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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관우의 형주 7년을 논함

by 중은우시 2008. 8. 5.

글: 호공(虎公)

 

건안13년(208년)의 적벽대전은 비록 삼분천하(三分天下)의 기초를 놓았지만, 진정한 삼국시대를 열기 위하여는 아직도 두 가지 문제가 더 해결되어야 했다: 첫째는 삼대 실력집단이 당시 나머지 잔여 할거세력을 정복해야 했다(조조가 마초, 장로를 취하고, 유비가 익주, 한중을 취하고, 손권이 회하유역을 공격한 것), 둘째는 '천하의 중심'인 형주(荊州)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형주는 삼대집단의 각축이 이루어지는 핵심지역이었고, 이곳이 해결되지 않으면 삼분천하의 할거는 안정을 이룰 수 없었다.

 

형주문제는 조조, 손권, 유비 삼대집단의 군사, 외교적 측면에서의 밀고당기기식의 힘겨룸이었다. 건안17년(212년)에서 건안24년(219년)까지, 형주를 지키고, 천하의 중심에 앉아있던 사람은 바로 한수정후(漢壽亭侯) 관우(關羽)였다. 이 7년간, 관우는 최선을 다하여 지키다가, 위세를 천하에 떨치는 단계를 지나, 맥성에서 패주하는 결과를 맞이하였다. 그간의 풍운변화는 단순히 "소홀히 하여 형주를 잃다"라는 말로 개괄할 수는 없다.

 

1. 사천진격시대의 형주(건안17년-건안19년, 212년-214년)

 

건안16년(211녀), 유비는 사천으로 들어가서, 익주를 노린다. 212년, 방통이 죽고, 사천의 전투가 급박해진다. 유비는 제갈량에 명하여 장비, 조운 및 형주의 주력군을 이끌고 사천으로 들어가 지원하게 한다. 후방에는 한수정후, 양양태수, 탕구장군 관우만 남겨두었다. 그는 형주의 소수병력을 이끌고 유일한 후방인 형주를 지켰다.

 

관우에 있어서, 동쪽으로는 손권과 마주하고, 북쪽으로는 조조를 마주하여 양대세력을 상대해야 했다. 형주의 병력(원래의 형주병력에서 극히 일부분만 남았다)만으로 지켜야 했으니, 압력이 상당히 컸다. 다만, 이때의 시국은 동서쪽의 두 전선이 중심이었다. 서쪽에서는 유비가 익주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조조가 강회지구를 놓고 손권과 반복적이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비가 사천을 점령하는 3년동안, 관우가 받은 압력은 컸다(방어, 후방물자조달, 통치. 주의할 점은 유비가 전선에서 전투를 하는데, 물자와 병력조달은 모두 형주에서 해결해주어야 했다). 전체적으로, 이 3년간의 형주정세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리고 관우의 능력과 역할이 충분히 발휘되고 입증된 시기였다. 관우는 확실히 얻기 힘든 인재이고, 혼자서 일처리를 해낼 수 있는 대인물이었다(손권, 조조가 모두 그를 꺼리고 형주사람들이 그를 존경한 것이 사실이다)

 

2. 한중쟁탈시기(215-219년봄)

 

시간은 흘러 건안20년(215년)이 되었다. 적벽대전이 있은지 7년이 흘렀다. 손권은 강회(안휘지구)에서 조조와의 전투가 일단락되었다. 쌍방은 합비일선의 동쪽을 기본적인 경계로 확정했다. 회고해보면, 손권으로서는 고민이 안될 수가 없었다; 적벽대전후에 조조는 관중을 평정했고, 유비는 막 익주를 취했다. 그런데, 자신은 7년동안 바쁘게 움직였지만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견고했던 손유연맹에 위기가 닥친 것이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얻었으므로, 제갈근을 형주도독으로 하도록 요구했다. 유비가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막 양주를 도모하고 있다. 양주가 평정되면 형주를 동오에 주겠다'. 손권은 '이는 거짓말이고 돌려주지 않으려 한다. 그저 그럴듯한 말로 시간을 끌려는 것이다'" 이때, 손권은 유비라는 맹우에 대하여 실망했다. 나는 동쪽에서 조조의 압력을 버티며 싸우면서, 네가 서쪽에서 사천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었는데, 어찌 이렇게 나를 대할 수가 있는가?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의 다툼이 불가피해졌다.

 

손권은 제갈근의 알선이 철저히 실패하자, 먼저 일방적으로 장사, 영릉, 계양의 삼군군수를 임명하여 부임시킨다. 아직까지는 유비와 철저히 결렬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세명의 군수는 모두 관우에 의하여 쫓겨나서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손권은 무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된다.

 

손권은 이렇게 배치한다. (1) 여몽으로 하여금 선우단, 서충, 손규등의 2만병력을 이끌게 하여, 장사, 영릉, 계양의 삼군을 취하게 한다; (2) 노숙으로 하여금 만명을 데리고 파구(巴丘)에 주둔하게 하여 관우를 방어한다; 이렇게 되자, 관우는 혼자의 힘으로는 병력을 나누어 싸울 수가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긴급히 사천의 큰형 유비에게 도움을 청한다.

 

유비는 당연히 손해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신속히 반응한다. 그는 친히 5만인마를 이끌고 공안(公安)으로 간다. 관우로 하여금 3만인마를 이끌고 익양으로 진군하게 한다. 형제 두 명은 나누어서 손권을 공격하는 것이다. 손권은 형세가 좋지 않다고 보고, 황급히 여몽에게 강북으로 되돌아가서 노숙을 도우게 한다. 쌍방은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지게 생겼다. 형세는 극도로 긴장되었다.

 

마침, 북방의 조조가 이때 한중(漢中)으로 진격하여 장로(張魯)를 취한다. 그리하여 유비의 배후를 직접 위협했다. 막 획득한 사천이 위급하게 된 것이다. 유비는 경중을 고려한 후, 신속히 손권과 화해를 한다. 조건은 쌍방이 형주지구를 나누어 갖기로 한 것이다. 형주, 강하, 장사, 귀양은 손권이 갖고, 남군, 영릉, 무릉은 유비가 갖기로 한 것이다. 쌍방은 계속 연맹관계를 유지하기로 하였지만, 이미 결렬이 가까워졌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손권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는데, 그로서는 여러가지를 고려했을 것이다: 첫째, 북방의 조조로부터 거대하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손유연맹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둘째, 유비가 내놓은 조건은 받아들일만했다. 양측의 경계는 호북동부에서 호북중부로 바뀌게 되었다. 셋째, 유비가 조조와 한바탕 싸움을 벌이게 되었는데, 자신이 먼저 손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기회를 보아 움직여도 된다고 보았다.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일 유비와 죽어라 싸우게 되면, 유비는 조조와 연합할 수 있으므로, 자기가 받는 압력은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유비는 다시 황급히 사천으로 되돌아오고, 북방을 개척한다. 219년 여름이 되어, 조조의 수중에서 한중을 빼앗아 온다. 유비는 다시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와 조조집단의 서부경계선도 기본적으로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사람의 시선은 형주로 향했다.

 

215년 손권과 형주를 나눠가진 때로부터 219년까지, 4년의 기간동안, 관우가 받는 압력은 계속 가중되었다. 첫째는 자기의 지반과 실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손유연맹에 이미 위기가 곳곳에 잠재되어 있어서 신뢰할 수 없었다. 셋째는 조조로부터의 압력이 계속 존재하였는데, 유비는 익주의 형세를 안정시키는데 집중하고 있었고, 조조와 한중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우리는 관우의 재주나 명망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단도부회등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는 관우가 양측에서 거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투쟁의 형식도 다양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215년의 충돌에서 알 수 있듯이, 일단 손권이 병력을 동원하여 밀고 오면, 형주로서는 그저 지키고 방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두 가지 점은 유의하여야 한다. 하나는 실력비교에 있어서, 유비는 손권에 대하여 이미 상당한 우세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쌍방이 215년의 군사대치에서 손권이 급한 게 많아서 평화협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잇다. 다른 하나는, 215년 유비가 사천을 나설 때, 그가 이미 헤어진지 3년이나 된 동생 관우를 만나보았는가? 이것도 수수께끼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두 사람의 관계나 감정으로 볼 때, 당연히 만났을 것이다. 다만, 당시의 형세가 위급하여, 만나지 못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것이 사실상 두 형제가 나란히 어깨를 같이하고 싸운 전투였다.

 

3. 219년의 유비집단의 형세분석

 

유비에 있어서, 219년 가을은 확실히 풍성한 가을이었다. 5월에는 조조의 수중에서 한중을 빼앗았다. 그리하여, 익주를 본부로 하고, 형주와 한중을 양날개로 거느리게 되었다. 제갈량의 융중대에서의 전략목표가 이미 전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아쉽게도 이 풍성한 가을은 너무나 짧았다.

 

(1) 익주 사방의 형세

 

제갈량의 계획에 따라, 유비는 익주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형주를 점거하고, 북으로는 형주를 차지하였으며, 남으로는 남만을 다독거리고, 서로는 융족과 화해하였다. 사실 , 서쪽과 남쪽은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제갈량은 나중에 친히 남정하는데, 이는 평화롭게 지내겠다는 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칠종칠금"의 이야기는 이러한 뜻을 보여준다. 서쪽의 강족은 마초의 공헌으로 역시 관계가 좋게 되었다.

 

219년 봄, 유비는 한중을 강제로 점거한다. 5월, 조조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한다. 한중도 전략요충지이고, 아주 중요한 곳이다. 유비는 장거리안목을 지닌 영명한 결정을 한 것이다; 즉, 위연을 진원장군으로 발탁하여 한중태수를 맡게 하여 한중을 지키도록 하였다. 당시 여러 신하들은 한중을 지키는 임무는 당연히 유비가 가장 신임하는 장비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장비는 스스로도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유비의 이 결정은 그의 안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리하여 유비의 군중은 모두 깜짝 놀라게 된다.

 

유비는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위연에게 묻는다: "이제 경에게 중임을 맡기니, 경은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위연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만일 조조가 천하의 병사를 이끌고 공격해 온다면, 대왕께서 막으시면 되고, 편장군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온다면, 대왕께서 집어삼키시면 됩니다" 유비는 좋다고 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위연은 유비집단내에서 졸지에 관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장으로 발탁된 것이다. 이는 장비나 마초보다도 더욱 중용된 것이다. 관우와 위연은 개인관계가 아주 좋았다. 두 사람의 성격과 재능도 유사했다. 다만, 위연은 젊었다. 관우보다 20살이나 어렸다. 우리는 유비의 안목이 뛰어났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을 쓰는 측면에서 제갈량은 확실히 유비만 못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측면에서도 유비는 더더욱 독보적이었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위연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계속 경계하고 시기했다.

 

(2) 형주의 형세

 

유비의 치명적인 헛점은 형주였다. 형주의 형세는 215년보다 더욱 악화되었다.

 

하나, 형주는 이미 손권이 절반을 가져갔다. 경제, 군사역량이 약화되었고, 전략종심도 더욱 축소되었다.

둘, 조조는 이미 낙양으로 돌아왔고, 조인은 양양, 번성을 점거하여 언제든지 대병력을 이끌고 쳐들어 올 수 있게 되었다.

셋, 손권은 유비가 조조와의 대항에서 우세를 점하고, 한중을 취하는 것을 보고, 형주를 빼앗으려는 욕망이 더욱 강렬해 졌다.

넷, 손권은 이미 217년에 조조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쌍방은 정략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언제든지 조조와 연합하여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다섯, 형주는 중원, 강동에 있어서 지키는데 험준한 장애가 없었다. 지리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형주는 익주와 수천리 떨어져 있었고, 협곡과 강이 가로놓여 있어서 지원이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략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3) 유비의 선택

 

이상의 상황하에서, 개인적으로 유비가 형주의 처리에 대하여 시급히 결정해야 했고,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중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상책: 친히 형주로 가서, 손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당시 유비세력이 우세했고, 공동으로 조조에 대항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든 패는 아주 좋은 것이었다.

 

중책: 바로 인마를 동원하여 형주를 보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장수를 보내어 관우를 보조하게 하는 것이다.

 

하책: 관우로 하여금 형양을 사수하도록 하고, 일단 손권이나 조조가 침범해오면 굳건히 지키면서 지원군을 기다린다. 유비는 3개월이면 지원병력을 보낼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위험성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것은, 유비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우로 하여금 적은 병사를 이끌고 중원으로 진공하게 한 것이다. 이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유비는 219년 5월에 한중을 얻얻고, 관우가 형주를 빼앗긴 것은 이해 윤12월이다. 중간에 약 반년의 시간이 있다. 유비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하나, 여름에 유봉, 맹달, 이평등으로 하여금 상용(上庸)을 공격하게 하였다.

둘, 가을에 여러 부하들이 유비에게 한중왕이라는 봉호를 올리고, 유비는 문무관리들에게 대거 작위를 내렸다.

셋, 건물을 짓고, 정자등을 세웠다. 성도에서 백수관까지 사백여구역에 이르렀다.

 

아마도 반평생을 힘들게 살아왔던 유비는 이 큰 승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여러 신하들의 칭송과 떠받들어주는 것에 빠져버린 것같다. 아니면, 익주, 한중의 일이 너무 많아서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관우가 형주의 전투에서 보내는 계속된 승전보에다가 관우에 대한 믿음이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반년간을 허송세월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고, 결과는 만회할 수 없다.

 

4. 219년의 형주전투

 

관우가 조인(曹仁)을 공격한 구체적인 개시시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봄이나 여름경이었을 것이다. 그때 조조는 마침 한중에서 유비와 대치하고 있을 때이고 후방이 비어 있었다. 관우의 공격은 아마도 유비의 서부전선에서의 압력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만일 조조가 낙양으로 되돌아간 후에 출격했다면,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아마도 출병의 목적은 견제일 것이다. 다만, 전과가 너무 좋다보니 감당할 수 없게 일이 커져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1) 제1단계: 번성(樊城)을 공격

 

관우수중의 병력은 약 3만이었다. 후방을 방어하는 부대를 제외하고 이번에 출병한 사람은 아마도 2만명가량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파죽지세였다. 양양을 빼앗았고, 조인은 번성을 사수하며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2) 제2단계: 우금(于禁)을 체포

 

"조조는 우금을 보내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비가 내렸고, 한수가 범람했다. 우금이 이끄는 칠군이 모두 수몰되었다. 우금은 관우에 항복한다. 관우는 장군 방덕을 참했다." 이것이 바로 관우의 위세를 천하에 떨치게 된 시기이다. 이는 219년 여름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관우는 조조의 3만병마를 포로로 잡았다. 이때, 관우의 전략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하나, 후방전략: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고, 장군 부사인이 공안에 주둔하였다. 후방을 지키면서 전방을 지원했다(이후 사실은 관우의 후방배치에 큰 문제가 있었듬이 드러난다)

둘, 정면전투: 관우는 우금을 대파하고 번성공격을 강화한다.

셋, 선봉부대: 언성, 완성등지의 지방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조조의 태수를 죽이고, 관우와 호응한다; 이외에 양, 협, 육혼의 도적들이 관우의 도장과 명호를 받고, 관우의 지원군이 된다. 그리하여 관우의 위세가 화하에 떨친다. 관우는 북방중원지역에서 조조반대세력의 맹주로 등장한다. 낙양은 이런 녹림세력들의 소란속에 형세가 위급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아마도 조조는 천도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두가지 문제를 언급해보기로 한다. 하나는 관우가 형주를 지킨 7년동안 확실히 그저 놀고먹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형주를 반석처럼 유지했을 뿐아니라, 중원북벌을 위한 충분한 연락과 기초작업을 해두었다. <<삼국지>>에서는 "손권은 안으로는 관우를 두려워하고, 밖으로는...."이라는 마이 있다. 형주의 절반만으로도 손권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아무런 이유없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우와 강호세력은 아주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같다. (1) 관우는 어려서 살인을 하였는데, 이것은 약간은 강호무림사람의 냄새를 풍긴다; (2)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이라 칭했고, 세상의 호신이었다" <<삼국지>>에서는 관우의 무력이 장비보다 강했다고 되어 있다. (3) "양, 협, 육혼의  여러 도적들이 관우의 도장과 명호를 받고 관우의 지원군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관우가 당시 중원녹림에서의 명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관우는 무성인으로 받들어지고, 지금도 강호세력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위와 같은 요소들과도 관련될 것이다.

 

(3) 제3단계: 서황(徐晃)과 전투

 

관우와 서황의 전투는 순조롭지 못했다. 서황은 먼저 언성을 격파하고, 낙양주변지구의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관우의 선두부대를 궤멸시킨다. 이때 관우는 친히 나가서 맞싸우지만, 순조롭지 못했다.

 

이번 전투에 관하여, <<장락우장서전>>에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관우를 대파했다고 했는데 바로 완승을 거둔 것이라는 말이다; <<관장마황조전>>에서 기록은 "관우가 함락시킬 수가 없어,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고 하고 있다. 즉, 전투가 불리해지자 퇴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주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번 전투는 그다지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다.

 

이처럼 삼국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이번 전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보자면, 이번 전투는 서황이 관우를 이긴 것임은 분명하나, 위서에 기록한 것처럼 그렇게 통쾌하고 일방적으로 승리한 것은 아닐 것으로 본다:

 

하나, 관우가 퇴각한 후, 서황은 승기를 잡아서 추격하여 전과를 더욱 올리지 않았고, 손권에게 형주를 빼앗긴다. 이로써 볼 때, 강력한 관우를 맞이하여 그의 공세를 막아낸 것만도 대단한 전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조조는 나중에 서황을 칭찬하는 말을 하는데, 그가 번성의 포위를 풀어준 공로를 얘기하였을 뿐이고, 다른 표시나 설명은 없었다.

셋, 관우의 후방은 안정되지 못했다. 전투가 잘 되지 않자,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는데, 이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서황의 승리는 실제로 관우가 우금을 체포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번성을 포위한 전과는 컸지만, 관우는 결국 이렇게 실패하였다. 이것은 손권이 기습하고, 미방과 부사인이 반란을 일으키고, 후방에서 직접 지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인, 우금, 서황은 패배해도 괜찮았다. 조조는 이미 장료에게 지원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우만은 패해하면 안되었다. 그래서, 형주를 잃은 것은 관우의 능력때문만은 아니다.

 

(4) 제4단계: 맥성으로 패주

 

219년 윤12월은 아주 길었다. 관우에게 있어서 이해의 13달은 아주 길었다. 아마도 그가 이 해를 벗어날 수 있었더라면 운세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오주전>>에는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24년, 관우는 조인을 양양에서 포위한다, 조조는 좌장군 우금을 구하러 보낸다. 한수가 넘쳤고, 관우는 배와 병사로 우금등 보병기병 3만을 붙잡아 강릉으로 보낸다.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한다. 손권은 안으로는 관우를 두려워하고, 밖으로는 자기의 공으로 하고 싶었다. 조조에게 서신을 보내어 관우를 토벌하는데 힘을 보탤 것을 요청한다. 조조는 관우와 손권이 서로 싸우도록 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고, 조인으로 하여금 활을 쏘아 관우에게 보여준다. 관우는 망설이며 가지 못한다. 윤월에 손권이 관우를 정벌한다. 먼저 여몽을 보내어 공안을 기습하여, 장군 사인을 포로로 잡는다. 여몽은 남군으로 가고, 남군태수 미방은 성을 가지고 투항한다. 여몽은 강릉을 차지하고, 노약자를 돌보고, 우금을 풀어준다.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취하고, 자귀, 지강, 이도를 얻는다. 그리고 이릉에 주둔하고, 삼협입구에서 촉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서 서쪽으로 맥성을 지킨다. 손권은 사신을 보내어 그를 끌어들이고자 한다. 관우는 거짓으로 투항하는 척하며, 깃대를 세워서 사람이 성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도망치기 위하여 병사들을 해산하여, 겨우 십여기가 남았다. 손권은 먼저 주연, 반장으로 하여금 길을 막게 한다. 12월, 반장 사마 마충은 관우와 그 아들 관평, 도독 조루등을 장향에서 붙잡는다. 마침내 형주를 평정한 것이다.

 

형주를 잃은 것과 관우패망의 책임에 관하여, 근본적인 원인은 유비 제갈량의 무심함과 맹목적 낙관에 있닥 본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형주의 형세는 관우에게 있어서 이기는 것만 허용될 뿐, 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일국의 군주가 한 대장군에게 부여한 임무가 이처럼 가혹한 환경이었다. 비록 이 장군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역시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사실 손권은 계속 관망하고 있었다. 만일 관우가 다시 서황을 대파했더라면, 그는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관우에게 있어서 대치는 지극히 불리한 것이었다. 그는 이겨야 했고, 그것도 빨리 이겨야 했다.

 

관우 본인의 오만한 성격도 이렇게 빨리 패배하는 원인의 하나였다. 손권은 관우를 두려워하여 적극적으로 화친하고자 했으나, 관우는 거절한다. 미방, 부사인의 발탁도 잘못되었다. 그리고 유비 수하의 다른 신하들에 대하여도 오만했다(마초를 우습게 본 것이 그 예이다). 유비가 관우에게 병사를 더 주겠다고 했더라도 아마도 그는 화가나서 거절했을 것이다. 이는 자기 능력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유비가 다른 장수를 보내어 관우를 도와주고 싶어도, 관우가 싫어할 것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당연이 이것은 모두 가정이다. 결론적으로, 유비의 전략적 실패가 형주를 잃게 만들었다. 관우의 주관적인 잘못이 형주를 이렇게 빨리 잃고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나중에 유비가 병사를 일으켜 복수하고자 하는데,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겨우 왕년의 탄식이고, 잃어버릴 것은 더 많은 실리 심지어 자신의 생명이다(여기에 장비의 생명까지 더해서).

 

5. 관우

 

"유비는 두 사람과 같은 침대에서 잤고, 가깝기가 형제와 같았다(恩若兄弟)". 이 말은 삼국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얘기되었던 것이다. <<삼국지>>에서만 다섯 곳에 나온다. 조조, 장료, 정욱등의 전에서 모두 나타난다. 이로써 볼 때 이는 당시에 공인된 사실이어던 것같다. 건안3년(198년)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관우로 하여금 하비성을 지키게 한다. 그리고 자기는 소패로 되돌아간다. 건안17년, 유비가 사천으로 들어갈 때, 관우를 남겨 형주를 지키게 한다. 유비의 관우에 대한 신뢰와 의지는 무조건적이었고, 평생가는 것이었다.  이런 신임과 의지는 감정과 능력의 두 측면에 모두 걸친다. '군신일체'라는 말이 이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유비와 관우, 장비의 우정은 역대 군신관계에서 가장 돋보이고 고귀한 것이다. 친형제간이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충분히 신뢰하고 함께 고난과 향락을 같이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비와 관우, 그들은 이별의 시험도 거쳤고(관우가 조조의 군영에서 되돌아온 때, 그리고 관우가 형주를 지킨 7년간), 위난과 풍파의 시험도 거쳤다(30년간). 마지막에는 생과 사의 시험을 거쳤다. 이런 관계는 왼손이 오른손에 대한 신뢰나 의지와 같다. 무조건 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진지한 것이다. 유비와 관우의 관계에 대하여 '의문'을 나타내는 소수 '질의파(質疑派)'가 있지만, 이들에게 고증을 더욱 신중하게 하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다만 그들 스스로에게 자문해보라고 하고 싶다: 자기의 내심세계에 이런 유형의 감정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렇게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