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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관우를 죽인 진정한 흉수는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조지호(趙志浩) 

 

219년, 손권, 조조부대의 협공하에, 관우는 맥성으로 패배하여 도망치고, 포위망돌파에 실패하여, 매복하고 있던 마충(馬忠)에게 살해당한다. 관우를 해친 진정한 흉수가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4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손권(여몽이 기획)

둘째, 조조(사마의, 장제가 기획)

셋째, 제갈량

넷째, 유비

 

첫째 견해는, 손권이 관우의 교만과 무례를 참지 못하고, 그리고 조조의 봉상을 받기 위하여 산채로 잡아서 관우를 죽였다는 견해이다. 대체적인 경과는 이렇다. 여몽이 계책을 내고, 거짓으로 병이 든 것처럼 하여 손권에게 불려가고, 관우를 속인 후, 형주를 탈취했다는 것이다.

 

둘째 견해는 조조가 손권을 이익으로 유인하여 관우를 제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대체적인 경과는 이렇다. 관우의 수엄칠군, 우금제거이후, 조조는 천도하여 적을 피하려 한다. 사마의, 장제는 계책을 내서, 봉상의 이익을 걸고 손권에 권유하여, 관우의 후방을 기습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견해는 제갈량이 처음 삼고초려후 나왔을 때, 직위가 아주 낮아서 관우에게 무시를 당했다. 적벽대전후에는 관우가 질투하였다. 제갈량은 마음에 천하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반드시 교만하고 제어가 되지 않는 관우를 제거해야 했다. 그래야 장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손권의 칼을 빌어 관우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대체적인 경과는 이렇다. 제갈량이 평소에는 관우를 공경하였지만, 관우가 고군으로 반년여나 분전하는 중요한 시기에, 심모원려의 제갈량은 모르는 척하였고, 유비에게 지원군을 보내자고 건의하지도 않았다. 방법을 강구하여 전략적으로 구해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넷째 견해는 관우는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에 항거하려는 정책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관우는 왕왕 유비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했다. 이것은 직접 관직을 요구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어떤 때는 유비의 의사와 반대로 가기도 했다. 양번지전후 식량운송을 제대로 못한 미방(유비의 처남)을 죽이려 한다. 그래서 관우가 곤경에 처했을 때, 유비는 병력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이 몇 가지 견해를 종합해보면, 역사의 복잡성은 더욱 강화된다. 관우의 죽음은 수수께끼중의 수수께끼이다.

 

특히 뒤의 두 가지 견해는 직접적인 사료에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일부 사람들이 역사의 경험에 근거하여 추측한 것이다. 그러나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다수인들이 비교적 인정하는 것은 관우의 성격이 자신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