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아(李治亞)
삼국시대 유비(劉備)의 부하장수인 관우(關羽), 장비(張飛)는 아주 저명한 인물이다. 특히 관우는 그러하다. 민간에서는 무성인(武聖人)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의 처에 대하여는 기록이 거의 없다. 의심의 여지없이, 관우에게는 처가 있다. 왜냐하면 관우는 세 아들을 두었기 때문이다. 장남 관평(關平), 차남 관흥(關興), 민간에는 셋째아들 관색(關索)이 있다고 하고, 딸도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관우의 여자는 누구일까? 정사에 기록은 아주 적다. 삼국연의처럼 관우를 거의 하늘에서 온 사람처럼 그린 사람도 관우의 여자에 대하여는 아무런 단서를 남겨놓지 않았다.
사실상 관우는 여자를 아주 좋아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처음에 관우는 유비를 따라 여포를 복양에서 포위했을 때, 진의록은 여포를 구하기 위하여 장양에게 부탁한다. 관우는 조조에게 말한다: "처에게 자식이 없으니 성을 함락시키면 의록의 처를 갖고 싶습니다." 조조가 허락한다. 성문에 도착했을 때, 다시 말한다. 조조는 그 여인의 미색이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이 취해버린다. 이 글의 개략적인 뜻은 관우가 유비를 따라 조조와 함께 복양을 공격할 때, 당시 진의록은 장양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진의록의 처는 경국지색이었다. 관우의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조조에게 간청하다. 만일 복양을 함락시키면, 이 여자를 자신에게 상으로 달라고. 조조도 동의한다. 그러나 관우가 여러번 이렇게 말하자, 조조는 의심을 품게 된다. 이 여자가 너무 예쁜 것이 아닌가? 결과적으로 성이 함락된 후 조조가 한번 보니 과연 국색천향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데려가 버린다. 관우는 당연히 분노한다. 이때부터 조조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이 여인이 바로 두부인(杜夫人)이다. 당시에 이미 진랑(秦郞)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아명은 아소(阿蘇)였다. 두부인은 조조에게 시집을 간 후에, 진랑은 조조의 양자로 된다. 두부인은 나중에 조조와의 사이에 두 아들 조림(曹林)과 조곤(曹袞)을 낳고, 딸을 하나 낳는데 금향공주(金鄕公主)라 한다.
민간에는 관우의 편을 들어서 이 역사가 어느 정도 관우를 왜곡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조조가 일찌기 초선을 관우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했었다는 거짓말을 날조한다. 당시 조조는 여포를 잡았고, 초선은 독수공방한다. 조조는 초선을 관우에 시집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관우는 흔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관우는 달아래 초선을 참하는 거동을 보인다. 이렇게 보면 초선은 관우와 스캔들이 난 여자친구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 두 명의 미녀는 관우의 여자가 아니다. 관우의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인터넷에 널리 퍼진 관우의 생애에 관한 고증이 있다. 즉, 전정방(錢靜方)의 <소설총고>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 강희 무오년, 해주수 왕주단이 우물을 파다가 관공의 광전(壙塼)을 얻는데, 그 위에 공의 조상이대의 이름과 생졸갑자가 상세히 적혀 있다" 광전은 묘비(墓碑)를 말한다. 그 위에 관우의 윗대 2대의 상세한 자료가 있다는 것이다. 왕주단은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관후조묘비기>를 쓴다. 이 글에는 관우의 처를 언급하고 있다. "후(侯, 관우)는 호씨(胡氏)를 취하여, 영제 광화원년 무오 오월 십삼일 아들 평(平)을 낳는다." 그리고 <전상통속삼국지전>과 <관후조묘비기>에서 모두 관우의 처를 호씨라고 한 것은 일종의 우연한 일치일 것이다.
야사에도 기록이 있다. 남통에는 일찌기 1970년대에 명성화(1465-1487)연간에 새겨진 <신편전상열창족본화관색출신전등사종>이 출토되는데, 그 중의 <화관색출신전>은 처음 시작부터, 유비, 관우, 장비의 세 사람이 처음 만나서는 바로 오래된 사람들처럼 여겼고, '청구 도원동"의 '강자아묘왕'의 앞에서 '하늘에 맹서한다' 그 후에 사업을 크게 벌인다. 유비는 관우, 장비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혼잣몸인데, 너희 둘은 노소가 있어 마음이 쓰일테니 나중에 마음을 돌릴까봐 걱정된다' 그러자 관공이 말한다. "나는 노소를 죽이고 형과 함께 가겠다' 장비가 말한다. "너는 어찌 자신의 집안 노소를 죽인단 말인가? 형이 나의 집의 노소를 죽이고, 내가 형의 집안 노소를 죽이겠다." 유비가 말한다. "말인즉슨 옳다." 그래서 관,장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가족을 다 죽이기로 약정한다. 장비는 관우의 집인 포주 해현으로 가서 관씨집안 노소 10명을 죽인다. 단지 차마 죽이지 못해서 이미 성장한 장남 관평을 데려오고, 이미 임신한 관우의 처 호금정(胡金定)을 풀어준다. 나중에 소영웅 관색을 낳는다. 관우는 장비의 전가족을 죽인다. 이 일을 처리한 후, 도원진으로 돌아와서, 형제 3명은 길을 나선다. 나중의 이야기는 관색이 어른이 된 후, 형주로 가서 관우를 만나 부친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나, 관우는 인정하지 않았다. 관색은 대노하여 만일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은 조조를 따르겠다고 협박한다. 그리고 칼을 뽑아서 관우등 오호상장을 붙잡았다는 등등....수호전에도 병관색(病關索)이라는 별호가 있다. 운남에는 "관색령(關索嶺)"이라는 지명도 있다. 그리고 그를 제사지내는 사묘도 있다. 이를 보면 관색에 대한 민간전설은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색"과 "평"의 옛날 전자(篆字)가 비슷하므로, 관색은 아마도 관평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관평은 일생동안 운남을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런 주장도 믿기 어렵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사학계에서 공인된 결론은 이것은 순수히 전설이고, 역사상 관색이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자료를 보면, 현재 우리는 그저 이러한 결론이 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가지는 맞다. 바로 관우의 부인이 호씨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 대명자자한 관우의 처는 아마도 이름없는 호씨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녀를 호금정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관우를 위하여 삼남일녀를 낳았다면 그 자체가 큰 공헌이다. 이렇게 큰 공이 있는 여인을 정사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장비가 처를 취할 때처럼 자극적이지도 않고, 유비가 손상향을 취할 때처럼 위험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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