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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음악

아병(阿炳)의 실제모습은?

by 중은우시 2012. 10. 20.

글: 양자만보 

 

 

아병은 국제적으로 영향력있는 우시(無錫) 사람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우시의 시중심 금싸라기땅인 숭안사(崇安寺) 상업지구에 아병의 조각상이 하나 서 있다. 이는 그의 이 도시에서의 명망과 지위를 엿볼 수있게 해준다.

 

아병의 조각상은 모자를 쓰고, 몸을 굽히고, 왼손에는 현을 들고 오른손에는 활을 들고 있으며 고개를 숙이고, 모든 주의력을 허리 사이에 끼고 있는 이호(二胡)에 쏟고 있는 모습이다. 전체 조각상은 과장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호에서 비분강개한 소리가 흘러나올 것처럼 느낀다. 아병의 용모는 오히려 모호하다. 이것이 아마도 여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아병의 이미지일 것이다: 힘들게 사회의 하층에서 생활하면서 이호를 켜면서 구사회의 어두운 점을 호소한다. 그러나, 아병을 본 적이 있는 여러 노인들은 조각상이 그를 닮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실한 아병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병의 첫째 수수께끼: 그는 어떻게 생겼을까?

 

현존하는 유일한 진귀한 사진은 진실한 아병을 보여준다.

아병은 길거리에서 연주를 할 때 자주 데리고 다니던 손녀 구제(球娣)는 지금 상하이에 살고 있다.

최근 들어 우시시당안국, 우시시공안국등 부서에서는 모두 아병에 관련된 역사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있다. 곡절이 많은 수집과정을 거쳐 우시시 공안국은 아병의 호적당안자료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중 한 자료를 보면, 아병의 흑백사진이 있다. 이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 사진은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아병의 사진인 것이다.

 

사진의 아병은 모자를 쓰고 얼굴은 청수하며 짙은 수염을 지니고 있어, 상상 속의 민국시대 길거리예술가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그의 검은안경이다. 고거(故居)의 화상에 그려진 것처럼 이 검은안경은 왼쪽이 오른쪽보다 많이 올라가 있다.

 

이 사진이 나타난 것은 1947년 "우시현국민신분증보관책"에 있는 것이다. 아병과 처의 사진이 모두 들어 있다. 거기에 등기된 두 사람의 주소는 "도서관로 34호"이다. 그리고 아병이 직업을 "연주"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외에 또 다른 자료는 1951년에 만든 호구등기부이다. 이 당안에는 1892년 7월 9일에 태어났고, 1950년 12월에 사망했으며, 사숙(私塾)문화정도를 지니고 있고, 맹인이며 직업은 도사(道士)라고 쓰고 있다.

 

같은 페이지의 등기부 공백 자리에는 누군가 파란색으로 한 줄의 글을 써넣었다: "화아병(華阿炳)은 전국음악예술인이다." 글자는 번체자로 썼으며, 파란색의 잉크는 원래 등기부에 쓰여져 있는 검은색의 잉크와 다른 필적이다. 아마도 아병이 죽은 후 당안등기인원이 남긴 글일 것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아병이 세상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인 동씨도 세상을 떠난다. 자료에는 동시에단서도 남겨 놓았다: 아병은 손녀 "구제"가 있다. 1944년 출생이다. 아병과 처가 사망한 후, "구제"의 호적은 거기서 분리되어나갔다. 우시시 공안국 당안과의 업무인원은 구제가 현재 상하이에 살고 있다는 것을 찾아낸다. 그러나 연락방법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일찌기 2008년 4월에 우시 본토의 저명한 작가 흑도(黑陶)의 방문을 받고, 그녀가 기억하는 "아병"을 상세히 회고한 바 있다.

 

원래 구제는아병의 처인 동씨의 손녀이다. 동씨는 전남편이 사망한 후 아병과 함께 살았다. 구제는 개략 4살때, 부친이 장인(江陰)에서 우시의 할아버지할머니에게 보내어졌따. "아병은 키가 아주 컸다. 현재의 기준으로 말하면 170여센터미터일 것이다. 그는 변발을 했으며, 변발을 돌려서 머리 위에 묶었다." 구제의 회고이다. "할아버지는 나가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부를 때, 항상 내가 손을 잡고 길을 안내해주었다. 내가 그의 옷을 분잡았고, 그는 걸으면서 연주했다. 할어버지는 자주 공원의 차관이나 광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공연이 끝나면 나는 할아버지의 모자를 들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돈을 거두었다."

 

아병의 둘째 수수께끼: 왜 음악에 정통했을까?

 

부친은 도사이고, 도교음악의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용모가 뛰어나고, 악기술이 뛰어나서 "소천사(小天師)"라고 불리웠다.

 

아병의 고거는 아병의 조각상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다. 숭안사(崇安寺)안에 있다. 현재는 이미 독립한 집이 되었다. 문을 들어가면, 700여년의 역사를 지닌 패방이 서 있다. 이는 전체 건물을 고색창연하게 만든다. 왼손편으로는 몇개의 방이 있는데 전시방이다. 아병의 신세내력과 그의 비범한 음악적 성취를 소개하고있다. 전시방의 대문위에는 뇌존전(雷尊殿)이라는 세 글자가쓰여 있다. 이름만 봐도 종교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아병은 어찌하여 이런 곳에서 자랐을까?

 

아병고거기념관의 인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병의 본명은 화언균(華彦鈞)이다. 부친인 화청화(華淸和)는 바로 우시 동허궁 뇌존전의 주지였다. 당시 숭안사는 유, 불, 도가 합해진 종교장소였다. 아병은 부친과 우시의 진씨과부 사이에 태어났다. 도관의 규정에 따르면, 화청화는 결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병은 태어나면서 시골로 보내어진다. 8살때 비로소 부친의 곁으로 온다. 화청화는 대외적으로 그를 고향에서 데려온 어린 도사라고 말했다. 화언균이 화청화를 부를 때도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사부'라고 불렀다.

 

이같은 신세내력은 아병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모친은 그가 1살때 세상을 떠난다. 모친의 사랑도 없고, 가정의 안락함도 결핍되어 있었다. 이는 아병이 성인이 된 후 무절제한 생활을 보내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화청화에 있어서 모든 가장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아들'이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이 '사부'는 부친의 사랑을 모두 화언균에게 쏟았다. 11살때쯤 <삼자경>, <백가성>을 가르치고, 붓글씨도 가르치는데 정성을 쏟았다.

 

도관 주지로서, 화청화는 도교악기에 정통했다. 그러나 아들이 그의 길을 걷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아병은 이미 악기연주와 노래에 심취했다. 어쩔 수 없게 되자 화청화는 아들에게 음악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아병이 12살이 되자 각종 악기를 익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고, 16세가 되어서는 외부의 행사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19세가 되어서는 정식으로 도교음악연주에 참가했다. 용모가 뛰어나고, 악기를 잘 다루어서, 아병은 정지 않은 음악에 정통한 사람들로부터 "소천사"라는 칭호를 듣는다.

 

당시를 회고하면, 구제의 기억속에서 화할아버지와 함께하던 좋은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아병에 있어서, 그 당시 생활의 중심은 일가의 생계를 힘들게 이어가는데 있었다. 그래도 그의 곁에 손녀의 온정이 있는 것은 그에게 적지 않은 기쁨이었을 것이다.

 

아병의 셋째 수수께끼: 왜 두 눈이 멀어졌을까?

 

생활을 절제하지 못하고 아편을 하고 계집질을 했다.

경제는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서, 길거리로 나서서 연주와 노래를 하여 돈을 벌었다.

 

뇌존전에서 나오면, 곁에는 3미터 가량의 백색벽의 기와집이 있다. 이는 아병이 성인이 된 후의 거처이다. 이 기와집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본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건물안은 아주 누추하다. 먼지가 묻은 기름등이 하나 있다. 아병과 처의 화상은 곁의 벽에 걸려 있다. 위를 쳐다보면 옛날 각루의 흔적이 있다. 기념관의 근무자에 따르면, 아병과 처는 당시 각루위에 살았다.

 

벽에 있는 아병과 처의 화상을 보면, 뇌존전의 그 멋진 "소천사"는 이미 없다. 이 누추하고, 파손된 건물 안에서 아병과 처는 형편없이 몰락한 모습이다. 아병은 도사머리를 틀고, 코에는 검은 안경을 걸치고 있는데, 안경은 기울어져 있다.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병은 이때 이미 실명했다.

 

우시문화사연구전문가인 쉬모린에 따르면, 1925년-1928년 사이, 즉 아병의 33세 에서 36세때, 부친인 화청화가 사망한다. 아병은 부친의 일을 이어받아, 뇌존전의 주지가 된다. "생활에서 절제를 잃고, 아편을 흡입하고 계집질을 하는 등 나쁜 버릇을 얻어, 경제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두 눈이 차례로 실명된다. 생활이 힘들어지자, 아병은 길거리에서 노래와 연주를 시작하고, 이렇게 길거리악사로서의 생활을 하게 된다."

 

"길거리악사로 지내면서, 아병은 자주 '뉴스를 말하는' 형식으로 차관, 주루, 연관, 여관 및 신문에서 들은 뉴스를 가지고 압운을 맞추어 사구와 창단으로 만들어, 죽판을 치면서 곳곳을 다니며 연주와 노래를 했다. "

 

종계방(鍾桂芳)은 아병의 처인 동씨의 큰손자이다. 이 77세된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때 그도 당매(堂妹)인 '구제'와 마찬가지로, 가끔 장인 구산의 고향에서 우시로 갔고, '할아버지와 할머리'를 따라다녔다. 종계방은 아병이 "노래를 아주 잘했다", "집에서는 말이 많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주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길거리로 나가서 노래와 연주를 하는 것을 도왔다. "듣는 사람이 비교적 많았다. 그러나 돈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이 떠나갔다." 종계방은 당시 일가의 생활이 아주 궁핍했던 것에대하여 인상이 깊다. 그는 말했다. "집안에 항상 돈이 부족했고, 할머니는 자주 부친과 몇몇 고모들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

 

종계방의 부친은 종백영(鍾伯英)이다. 종계방의 회고에 따르면, 부친은 자주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서 채소, 쌀, 기름등을 아병과 할머니에게 가져다 드리곤 했다. 장인 구산의 문화참의 전 참장인 모덕언은 1979년 종백영을 만난 적이 있다. 개략 1932년경, 사람의 소개로 아병과 남편을 잃은 동취제(董翠娣)가 같이 살게 된다.

 

"매일 아침 일찍, 취제는 아병을 부축해서 차루에 가서 차를 마셨다. 취제는 채소를 사러 가고, 차를 다 마시면 집으로 돌아왔다. 오호와 저녁에는 당회나 잔방으로 가서 노래와 연주를 했다." 종백영이 모덕언에게 한 말이다.

 

아병의 넷째 수수께끼: 어떻게 대가가 되었는가?

 

일대종사인 저사죽(儲師竹)이 제자에게 아병을 찾으라고 부탁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병을 얼마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향년 58세였다.

 

금년에 83세인 과영화 노인은 아병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녀는 아병과 같은 거리에 살았다. 저녁 9시 10시쯤에 아병은 노래와 연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과영화의 집을 지나갔다. 과영화의 부친인 과보백과 인사를 나누었다: "어떤 때는 집안에 남은 누룽지가 있으면, 부친이 아병에게 주었다. 그가 다음 날 아침으로 먹을 수 있도록" 아병은 호금(胡琴)으로 '쎼쎼"라는 소리를 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런 광경이 과영화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와 같은 나이대의 우시 사람에 있어서 매일 저녁에 아병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켜는 이호 소리는 자장가인 셈이었다. 나중에 과영화는 매일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던 곡이 <이천영월(二泉映月)>이라는 것을 알았다. 1949년 1월, 막 난징으로 가서 일을 시작한 여송수는 이호분야의 일대종사이다. 사부인 저사죽 교수에게서 수업을 들었다. 손가락을 움직이기 위하여, 여송수는 무의식중에 아병이 길거리에서 자주 연주하던 선율을 뜯었다. 저사주 교수는 돌연 잠시 멈추라고 하더니, 이 곡의 내력을 묻는다. 저사죽 교수는 제자에게 완전하게 다시 한번 연주해보라고 얘기한다. 다 듣고 나더니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나 좋다. 개성이 넘칠 뿐아니라, 함축적이고 심오하다. 이는 심혈로 이루어진 걸작이다."

 

여송수는 나중에 이호연주가가 되고, 남경사범대학 음악과 교수가 된다. 그가 쓴 <신곡탄생>에 따르면, 사부의 분부에 따라, 1950년, 그는 중앙음악학원 교수인 양음류등 몇 명과 함께 우시로 아병을 찾아가서 녹음한다. 아병은 아주 감격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삼년정도 연주를 하지 않았다. 악기도 없고, 황폐한지 너무 오래 되었다. 내가 며칠 연습한 다음에 다시 연주하자."

 

양음류, 여송수등은 아병에게 빌려온 호금, 비파를 주고, 이 진귀한 녹음을 남긴다. 아병의 <이천영월> <청송> <한춘풍곡>등 작품이 녹음되었다.

 

9월에 중앙음악학원 민속음악과의 연구분석결과 아병의 곡은 뛰어나고 연주가 정교하다고 결론내린다. 그리고 아병을 음악학원의 음악회에 초대하여 <이천영월>과 <청송>을 연주하게 하고, 아병을 음악학원 교수로 초빙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때 아병은 이미 병세가 깊었고,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해 12월 4일, 아병은 피를 토하고 세상을 떠난다. 향년 58세이다. 아병의 입관시에, 집안에는 아무런 물건도 남지 않는다. 그가 녹음할 때도 빌려온 악기로 해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