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관우 "괄골요상(刮骨療傷)"의 진상

중은우시 2008. 12. 12. 19:24

작자: 미상

 

사람의 마음을 끄는 소설은 최소한 두 가지 기본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선명하게 살아있는 듯한 인물이미지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사대명저의 하나인 <<삼국연의>>도 예외는 아니다. 인물에 있어서는 웅자영발(雄姿英發)의 주유, 총혜절륜의 제갈량등등이 있고, 이야기에 있어서는 "초선차전(草船借箭)", "칠금맹획(七擒孟獲)"등등이 있다. 이처럼 남녀노소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과 이야기는 심지어 역사적 사실로 기억된다. 다만, <<삼국연의>>는 어쨌든 소설이다. 주유에 대한 역사적 오해, 공명에 대한 과장등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천년동안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는 비록 모두 일정한 역사적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묘사에 있어서는 예술화된 가공을 거치거나 심지어 허구인 경우도 있다.

 

용감하고 충의로운 이미지로 나타나는 관우는 전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전쟁터에서 기세를 산하에 떨치는 것은 물론이고, 강인한 성격과 뛰어난 의지력을 보여주는데, 그중의 압권은 아무래도 제75회에 나오는 신의 화타의 "괄골요독(刮骨療毒)"의 이야기일 것이다:

 

"...관공을 구하여 채로 돌아와서, 팔에서 화살을 뽑아냈다. 원래 화살촉에는 독이 묻어 있어서, 독이 이미 뼛속에 스며들었고, 오른 팔이 파랗게 부어올라서, 움직일 수 없었다." 관평등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홀연히 하루는, 어떤 사람이 강동에서 작은 배를 타고 와서, 채 앞에 도착했다...관장군은 천하영웅인데 오늘 독화살에 맞았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치료해주러 왔다고 말했다." 관우의 영웅됨을 앙모하던 화타가 강동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일부러 와서, 마치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찾아왔다. 시적이고 낭만적이다.

 

그 후에, "괄골요상"의 단계로 접어든다: "공은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한편으로는 마량과 바둑을 두면서, 팔을 뻗어 화타에게 칼로 가르라고 한다. 화타는 칼을 집어 손에 들고, 젊은 장교에게 대야를 들고 팔에서 나는 피를 받으라고 한다. 화타가 칼을 대어 살을 가르고, 뼈에 이른다. 뼈는 이미 푸르게 되어 있었다. 화타는 칼로 뼈를 긁어낸다. 벅벅 소리가 났다. 장막의 위, 아래에서 바라보는 자는 모두 얼굴을 가렸고, 얼굴색이 변했다. 관공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서, 웃으면서 얘기하고 바둑을 두었다. 전혀 고통의 기색이 없었다." 여기에 이르면, 진정한 영웅이미지가 그대로 나타난다. 화타도 과연 감탄하며 말했다: "그대는 정말 천신이구료"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괄골요상"은 사실이었다. <<삼국지. 촉서6. 관우>>를 보면, 관우가 일찌기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에 왼쪽팔을 맞는다. 나중에 상처가 아물었는데, 흐리거나 비오는 날에는 뼈가 아파서 참기 힘들었다. 그후 의사에게 물어보니, "화살촉에 독이 있어, 독이 뼈에 스며들었다. 팔을 가르고 뼈를 긁어 독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이 병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관우는 팔을 뻗어 의사에게 상처를 가르게 한다. 이때의 관우는 여러 장수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었따. "팔에서 피가 흘러, 대야에 가득찼다. 그러나 관우는 고기를 먹으며 술을 마시고, 태연자약하게 말하고 웃었다." 이로써 관우의 영웅적인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연의>>의 이 일에 대한 기술과 <<삼국지>>의 기록은 기본적으로는 들어맞는다. 다만, 양자간에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서인 <<삼국지>>에는 '괄골요상'을 한 의사가 화타라는 내용이 빠졌다는 점이다. <<삼국지>>는 이 일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만일 치료한 의사가 화타였다면 왜 전체 사건의 핵심인물이고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화타'의 이름을 빠트리고, 아예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당연히 이것은 필자의 추단이고 사실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사료를 종합하여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화타는 조조의 '어의'가 된 후에 "항상 그의 좌우에 있었다." 조조는 두풍(頭風)으로 고통을 겪었는데, 매번 발작하면 마음이 어지럽고, 눈이 흐릿하였다. 그러면, 화타가 침을 놓았다"는 내용이 있다. 조조는 수시로 '두풍'에 시달리는 건강상황이었고, 여기에 그의 성격을 보면, 아예 화타를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하고 그의 병을 치료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기록에 남아 있는, "원래 선비인데, 의술을 업을 삼는데 대하여 항상 스르로 후회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보면, 화타는 당시에 아마도 행동의 자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적군의 장수가 있는 장막까지 가서, 자신의 상대방을 위하여 치료해주게 하는 것은 절대로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시간적으로 분석해봐도 마찬가지의 결과이다. 사료를 보면, "괄골요상"은 동한 건안24년 즉, 219년에 발생한다. 그러나,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화타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돌아갔다가 부인이 병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며 조조에게 되돌아가지 않아서, 나중에 조조가 노하여 그를 죽여버린다. 화타가 피살된 것은 건안13년 즉, 208년이었다.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관우가 화살에 맞은 것과는 10여년의 차이가 있다. 아무리 신의라고 하더라도, 죽은 화타가 다시 살아나서 관우를 치료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관우를 위하여 "괄골요상"해준 의사는 절대 화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연의>>는 왜 굳이 '이화접목(移花接木)'하였을까?

 

다시 언급해야할 것은 <<삼국연의>>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그 자체의 특징이 있다. 즉, "괄골요상"이라는 치료법을 기초로 이끌어낸 이야기에 있어서, 단순히 관우의 각도에서만 쓰게되면 사람들이 느끼는 점이 약하게 된다. 그리하여 당시 이미 명성이 자자한 '화타'를 끌어들였고, 효과는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야기 자체에 중량감을 더하게 되었을 뿐아니라, "그대는 정말 천신이루료"라는 말을 보탬으로써 관우에 대한 찬탄의 무게가 더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쪽은 앉아 있는 사람은 후세에 "무성(武聖)"으로 칭송받는 개세영웅이고,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세상사람을 구해주는 '신의'이다. 한편으로는 술을 마시면서 바둑을 두며 태연자약하고, 곁에서는 뼈가 드러나고, 선혈이 대야에 가득찬다.

 

이들 요소가 한 곳에 집중되어 나타나게 되면, 독자들에게 강렬하고, 깊이있으며 놀라운 인상을 주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야기의 재미가 배가되는 것이다. 동시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화타의 놀라운 의술에 감탄하고, 관우의 영웅적인 풍모에 탄복하는 것이다. 이런 효과는 소설의 작가가 추구하는 바이며, 문학창작에 있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