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북경에는 몇 개의 왕부(王府)가 있는가?

중은우시 2010. 2. 8. 19:40

글: 홍촉(洪燭)

 

북경에는 몇 개의 왕부가 있을까? 1920년 즉 청나라 황제가 퇴위한 후 8년이 지나서 만들어진 <<북경실용지남>>에는 이름이 있으며, 건축이 상존하거나 조사가능한 왕부가 모두 74개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이미 폐기되었고나 소멸되었거나 실전된 것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이다.

 

북경에는 왕부가 많다. 당연히 옛날에 기세가 대단했던 왕야(王爺)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금성 안에 황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황제는 왕중의 왕이다. 그러나 왕의 지위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다. 왕부의 규모나 호화스러움은 황궁에 버금간다.

 

황제에게는 처첩이 많다. 자손도 당연히 많고 복잡하다. 예를 들어, 강희제는 35명의 아들이 있었고, 건륭제는 16명의 아들이 있었다. 자손들이 이렇게 번성해가면, 확실히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간다. 다른 성격의 황친국척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모, 외삼촌, 조카, 부마등). 진정으로 화려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혈연관계로 연결된 집단은 명예감이 공고하다. 팔기자제들도 이들과 비교하자면 한층의 차이가 난다. 그들이야 기껏해야 먼 친척나부랑이에 불과하다. 팔기자제의 고귀함과 사치는 이미 유명하다. 그렇지만 이들 황제의 아들인 왕야와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천지차이라고 할 수 있다.

 

홍루몽의 가, 사, 왕, 설의 4대가문은 한때 날렸다. 이들 사대가족도 기껏해야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에 불과하다. 왕야의 물질생활과 정신지위는 이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조설근은 영부(寧府), 영부(榮府)를 대단하게 묘사했지만, 순수한 혈통의 친왕부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대관원안에 아무리 많은 공자, 숙녀가 있다고 ㅎ더라도, 와호장룡의 왕부의 후화원을 따를 수 없고, 물론 자금성내의 어화원을 따를 수 없다.

 

상해의 여작가 진단연은 베스트셀러인 <<상해의 금지옥엽>>을 썼다. 나는 항상 의문이었다. 옛날 상해의 부자집자제, 명문규수들을 금지옥엽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십리양장(十里洋場)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금지옥엽이라고 할 수는 있는 걸까? 삼대이상의 귀족인가? 소위 금지옥엽은 달러나 파운드로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프랑스 향수를 뿌린다고 되거나, 이탈리아 립스틱을 바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외국에서 들여온 하이힐을 신은 모던여성이라고 하여, 그 기질이나 흉금이 천성적으로 고귀한 '환주거거'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경요의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 환주거거를 보라. 영리하고 열정적이며 심지어 황제의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자유자재이지 않은가? 상해야 아무리 미용기술이 발달하더라도 그런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환주거거들은 주머니에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더더구나 무슨 학력이나 면허증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소위 "거거(格格)"는 왕의 딸을 말한다. 그녀들은 제국의 장상명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오화마, 천금구, 그리고 고관자제의 특권을 지닌다.

 

금지옥엽의 유적을 다시 만나려면 북경을 와야 한다. 북경의 금지옥엽은 모두 세습되고, 진짜이다. 조상의 음덕에 따라 무궁무진한 비료를 먹고 자란다. 부친이 영웅이면 아들도 사나이이다.

 

북경에는 왕야가 많다. 왕자도 많다. 북경의 '거거'도 많다. 북경의 금지옥엽은 수도없이 많았다.

 

당연히 북경의 금지옥엽은 일찌감치 흩어지거나 실종되었다. 북경의 형형색색의 왕부는 모두 서산에 지는 해와 같이 여러해동안 수리를 하지 않아서 먼지가 쌓여 있거나, 주민거주지나 국가기관의 사무실로 바뀌어 버렸다. 운이 아주 좋은 경우에는(예를 들어 십찰해 전해서가 17호의 공왕부)는 복구된 후 개방하여 관광객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원으로 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로 청나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궁을 가보아야 할 뿐아니라. 옛날의 왕부도 반드시 보아야 한다. 황량한 부지와 쓰러질 것같은 전각, 퇴색한 기둥을 보면 상상력이 솟아날 것이다. 대청왕조의 황친국척들은 어떻게 이 넓은 정원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늙고 병들고 죽었을까?

 

"구시왕사당전연, 비입심상백성가(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이는 원래 남경의 주작교(朱雀橋), 오의항(烏衣巷)을 읊은 것이다. 귀족자제의 몰락과 명문가의 쇠퇴를 그린 것이다. 북경의 여러 왕부에 사용하더라도 역시 타당하다. 옛난 왕부의 집앞에 있던 제비는 지금 어디로 갔는가? 왕부의 제비는 바로 '애신각라'라는 성씨를 지니고 검은 색 예복을 입고 있던 세습귀족이 아닌가? 북경에도 "오의항"이 있다.

 

북경에는 왕부가 많다. 심지어 가장 번화한 상업거리도 '왕부정(王府井)'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는가? 왕부정대가에는 확실히 우물이 있다. 지금도 쇠사슬을 둘어쳐놓았다. 그리고 구리로 만든 덮개도 얹어 놓았다. 필자는 사료를 뒤적여보지는 않았다. 이 유명한 우물이 어느 왕부의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왕야는 아마도 절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마시던 물을 긷는 우물이 나중에 유명한 상업거리의 부호가 될 줄은.

 

왕부정의 주위에만도 여러개의 왕부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순치연간의 섭정왕인 도르곤의 예친왕부(睿親王府)이다. 남지자(南池子)의 북쪽에 있다. 어떤 사람은 당시의 실질적인 통치중심은 자금성이 아니라 섭정왕부였다고 한다. 높이 올라가면 떨어질 때 더 아프다. 도르곤이 죽은 후, 관작이 삭탈되고, 가산이 몰수되었다. 불가일세의 예친왕부는 '마하가라묘(瑪哈喇廟)고 고쳐진다. 나중에 보도사(普渡寺, 건륭제가 이름을 하사하엿다)로 된다. 1960년대전반기까지도 라마가 거주했다고 한다. 문혁때 창고로 바뀐다. 도르곤의 억울함은 나중에 명예회복되고, 건륭제는 성지를 내려, "예친왕의 봉호를 회복시키고, 작위를 영원히 세습"하게 하였다.

 

양자 도르보의 6대손인 순영(淳潁)이 작위를 세습한다. 그리고 동단패루 북대가 석대인후통에 새로운 예친왕부를 하사받는다. 그의 자손들은 다시 머리를 들고 살 수 있게 된다. 새로 지은 예친왕부에 들어간 후, 끊겼던 영예를 지속해나간다. 민국시대후에 사립대동중학이 구매하여 교사로 쓴다. 지금의 제24중학이다. 왕부의 부침은 가족의 성쇠를 보여줄 뿐아니라, 운명의 변화막측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확실히 보이지 않는 손이 사람의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을 좌우하는 것같다. 왕부도 달과 같이 차기도 하고 기울기도 한다.

 

동단3조에는 도르곤의 동생인 도도의 제1대 예친왕부(豫親王府)가 있다. 청나라가 망한 후, 협화의원에 매각된다. 지금 병원만 보이고 왕부는 보이지 않는다.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는 환자들은 자신이 왕부의 유적지에서 진료받는 줄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어하교 동쪽의 지금 정의로 일대는 청태종의 장남인 하오거(豪格)의 숙친왕부(肅親王府)가 있다. 언급할 것은 이 숙친왕은 바로 도르곤에 의하여 작위를 박탈당하고 유폐되었고, 옥중에서 죽임을 당한다. 도르곤이 타도된 후에, 삭탈된 관작이 회복되고, 하오거의 아들이 승계하였다. 왕도성, 오영흥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하오거가 명예회복된 후, 그의 자손은 그의 음덕으로, 이백여년동안 존귀하고 부유한 생활을 지냈다. 청왕조가 쇠퇴하면서, 숙친왕부도 하루하루 내리막길을 걸었다."

 

경자지변때, 마지막 숙친왕 선기(善耆)는 의화단이 왕부부근이 열강의 공사관을 포위공격하는 것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숙친왕부는 불에 타고 약탈을 당한다.

 

팔국연합군은 불과 검을 가지고 숙친왕부를 공사관경내로 편입시키고, 일본, 이탈리아 두 공사관이 점거하여 사용한다. 일본은 그 안에 병영을 건설한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호화주택이 열강의 발굽아래 짓밟힌 것이다. 마지막 숙친왕은 돌아갈 집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동서패루 선반후통으로 옮겼다. 새 집은 이미 왕부의 규격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정의로 서쪽에는 강희제의 일곱째 아들의 순친왕부가 있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북경을 침입한 후, 영국공사의 협박으로 영국이 사용하게 된다. 동교민항은 원래 누르하치의 손자인 웨러(岳樂)의 안군왕부가 있었는데, 마찬가지 원인으로 프랑스공사관이 된다.

 

동단 북극각3조에는 강희제의 13째 아들인 이친왕 윤상의 넷째아들의 저택이 있다. 영군왕부이다. 현재는 중국청년예술극원의 창고이다.

 

왕부정을 중심으로 하여 작은 원을 그리면, 이렇게 많은 친왕부, 군왕부를 찾아낼 수 있다. 이를 보면 북경성에 왕부가 얼마나 밀집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왕부에 우물이 없었겠는가? 북경성에는 동서남북에 모두 왕부가 있고, 사방에 왕부의 우물이 있다.

 

앞에 언급항 예친왕, 예친왕, 숙친왕은 모두 "철모자왕"에 속한다. 입관때 전공으로 인하여 '세습망체(世襲罔替)"이다. 철모자왕은 모두 8명이다. 이 8명의 친왕은 대청제국을 만든 기둥들이다. 나중에 팔대가족이 이어진다. 팔대왕부에는 얼마나 많은 슬프고 기쁜 이야기가 전해질까. 제1대 예친왕, 숙친왕의 최후에서 보듯이, 소위 철모자도 도자기처럼 취약했다. 던지면 부서지는 것이다. 당연히 다시 맞출 수도 있다. 결국 황제만이 철장인인 것이다. 그가 쇠방망이를 들고 있다.

 

도르곤이 막 죽었을 때, 순치제는 전백성들에게 상복을 입게 했다. 그리고 친히 들로 나가서 제사를 지냈다. 곡을 하며 조서를 썼다. 그러나 5년후에, 자신의 강산이 단단해졌다고 생각하자, 얼굴을 바꾸었다. 다시 새로운 조서를 내서 예친왕의 죄를 물었다. 이것은 스스로 모순되는 행동이 아닌가? 금구옥언도 믿지 못할 때가 있다. 전부 믿어서는 안된다.

 

"팔"은 행운의 숫자이다. 팔기, 팔묘등등이 있다. 나중에 홍등가가 되는 곳도 팔대후통이다.

 

예친왕부, 예친왕부, 숙친왕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5명의 친왕부의 변천을 하나하나 소개해보겠다.

 

서사 남대장방후통에 누르하치의 둘째아들 다이샨의 예친왕부가 있다. 1927년, 채원배는 화북대학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지금은 모 국가기관의 숙사이다.

 

서단 대목창후통에는 누르하치의 조카인 지얼하랑의 정친왕부가 있다. 1925년 중국대학(손중산이 창건)에 임대해서 교사로 쓰게 한다. 현재는 국가교육위원회의 사무실이다.

 

평안리 태평항은 원래 청태종의 다섯째 아들인 석새(碩賽)의 승택친왕부이다. 그의 아들인 박과택(博果澤)이 승계한 후, 장친왕부로 바꾼다. 1900년 팔국연합군에 파괴된다. 원 부지의 동북쪽 모서리에는 현재 해방군 북경군구 전우문공단이 있다.

 

서성구 신문화가에는 다이샨의 장남인 악탁(岳托)의 극근군왕부가 있다. 청나라가 망한 후 웅희령이 돈을 내서 매입했다. 지금은 소학교이다.

 

태평교대가 북단의 길 서쪽에, 다이샨의 손자인 늑극덕혼(勒克德渾)의 순승군왕부가 있다. 일찌기 군벌 장작림이 7만냥을 주고 강제로 매입해서 "대수부(大帥府)"로 삼았다. 지금은 전국정협이 사용한다.

 

이 팔대 '철모자왕'의 저택이 겪은 풍우는 자금성에 바로 다음 갈 정도이다. 황제제도가 폐지된 후, 나무가 쓰러지니 원숭이도 흩어졌다. 여러 왕부의 간판은 떨어져 나갔다. 일찌기 문전성시를 이루던 호화저택은 순식간에 시들어버렸다. 그저 눈물을 머금고 바겐세일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왕야와 그 후예들은 모두 어디로 이사갔는가? 가장 먼저 파락호로 전락하는 것은 옛날의 졸부이다. 가죽이 없어지면 터럭이 어디에 붙어있겠는가? 왕부는 이백여년간의 버블을 키우다가 손가락으로 찌르자 바로 터져버렸다.

 

20세기에 왕부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900년의 경자사건이다. 의화단을 지지했던 친왕들의 왕부는 팔국연합군에 의하여 파괴된다. 두번째는 신해혁명이다. 특히 20년대이후에 만주족에게 지급하는 봉향(俸餉)이 끊기면서, 살아갈 길이 없어진 황족들은 재산을 팔아버리게 된다. 1920년 하반기에서 1930년대에 왕부의 운명은 거의 비슷했다.

 

일찌기 숭덕원년(1636년)에 청태종은 친왕, 군왕, 패륵, 패자, 진국공, 보국공, 진국장군, 보국장군, 봉국장군의 9등급의 작위를 만들어 종실에 부여한다. 그중 친왕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친왕부, 군왕부만 해도 많았는데, 그 아래 등급의 패자부, 패륵부, 장군부, 공주부는 부지기수로 많았다.

 

옹화궁은 사람들이 그저 라마묘로 알고 있다. 일찌기 왕부 즉 옹왕부였다는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황자는 나이가 들면 황궁에서 나가야 하고, 왕에 봉하면서 왕부를 주는 법도가 있었다. 강희제의 넷째아들인 옹정이 황자로 있을 때, 바로 이 곳에서 거주했다. 그가 등극한 후, '용잠지'로서 옹화국으로 개명되고, 황교의 사원이 된다.

 

공왕부를 얘기하면, 사람들은 왕왕 왕부라는 것만 알지 허션의 저택이었다는 것은 모른다. 허션의 명성은 아주 높다. 당연히 악명이기는 하지만.

 

만청의 역사는 공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영국프랑스연합군의 침입후에, 직접 혁흔이 담판을 하고 북경조약을 체결한다. 공왕부의 점유면적은 100무(1무는 200평)를 초과한다. 서쪽 교외에는 화원인 '낭윤원'이 있다. 나중에 순왕부의 화원인 '울수원'과 함께 북경대학에 편입된다. 왕부의 앞에는 마굿간과 초료장(草料場)이 있다. 나중에는 한 문호의 집이 되는데, 바로 '곽말약 고거'이다.

 

공왕부는 십찰해의 서안에 있는데, 북안에는 순왕부(醇王府)가 있다. 손친왕은 바로 공친왕 혁흔의 동생이다. 형제 둘은 이웃해서 사이좋게 살았던 것이다.

 

순왕부는 처음에 강희연간의 대학사 명주(明珠)의 집이었다. 이 집은 건륭연간에 허션이 점거하여 별장으로 삼았다. 대학사 명주가 죄를 받아서 재산이 몰수되었기 때문이다.

 

허션이 죽은 후, 다시 성친왕 영린의 집으로 하사한다. 순친왕이 넘겨받은 후에 확장을 하여 점유면적이 80무에 달한다. 순친왕의 둘째아들인 재풍이 함풍제의 뒤를 이어, 황제위를 승계하니, 바로 광서제이다. 순친왕 본인은 서태후의 매부이기도 하다. 그는 죽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손자인 부의가 다시 선통제가 될 줄은.

 

부의가 황제에 오르기 때문에, 순친왕의 또 다른 아들인 재풍은 서태후에 의하여, '감국섭정왕'에 오른다. 그리하여 순친왕부는 섭정왕부라고 칭하기도 한다.

 

청년 왕정위가 십찰해 소교에 폭약을 매설하여 이 섭정왕을 암살하고자 했으나 미수에 그친다. 어쨌든 혁명당의 폭탄은 섭정왕의 집문앞에까지 매설된다. 청왕조로서는 놀라자빠질 일이다. 아마도 여기서 말일의 냄새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1912년 손중산이 북경으로 와서 순친왕부를 방문한다. 회담장소는 보한당(寶瀚堂)이었다. 이때 청나라황제는 이미 퇴위했고, 재풍도 더 이상 섭정왕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후사를 처리하는 정도였다.

 

순왕부의 서화원은 해방후에 손중산의 부인 송경령이 거주한다. 바로 현재의 '송경령고거'이다. 여기에는 두 그루의 오래된 나무가 있는데, 일대사인 납란성덕이 친히 심은 것이라고 한다.

 

공왕부와 순왕부는 청나라말기에 가장 유명했던 두 왕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