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음악

중국고대의 사대명금(四大名琴)

by 중은우시 2007. 8. 22.

 

금기서화(琴棋書畵)중의 금(琴)은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현악기의 하나이다. 지금은 "고금(古琴)" 또는 "칠현금(七弦琴)"이라고 불리고 있다. 고금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많은 명금(名琴)들이 기록에 남아 있으며, 그에 따른 전설도 전해진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제환공의 "호종", 초장왕의 "요량", 사마상여의 "녹기", 채옹의 "초미"이며, 이 넷을 "사대명금"이라고 부른다.

 

제환공(齊桓公)의 호종(號鐘)

 

"호종"은 주(周)나라때의 명금이다. 금의 소리가 커서 종소리같고 호각을 부는 것같이 사람의 귀를 진동시켰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대의 걸출한 금 연주가인 백아(伯牙)가 "호종"을 탄주해보았다고 한다. 나중에 "호종"은 제환공의 손에 들어왔다. 제환공은 제나라의 이름난 군주였고, 음률에 능통했다. 당시 그는 많은 명금을 소장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호종"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 그는 일찌기 부하들에게 우각(牛角)을 불고, 노래를 부르게 시키고는, 자신은 "호종"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러면, 우각의 소리도 처절하고, 호종의 소리도 비감하여 곁에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초장왕(楚莊王)의 요량(繞梁)

 

"여음요량, 삼일부절(餘音繞梁, 三日不絶)"이라는 말이 있다. 그 어원은 <<열자(列子)>>에 나오는 한 이야기이다: 주(周)나라때, 한국(韓國)의  유명한 여가수인 한아(韓娥)가 제(齊)나라로 갔는데, 옹문(雍門)이라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식량이 떨어져, 할 수 없이 노래를 불러 음식을 구했다. 그녀의 처량한 목소리는 공중을 맴돌았는데, 외로운 기러기가 길게 우는 것과 같았다. 한아가 떠난지 3일이 된 후에도 그녀의 노랫소리는 여전히 집의 대들보 사이를 맴돌고 있었고(요량은 대들보를 맴돌다는 의미이다), 들은 사람들이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금에 대하여 "요량"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을 보아서, 이 명금의 특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음(餘音)이 끊이지를 않았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요량"은 화원(華元)이라는 사람이 초장왕에게 바친 예물인데, 제작연대는 미상이다. 초장왕은 "요량"을 얻은 이후에 하루종일 금을 연주하였고, 음악에 도취되어 살았다고 한다.

 

한번은 초장왕이 연속 7일간 조회를 보지 않고, 국사는 모두 내팽개쳤다. 왕비인 번희는 아주 초조해져서 초장왕에게 권했다: "군왕이시여 너무 음악에 빠져 계십니다. 과거에 하나라의 걸왕이 '말희'의 거문고(瑟)에 빠졌다가 살신지화를 당했고, 주왕은 미미(靡靡)의 음을 듣가가 강산사직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군왕이 이처럼 요량의 소리를 좋아하시고, 7일이나 조회에 나가지 않으시니, 국가와 목숨을 잃고 싶으신 겁니까?" 초장왕은 이 말을 듣고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사람을 시켜 철여의로 금을 내려치게 해서 몇 조각으로 부숴버렸다. 그리하여 요량은 천하에서 사라지게 된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녹기(綠綺)

 

"녹기"는 한(漢)나라때 유명한 문인인 사마상여가 연주하던 금이다. 사마상여는 원래 집안이 가난하였는데, 그의 글재주는 유명했었다. 양왕(梁王)이 그의 명성을 흠모하여 글을 요청하자,사마상여는 "여옥부(如玉賦)"를 지어서 주었다. 이 글은 아주 뛰어나서 양왕이 기뻐하며, 자기가 수장하고 있던 "녹기"를 주었다. "녹기"는 대대로 전해지는 명금이었으며, 금에는 "동재합정(桐梓合精)"이라고 쓰여 있었다. 즉, 이 금은 오동나무(桐)와 가래나무(梓)를 결합해서 만든 것이었다. 사마상여는 "녹기"를 얻은 후 보배처럼 생각했고, 그의 뛰어난 금연주에 "녹기"의 절묘한 음색이 결합하여, "녹기"는 일시에 명금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번은 사마상여가 친구를 방문했는데, 부자인 탁왕손이 그의 명성을 듣고 연회를 베풀어 환대했다. 술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여러 사람들이 "당신이 '녹기'를 잘 탄다는데, 한 곡 부탁합니다. 우리도 귀를 즐겁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마상여는 일찌기 탁왕손의 딸인 탁문군이 재화가 뛰어나고 금을 잘 다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마상여는 금을 타면서 "봉구황(鳳求凰, 봉이 황에게 구애하는 내용)"이라는 곡을 연주해서 암중으로 탁문군에게 구애했다. 탁문군은 금을 타는 것을 듣고는 그 뜻을 이해했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사마상여의 재주를 흠모해서 그와 함께 야반도주하여 결혼한다. 사마상여가 금으로 짝을 구한 이야기는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채옹(蔡邕)의 초미(焦尾)

 

"초미"는 동한의 저명한 문학가이자, 음악가인 채옹이 친히 만든 금이다. 채옹은 오나라에 귀양가 있을 때, 불속에서 아직 타지 않은 소리가 특이한 오동나무를 얻는다. 그 오동나무의 형상과 길이에 맞추어 칠현금을 하나 제작했는데, 역시 소리가 비범하였다. 이 금의 꼬리부분(尾)에는 아직도 탄(焦) 자국이 있어 이름을 "초미"라고 하였다. "초미"는 귀를 즐겁게 하는 음색과 제작과정의 특이함으로 유명했다.

 

한나라 말에 채옹이 살해된 후, "초미"는 황실의 창고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300여년후, 제명제(齊明帝)가 재위할 때, 금의 고수인 왕중웅(王仲雄)을 데려와서 오랫동안 보관해 두었던 "초미"금을 꺼내어 연주하게 한다. 왕중웅은 연속 5일간 연주하고, <<오뇌곡(懊惱曲)>>을 작곡하고, 이를 명제에게 바친다. 명나라때가 되어서도 곤산사람 왕봉년이 여전히 채옹의 "초미금"을 수장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