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자금성은 아주 장관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황금색의 지붕과 붉은색의 담장으로 붉은 색과 노란색이 서로 상응하면서 말로 다하기 힘든 황실의 기세를 층층이 드러내주고 있다. 고궁의 안에 들어가면, 선명한 색채로 인한 시각적 충격을 느끼는 이외에 무의식중에 장엄함과 융중함에 압도되게 된다.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거이다. 홍색과 황색이라는 두 색채의 조합은 아주 대표적인 색깔조합이라는 것을. 설마 자금성을 설계하고 만든 사람들이 이런 색채적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자금성을 건설할 때는 아주 많이 따졌다. 배치, 형태...하나하나는 모두 '군권신수(君權神授)'의 의미와 '황권지상'의 이념을 담고 있다. 색깔도 예외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색깔은 황권에 대하여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금성안에는 곳곳에 황색과 홍색이 눈에 뜨인다. 방대한 자금성의 색깔은 비교적 단일하다. 이 두 가지 색깔을 선택한 것은 중국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전통문화에서, 홍색은 즐거움과 경사를 나타내는 색깔이다. 장엄함, 행복, 길상(吉祥)을 의미한다. 고고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3만년전에 살았던 산정동인(山頂洞人)들은 홍색으로 동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주(周)나라이후의 궁전에서는 이미 보편적으로 홍색을 사용해왔다. 자금성은 이전시대의 궁전색채미학을 답습하였다. 그리하여 홍색을 사용한 것이다.
황색이 정통의 지위를 확립한 것에 관하여 얘기하자면, 화하민족의 문명기원부터 따져보아야 한다. 화하문명의 기원은 황하유역이다. 눈에 뜨이는 것은 모두 누런 황토고원이다. 그리고 구불구불 흘러가는 황하도 사람들에게 황색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한나라에 이르러, 한무제 유철은 "한거토덕(漢居土德)"을 확립하고, 이렇게 하여 황색은 한나라의 황권을 상징하는 색깔이 된다. 그후 역대왕조는 이를 답습하여 황색을 존귀한 색깔로 여기게 된다.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외에, 음양오행설도 홍색, 황색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행중에서, 황색은 토(土)이고, 토는 중앙이며 만물의 근본이다. 이는 지고무상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많은 궁전의 지붕은 금황색의 유리기와로 덮었다. 이를 통하여 지고무상의 존귀함을 드러낸다. 이외에 오행의 상생상극의 학설에 따르면, 토(土)는 화(火)에서 나온다. 화(火)가 많으면 토(土)가 말라버린다; 화(火)는 토(土)를 만들지만, 토(土)가 많으면 화(火)가 사그러든다. 화(火)는 홍색이다. 그리하여 궁전의 문, 창, 담장은 모두 홍색을 많이 썼다. 이는 자생(滋生), 조장(助長)을 의미한다. 이를 통하여 흥성하고 발전하기를 바란 것이다.
명,청 양대에 자금성을 만들 때, 이전의 전통에 따라, 전각누우(殿閣樓宇)의 대부분은 붉은 색 담장에 노란 색 기와를 썼다. 색채가 강렬하고 눈부시다. 서로 잘 대비되어 금벽휘황(金碧輝煌), 화해열목(和諧悅目)의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면서 거대한 기상과 엄숙한 모습도 보여준다. 이를 통하여 황실의 화려함과 당당함을 보여주어 황제의 지고무상의 권위와 천자지존을 나타냈다.
그러나, 자금성 안이라고 하여 황색의 지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건축물은 황제가 거주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규격상 한등급 아래로 지었다. 그리하여, 어떤 건축물에서는 녹색기와와 흑색기와를 쓴다. 예를 들어, 남삼소(南三所)는 황자(皇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홍색 담장에 녹색 기와를 썼다; 문화전(文華殿)은 원래 황자들이 글을 읽던 장소이다. 오행설에 따르면, 청색 즉 녹색은 나무잎의 맹아의 색깔이다. 이는 온화한 봄날을 상징하고, 방위상으로는 동쪽이다. 그리하여 녹색유리기와를 쓴 것이다. 가경제때 황제가 한림학사를 접견하여 경연을 행하는 곳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지붕의 색깔을 황색으로 바꾸었다; 문연각(文淵閣)은 원래 장서루(藏書樓)이다. 오행상극의 이론에 따르면, 흑색은 수(水)를 대표하는 색깔이다. 그 뜻은 불(火)을 진압한다는데 있다. 그리하여 담장은 청록색으로 하고, 지붕은 흑색으로 했다; 신무문(神武門)의 안쪽 동서 양쪽은 원래 장경호군(章京護軍)이 당직을 서는 곳이었다. 위치가 북방에 속하므로 수(水)의 위치이다. 그리하여 흑색 기와를 썼다.
봉건사회는 엄격한 등급제도를 지켰다. 이것은 건축물의 색깔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규정에 따르면, 색깔은 등급이 높은데서 낮은 순서로 황, 적, 녹, 청, 남, 흑, 회색이었다. 황색이 가장 존귀한 색깔이다. 북경성안에 있는 집들은 등급에 따라 적용을 받았다. 자금성은 황, 적색을 위주로 했고, 공경대부의 집은 녹색기와를 썼다. 백성들이 거주하는 민가는 흑색, 회색, 백색을 쓸 수밖에 없었다. 북경성의 나머지 민가의 암울한 색깔과 대비하여, 자금성의 홍색 담장과 황색 지붕은 더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렬한 색깔로 황권의 지고무상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지방 > 북경의 어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어대(釣魚臺) 국빈관의 역사 (0) | 2012.10.03 |
---|---|
자금성(紫禁城)은 누가 설계했는가? (0) | 2011.12.30 |
북경에는 몇 개의 왕부(王府)가 있는가? (0) | 2010.02.08 |
동교민항(東交民巷): 북경 최초의 대사관구역 (0) | 2009.11.09 |
왕치화(王致和): 처우떠우푸(臭豆腐) 이야기 (0) | 2009.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