찬(璀璨)하여 중국의 여인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금의위 도독인 여좌(呂佐)(우영의 직속상관이며 역시 색목인이다)의 집에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는 색목미녀를 많이 데리고 있다고 말해준다. 정덕제는 그 말을 듣고는 즉시 여좌에게 12명의 색목미녀를 바치라고 명하여, 그녀들을 취한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후집안에 색목여인이 있으면 입궁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렇게 하여 경성의 색목미녀는 모조리 궁중으로 들어온다. 관리의 처첩이더라도 그들의 눈에만 들면 하나도 남김없이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표방(豹房)의 음란함에 대하여 많은 신하들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황제의 기호가 이러하니, 그렇게 놔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덕11년이 되자, 대신들은 불안해진다. 아마도 정덕제는 궁중의 여인이나 색목미녀에 대하여도 심미적 피로가 생긴 탓인지, 이제는 임산부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마앙(馬昻)이라는 무인이 있었는데, 대동(大同)의 유격장군으로 몇 년간 있었고, 한때는 연수총병관(延綏總兵官)으로 승진했었다. 마앙에게는 아주 미모가 뛰어난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미 시집을 갔고, 임신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여인은 실로 대단해서 다른 여인들과는 달랐다. 정덕제의 심복인 강빈(江彬)은 이 여인을 바치기만 하면 정덕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앙도 야심이 있는 인물이었다. 황제가 여동생에게 관심을 나타낸다는 말을 듣자 바로 여동생을 표방으로 보내버린다. 이 마씨여인도 보통이 아니었다. 용모가 예쁠 뿐아니라, 말도 잘타고 활도 잘쏘며, 외국어도 할 줄 알고, 외국음악도 연주할 줄 알았으며, 사람을 유혹하는 기술도 남달랐다. 그러나 그녀는 어쨌든 임신한 다른 사람의 부인이었다. 현대의 어떤 이는 이에 대하여, 정덕제의 성취향이 다양화되는 것을 반영한다고 본다. 그리고, 정덕제의 이처럼 뭐든지 다 먹겠다는 식의 성취향은 결국 정치적 위기를 불러오고 만다.

 

정덕제의 황당무계함이 하루이틀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전까지 대신들이 뭐라고 한 경우는 적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모두가 들고 일어나서 간언을 했다. 경사를 읽은 사대부라면 거의 모두 조건반사적으로 여불위가 임신한 조희를 진나라공자 자초에게 바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들은 주씨황위의 향후 계승자가 마씨의 자손으로 바뀔 것을 우려한 것이다.

 

다행히 풍류적인 정덕제는 금방 마앙의 소첩을 마음에 두게 된다. 그러나, 마앙은 자신의 여동생을 바치는데는 주저함이 없었지만, 자신의 소첩을 바치는 것은 주저했다. 그렇게 하여 정덕제의 불만을 사서, 결국 마앙오누이는 총애를 잃게 된다.

 

후궁에서 표방으로, 표방에서 경성으로, 정덕제의 엽색엽기행각의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그는 강빈을 앞장세워서 전국 곳곳에 보내었고, 가장 큰 임무는 미녀들을 긁어모으는 것이었다.

 

정덕12, 그는 강빈등 수십명의 심복을 데리고, 덕승문으로 북경을 빠져나가, 선부(宣府, 지금의 大同)로 간다. 명나라때의 선부는 서북을 방어하는 군사요충지였다. 서역으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이며, 서북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이곳에는 세 가지가 많았는데, 군인이 많고, 상인이 많고 악호(樂戶)가 많았다. 선부를 요충지로 하는 서북지역에는 삼절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부교장(宣府敎場), 울주성장(蔚州城墻), 대동파낭(大同婆娘)이다. 삼다중 마지막과 삼절중 마지막은 바로 정덕제를 이곳으로 오게한 요인이었다. 정덕은 선부에서 반년을 머문다. 그는 매일 낮에는 잠을 자고, 밤이면 일어나서 술을 마시고 음악을 즐겼다. 그는 매일 밤 길을 나서는데 고정된 행선지가 없이, 말을 타고 행궁을 떠났다. 큰 집이 나오면 말을 타고 들어가서, 술과 음식을 요구하고 부녀를 찾았다.

 

정덕13, 그는 대동에서 유림, 서안, 태원으로 간다. 가는 길마다 양가집 여자들을 수십수레나 약탈해서 수레에 태워서 따라오게 했다.” 이번 서북행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부녀들을 데려갔는지는 이미 알 길이 없다. 그저 정덕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여자는 유()씨성의 부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미녀는 악호인 유량(劉良)의 딸로, 진왕부의 악공 양등의 처였다. 그는 유씨성의 미녀를 데리고 경성으로 와서, 한때는 매일 붙어있었다.

 

서북행에서 정덕제는 순행의 재미를 느낀다. 1년후 그는 다시 사람들을 데리고 강남으로 놀러간다. 일설에 따르면 양주(揚州)의 기녀들은 정덕제가 오는 바람에 몸값이 배로 뛰었다고 한다.

 

풍류황제는 결국 풍류귀신이 되었다. 정덕15년 구월, 그는 남순기간동안, 아마도 남쪽지방의 경치에 반해서인지 돌연 배를 타고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다. 강위에서 물고기를 잡는 낚시꾼이 되고 싶었나보다. 그런데, 잘못해서 물에 빠지게 된다. 비록 다른 사람이 구해주기는 하지만, 이 일로 놀라서 병을 얻게 된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에는 병세가 더욱 악화된다. 정덕16년 이월 초하루, 그는 병으로 조회(朝會)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만당(王滿堂)이라는 여자는 안는다. 1달후 그는 고독하게 표방에서 사망하니, 그의 나이 31살때였다.

 

정덕제는 일생동안 온갖 여색을 다 탐한다. 무수한 여인을 가지고 놀았을 뿐아니라, 전녕(錢寧), 강빈(江彬)등의 몇몇 곁에 있던 남자들과도 관계가 애매했다. <<명사>>에는 여러 곳에서 그와 전녕, 강빈이 함께 자고 일어났다(同臥起)”는 기록을 남긴다. 이결비에 따르면, <<명사>>의 이 구절은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읽을 때마다 행간의 뜻이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고대제왕들은 남자를 좋아하는 전통(好男風)이 있었다. 더더구나 정덕제와 같이 엽기적인 것을 좋아하고 아무런 금기도 없었던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중국고대제왕의 호남풍(好男風)’은 현대의 동성연애와는 좀 다르다. 그들은 각종 여성들과는 싫증이 나도록 즐겼기 때문에 입맛을 바꿔보는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권력이 무한했고, 욕망도 끝이 없었다. 성취향, 성행위에 있어서도 통상적인 범위를 벗어났다. 그들은 사실 권력과 욕망에 의하여 왜곡되고 기형적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위에서 하면 아래에서 본받게 된다. 중국제왕의 황음은 전체 사회의 타락을 불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