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누가 무술변법(戊戌變法) 실패의 원흉인가?

중은우시 2012. 1. 31. 17:55

글: 장굉걸(張宏杰)

 

 

 

백년세월의 얇은 장막을 통해 무술변법의 전후를 살펴보면, 우리는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중국현대화전환이라는 이 중요한 발걸음은 실패로 끝날 운명은 아니었다는 것을. "변법"은 그 당시 '대세'였고, '여러 사람들이 바라는 바'였다. '변법'을 시작할 때, 형세는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태후도 지지자의 신분으로 이 신기한 수술을 방관했다. 대부분의 대신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변법을 지지했다. 최소한 그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당연히 개혁이 직면한 장애는 컸다. 중국문화의 강대한 타성이 온 천지에 널려 있었다. 노신이 말했던 것처럼, 중국사회의 '초안정구조'하에서 탁자 하나를 옮기려 해도 피를 흘려야 했다. 그러므로, 만일 성숙하고 노련한 정치가가 이 개혁을 주도했더라면, 분명히 '잔걸음으로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조금씩 단계적으로 진행했을 것이다. 쉬운 일을 먼저 하고 어려운 일을 뒤에 했을 것이다. "서도이점갱지(徐圖而漸更之)". 매번 개혁조치를 내놓을 때마다 이를 지지하는 역량이 이를 반대하는 역량보다 크게 되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런 '따뜻한 물로 청개구리를 삶는(溫水煮靑蛙)" 방식이라면 그들은 사람들의 관념을 하나하나 바꾸고, 개혁의 장애를 하나하나 제거하였을 것이다.

 

불행한 것은 운명이 기구한 중국은 적합한 사람을 고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완전히 반대로, 광서제이건 강유위이건 모두 실무실행능력이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전형적인 '분노청년'이다. 혈기방장한데다가 경험이 적었다. 그들은 개혁을 너무나 간단하게 보았다. 강유위가 설계한 개혁방안의 첫번째 단계는 신하들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는 것이었다. "황제가 친히 건청문에서 대서군신의식(大誓群臣儀式)을 거행하였다." 모든 대신들로 하여금 변법의 결심을 문서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천하의 신하들을 모두 마음을 다지도록 하고, 그 후에 신정을 실시하면, 자연히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런 희극적이고 최면술적인 의식으로 수천년동안 쌓인 강대한 사상의 타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실로 치인설몽(痴人說夢)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마음이 급했고 욕심이 많았다. 하루빨리 완료하고 싶었다. 하룻밤만에 중국의 면모를 바꾸고 싶었다. 청일전쟁이후 기나긴 침체기를 거쳐, 광서제의 정신상태는 분수식의 고조기에 달했다. 성격이 조급한 그는 한꺼번에 모든 폐해를 해결하게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하룻밤만에 중국의 면모를 일신하여, 중국을 가장 약한 나라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과거에도 그는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일하기만 하면, 자신을 연약한 황제에서 일거에 가장 강인한 무소불능의 황제로 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연약한 사람일수록 의지의 역량을 더욱 미신하는 법이다.

 

강유위는 황제보다도 더 조급해 했다. 강유위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크게 변하고, 모두 변하고,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면 나라를 세울 수가 없다(非大變全變驟變不能立國)"였다. 그는 중국이 서방을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중국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모조리 바꾸고 철저히 바꾸어야 한다고 보았다. 개혁은 일도양단의 방식으로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신구가 병존하고, 담장 위에 걸터앉은 꼴이 되며 결국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라도 스스로 강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일도양단을 하려면 깃발과 북을 울리면서, 급풍취우(急風驟雨)처럼 연이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광서24년 사월이십삼일에 반포한 <정국시조(定國是詔)>부터 팔월 육일까지의 103일동안, 황제는 모두 286건의 개혁유지를 반포한다. 평균 매일 3건이었다. 그중 7,.8월의 17일내에 모두 132건의 유지를 내린다. 마치 소나기가 퍼붓는 것같이 줄줄이 내려왔다. 조서의 내용에는 정치체제, 관료제도, 관료감원, 기구신설, 공상업발전, 철도건설, 은행개업, 재정개혁, 국방혁신등등이 포함되어 거의 모든 사회의 각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수구대신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하여, 이들 상유(上諭)의 대부분 내용은 강유의의 건의에 따라, 직접 관련부서에 하달하여 집행하도록 하였다. 아무런 토론도 거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이 실무적으로 집행할 수 없었다.

 

광서제에 있어서, 이는 그가 모든 것을 건 정치도박이었다. 거대한 좌절을 겪었던 그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회복하고' 공을 세움으로써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무술변법과정에서 광서제는 전례없이 강렬하고 강인하고 용감했다. 그는 거의 이십여년의 생애에서 축적된 정력을 모두 쏟아내는 것같았다. 그는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낮에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는 두 눈에 핏줄이 섰지만, 정신은 흥분하여 멀쩡했다. 그와 강유위는 모두 천진하게 생각한다. 그들이 성지로 일본과 서방제국의 약방에 따라 영단묘약을 대청제국의 신체내에 주입하면, 얼마후, 대청제국은 새 살이 돋고, 기사회생할 것이라고 믿었다. 강유위가 여러번 낙관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3년이면, 이 변법은 대청제국을 자강, 자립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강유위는 '일본은 개혁 삼십년만에 강해졌다. 그러나 중국은 나라가 크고, 인민이 많아서, 변법 3년이면 큰 틀이 잡히고, 5년이면 세부 규정까지 준비하며, 8년이면 성과가 나타나고, 10년이면 패권을 쥘 수 있다." 10년동안, 그는 대청제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부강하고 만국을 거느리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30년이면 중국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세계제1의 강국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런 '개혁'은 어린아이장난에 불과했다. 한 서방의 관찰자는 이렇게 말한다. 황제가 주재하는 개혁은 '중국의 흡수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 3개월내에 생각한 개혁에 관한 사항은 9년이 되어야 소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그들은 많은 구체적인 개혁조치를 엉성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저 일시적으로 통쾌함만 추구했고, 그에 따른 악영향은 고려하지 않았고, 예비방안도 마련해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회엘리트의 근본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그들은 모든 독서인들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황하에서, 돌연 과거를 폐지했다. 이 거동은 일거에 대청제국의 모든 응시준비생인 독서인들이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수백의 한림, 수천의 진사, 수만의 거인, 수십만의 수재, 수백만의 동생'들로부터 분노를 산다.

 

개혁이 개시된지 얼마 되지 않아, 황제는 다시 명령을 하달한다. 첨사부등 7개의 한가한 관청을 폐지한 것이다. 근 만명에 이르는 관리의 밥그릇을 빼앗았다. 그러나, 일자리를 잃은 관리들에게 새로운 출로는 마련해주지 않았다. 이 명령이 내려지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관료사회가 크게 진동한다.

 

그리하여, 유신변법이 시작되지마자 사람들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예측한다. 유신파의 저명한 인물인 장원제(張元濟)는 그해 육월 초구일 친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변법의 거동은 아무런 두서도 없고, 좋은 모습이 아니다. 나는 얼마가지 못할까봐 두렵다."

 

개혁조치가 많이 반포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된다. 이 몇몇 젊은이들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갈수록 많은 중간역량은 개혁의 반대파로 돌아선다. 원래 개혁의 지지자들은 수수방관하기 시작한다. 개혁반대의 물결이 형성되고 있었다. 심지어 변법의 핵심인물조차도 변법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예감한다. 칠월, 강유위의 동생인 강광인이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큰 형 강유위의 계획은 지나치게 크다. 그를 지지하는 동지들은 너무나 적다. 조치가 너무 과격하다. 그래서 그를 배척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그런데 황상은 실권이 없다. 변법이 어찌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심히 우려된다."

 

강광인은 말한다. 그는 일찌기 형에게 개혁의 속도를 좀 늦추는 것이 좋겠다고. 그래서 사회가 따라갈 수 있도록 하는게 좋겠다고. 그러나 강유위는 격앙하며 공박하고는 쫓아보낸다. 강유위는 말했다. 삶과 죽음은 운명이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다. 강광인은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말한다. 나의 큰형은 사상이 너무 고매하고, 성격이 너무 고집스럽다. 책에서 읽은 지식을 고집하고, 고리타분한 사고를 타파하지 못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실로 다른 방법이 없다.

 

광서제와 강유위가 받은 교육은 그들이 주재하는 변법이 이렇게 '거칠고 엉성한' 방식으로 진행되도록 만들었다.    

 

비록 그들의 두뇌에 이미 '서학'이라는 새로운 술이 들어있지만, 병은 역시 옛날 병이다. 그들이 추진하는 것은 신법이지만, 추진방식은 완전히 '구식'이었다.

 

전통적인 교육방식은 그들로 하여금 일원적, 일방적, 단선적 사고방식을 형성시켰다. 그들의 마음 속에 세계는 선천적인 '도(道)'가 결정하는 것이다. 이 '도'는 사해의 어느 곳에서나 다 옳고, 백대를 내려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믿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이 '도'를 장악하는 것이고, 그 후에 머리에서 꼬리까지 들이부으면 된다.

 

서방열강이 중국으로 침입하기 전에, 그들의 머리 속에 있는 '도'는 여전히 공맹지도였다. 그러나 청일전쟁후, '서양의 법'이 그들 머리 속의 새로운 '도'가 된다. 전통교육의 영향하에, 그들은 모두 습관적으로 광대한 강령 혹은 사상으로 개혁과정에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문제를 대체하고자 했다. 하나의 신화로 또 다른 신화를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새로운 '도'가 있으면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도'를 가지고 모든 사물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만사무불리, 천하무부정(萬事無不理, 天下無不定)".

 

전통적인 교육은 광서제와 강유위의 두뇌에 '세속이성'을 건립시켜주지 못했다. 오히려 종교형식의 열정을 주입시켰다. 그들은 일단 진리의 빛이 천하대지를 비추면, 모든 의혹은 사라지고, 모든 어려움도 해결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무엇이 책략인지도 몰랐고, 무엇이 우회인지도 몰랐다. 무엇이 복잡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보기에, 세계는 성인이 말한 것처럼 분명했다. 그들은 사물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천진하게 믿었다. 모든 오래되고, 낙후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 낡은 것은 한켠에 미뤄놓고, 백지를 한장 꺼내서, 새로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면 된다고. 행동함에 있어서, 그들은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몰랐다. 점진적인 추진방식을 몰랐다. 습관적으로 방대한 강령이나 계획을 내놓고, 그들이 생각한 모델과 규율로 '원스톱'식으로 사회를 개조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개혁, 방색은 '대변' '쾌변' "전변"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광서제의 극단적인 행위특징과 중국역사의 규율은 일맥상통한다. 수천년동안, 중국사회는 안정과 혼란의 양극단을 순환적으로 오갔다. 왕조가 처음 들어서고, 개국황제가 극단적으로 힘을 내며, 잠자고 먹는 것까지 잊으며 천하를 잘 다스린다. 그러나 수십년만 지나면, 통치자의 의지는 극단적으로 해이해지고, 모든 것이 느슨해진다. 얼마후 천하는 대혼란에 빠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일원화된 '도'문화관의 지배하에, 중화민족의 문화성격에 탄력성이 결핍되어 있다. 항상 양극단을 오간다. 우리는 영원히 일종의 원스톱식 해결방식을 추구한다. 무술변법의 실패는 강유위의 완전서구화의 '도'가 실패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태후를 우두머리로 하는 보수세력은 다시 '중국전통' '중국기파(中國氣派)'를 들고 일어나서 여러 신들의 도움하에 서양귀신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문을 걸어잠그면 영원히 청정한 생활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억압된 혁명역량이 순식간에 폭발한다. 그리하여 중국은 아시사역사상 최초의 완전서구화된 민주공화국을 설립한다. 그리고 화려하지만 실질은 없고, 조급하게 성공시키려는 의회제민주주의를 실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