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홍루몽

<<홍루몽>>은 청춘문학인가?

중은우시 2010. 9. 13. 21:39

글: 유앙(劉仰)

 

대만작가 장훈(蔣勛)은 <<홍루몽>>이 청춘문학이라고 했다. 신판 <<홍루몽>> 드라마의 제작자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판 <<홍루몽>> 드라마에서, 주요연기자는 대부분 미성년자로, 청춘우상극의 노선을 가고 있다. 그들의 부모는 완전히 할아버지,할머니의 모습이다. 아마도 이들 조연을 통하여 주요배역의 '청춘'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친구들중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여러번 얘기한 사람이 있다. <<홍루몽>>은 청춘문학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과거의 <<홍루몽>>에 대한 평가와 약간은 다른 것같다.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이 <<홍루몽>>을 읽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홍루몽>>을 읽으면 쉽게 타락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시 청춘문학이라고 선전하다니, 이는 청소년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홍루몽>>이 청춘문학인가 아닌가? 이 문제는 정확하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핵심은 사람들이 "청춘문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렸다. 만일 청춘을 묘사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면, <<홍루몽>>은 청춘문학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청춘문학"을 청소년작가의 문학작품, 예를 들어, 한한, 곽경명, 합불여생과 같은 류라면 <<홍루몽>>은 청춘문학이 확실히 아니다. 만일 "청춘문학"을 청소년이 읽는 것이라고 한다면, <<홍루몽>>은 청춘문학이라고 하기 힘들다. <<홍루몽>>은 본질적으로 중노년인이 쓴 청춘에 관한 소설이다. 그 성격을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다. 당연히, 중노년인도 젊은이들이 읽는 책을 쓸 수 있다. 심지어 아동을 위한 작품, 동화이야기도 쓸 수 있다. 동화이야기는 아동들이 쓴 이야기가 아니라, 성년인이 쓴 아동들이 읽을 거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홍루몽>>은 충노년인이 쓴 청춘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만일 <<홍루몽>>을 청소년이 읽을 것이라고 한다면 적합하지는 않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필자는 <<홍루몽>>이 청춘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청춘문학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필자는 <<홍루몽>>을 아주 어려서 읽었다. 개략 가보옥과 비슷한 나이일 때 <<홍루몽>>을 읽어보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그때 그저 어른들에게서 그 책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읽은 것이지, 읽고난 후에도,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고, 왜 그런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한번 훑어본 정도였다. 본인이 소년시기에 <<홍루몽>>을 읽은 것이 얼마나 인상에 남아있는지는 지금은 찾아볼 수도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홍루몽>>을 읽는다면 아마도 같은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홍루몽>>에 묘사한 것이 청춘이야기이지마, 실제로 그것은 청소년이 읽을 책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홍루몽>>의 매력에 빠져든다. 이것은 <<홍루몽>>의 독자가 청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증명해준다. <<홍루몽>>은 중노년인의 청춘에 대한 회고와 이해이다. 그중 많은 것들은 청소년당시의 진실된 이해가 아니라, 중노년작가가 여러해 이후에 소설 속의 청소년에게 억지로 가져다 부친 것이다. 내 스스로 청소년시대를 되돌아보면, 가물가물한 일들이 많다. 나는 심지어 상상에 의존하여 스스로의 청소년시대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사실상, 그 가물가물한 이야기 속의 인물은 필자가 소년시대에는 얘기해 본 적도 없는 것이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며, 대부분은 스스로의 상상일 뿐이다. 당시의 진실된 상황은 이미 모호해졌다.

 

예를 들어, <<홍루몽>>의 유불도에 관한 경향을 보면, 청소년에 있어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것들이다. 하물며 그것을 자신의 생활에 관철하기는 더욱 어렵다. 사실, <<홍루몽>>에는 석양의 기운이 가득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청춘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생명력이 날로 허약해지고 있다. 대옥장화(黛玉葬花)를 예로 들면, 어린아이가 이런 놀이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옥장화에서 탄식하는 생명의 무상함은 어린아이의 진실된 마음상태로 보기 어렵다. 더욱 합리적인 해석이라면, 그것은 그저 중노년작가의 이 어린아이놀이에 대한 이해일 뿐이다. 비록 이 사건이 정말로 작자가 겪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나중에 소설 쓸 때처럼 느낀 것은 아닐 것이다. <<홍루몽>>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부잣집자녀, 고관대작집자녀의 부패한 생활이다. 이는 작자가 어른이 된 후에 느낀 것이고, 개인주의의 도피일 뿐이다. 청소년이 사회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질과 심리에 대하여, <<홍루몽>>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저 사회에 진입하는데 대한 두려움과 비웃음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홍루몽>>은 그저 석양의 기운이 짙은 작가가 묘사한 상상중의 무료한 청춘이다. <<홍루몽>>의 작자는 '비록 늙어서 마굿간에 누웠지만, 뜻은 천리를 간다"는 기백이 없다. 그가 보기에 부패는 막 피기시작한 꽃에서부터 이미 시작된다. 그리하여, <<홍루몽>>은 청소년독자에게 그다지 의미가 없다. 청소년이 <<홍루몽>>을 읽어서, 그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면, 나중에 사회에 진출하는데 좋은 점이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홍루몽>>은 중노년인의 읽을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중노년인은 <<홍루몽>>을 통하여 스스로를 해소한다. <<홍루몽>>은 생활에서 청춘시대가 바로 부패의 시작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늙어서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중노년인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사람에 있어서, 생명무상의 느낌은 청소년시기에 노력하고 분투하던때보다 강하기 마련이다. 사망에 대하여 개인주의에서 출발하면, 성공하고말고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홍루몽>>은 마치 이들 중노년인들의 공허한 정신을 의탁할 수 있는 곳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홍루몽>>을 청춘문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 그저 하나의 전제하에서만 성립된다. 그것은 바로 <<홍루몽>>이 묘사한 것이 청춘이야기라는 것이다. 다른 여러가지 의미에서는 <<홍루몽>>이 청춘문학이 아니다. 그저 중노년인이 새로 끼워맞춘 청춘의 조각들이다. 그리고 모든 조각에는 중노년인의 가치평가가 붙어 있다. 신판 <<홍루몽>>이 많은 비난을 받는 이유중, 일부분은 바로 <<홍루몽>>이 묘사한 청춘과 청춘문학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때문이다.

 

현재 사회에서는 <<홍루몽>>이 청춘문학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시대적 배경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여러 측면에서 청춘을 강조하고, 청춘이 모든 가치를 초월한다. 많은 사람들은 늙었다는 것을 통탄하고, 젊음만이 사회의 유일하게 가치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서방사회 정차가들의 경선에서 젊음은 아주 중요한 장점중 하나이다. 젊음에 대한 태도는 실제로 비정상적일 정도로 경도되어 있다. 젊은이들의 욕망은 쉽게 확대될 수 있다. 중노년인은 비교적 자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청춘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실제로 상품사회가 대규모로 상품을 판매하는데 문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욕망의 자극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아동과 청소년은 상품사회에서 가장 쉽게 파고들 수 있는 목표계층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노인을 존경하는 원칙으로 모든 젊은이들을 압박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만 지나치게 젊음을 강조하고 늙음을 폄하하는 것도 비정상적이다. <<홍루몽>>을 청춘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시류에 영합하는 것(媚俗)이다. 영합하는 대상은 바로 당금 상품사회에서 좋지 않은 뜻을 품고 끝도없이 끌어올리는 청춘의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