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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태평천국)

태평천국 이수성(李秀成): 자술서의 진위

by 중은우시 2008. 12. 30.

 

 

 

글: 문재봉(文裁縫)

 

1864년 7월, 증국전(曾國)이 이끄는 십여만의 상군(湘軍)이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天京, 남경)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천왕 홍수전(洪秀全)은 우울증이 겹쳐 죽었고, 죽을 때까지도 여전히 천국신화의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홍수전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홍천귀복(洪天貴福)이 유천왕(幼天王)이 되었다. 다만, 이때의 태평천국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고, 상군은 언제든지 천경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19일, 상군이 공성을 시작한다. 수천대의 대포가 일시에 발사되고, 천지를 진동시킨다. 천경의 성은 금방 몇군데 틈이 나타나고, 그 곳으로 상군의 병사들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온다. 성을 수비하던 태평군 병사들은 상군과 참혹한 가두전을 벌인다. 천국의 희망인 유천왕 홍천귀복을 보호하기 위하여, 태평군의 총사령관 이수성(李秀成)은 친히 포위돌파를 시작하기 전에 자기가 오래 전장터에 타고다니던 말을 유천왕에게 넘겨준다. 한바탕의 혈전을 거쳐, 이수성은 마침내 일부 사병들과 성밖으로 뚫고 나가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천경성을 포위한 상군병사는 너무나 많았다. 이수성은 포위돌파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흩어져 버렸다. 해가 밝아지고, 말도 지치고 사람도 피곤해져서 이수성은 천경성 밖의 한 낡은 사당(廟)에 잠시 도피해서는 유천왕과 그를 따른 무리들의 행적을 알아본다. 그러나 이수성의 왕의 복장은 두명의 백성의 주의를 끈다. 그들은 이수성의 모습을 한번 보고는 바로 어제 저녁 천경성에서 도망쳐 나온 중요인물이라고 추측한다. 만일 그를 붙잡아서 증총사령관에 바치면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수성이 잠든 틈을 타서, 그를 붙잡고, 23일 이수성은 포박당한 상태로 청나라군영으로 끌려온다.

 

이수성이 포로로 붙잡혔다는 소식에 상군의 총사령관 증국번은 급히 남경으로 온다. 그리고 이수성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이수성은 체포되어서부터 피살되기까지 모두 16일이 걸렸다. 그는 감옥에서 친필로 수만자에 이르는 자술서를 쓴다. 이것이 후인들이 말하는 <<이수성자술(李秀成自述)>>이다. 후인들이 보는 이수성의 진술에서는 사람들이 이수성은 확실히 무릎을 꿇고 투항할 의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술서에서 이수성은 증국번이 "인애(仁愛)"하고, "덕화지심(德化之心)"이 있다고 추켜세우고, 증국번이 그에 대하여, "은정후의(恩情厚義)"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중당(증국번)이 은혜가 깊고 도량이 넓으며, 세상을 구하려는 마음을 지녔다는 것을 들었다" "나는 노중당의 대의와 은혜가 깊으며 실로 큰 인재라는 것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후회막급이다" "스스로 길을 잘못들어,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음을 한탄한다"고 했다. 그리고 천경성이 함락된 것과 관련하여서는 "나의 주인은 모략이 없었고, 청나라는 복이 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죄장(罪將)"의 신분으로 태평군의 잔여부대를 투항하도록 설득하여, "대청황상에 의를 다하고, 이전에 죄많은 우민의 잘못을 빌며" "대청에 심복의 우환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다"고 했다. 진술에 나오는 이런 말들로 인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수성이 변절하여 청나라에 투항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친필로 청나라에 꼬리를 흔들며 목숨을 구걸하는 진술서를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수성은 왜 변절하여 투항했을까? 이 문제를 둘러싸고, 후세의 학자들은 오랫동안 결론이 나지 않는 논쟁을 벌였다. 저명한 태평천국역사전문가인 나이강(羅爾綱) 선생은 이수성이 증국번에 투항한 것은 삼국시기의 촉장 강유(姜維)가 종회(鍾會)에 투항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투항은 영화부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수성은 왕야의 신분으로 있을 때도, 전장터에 나아가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웠으며, 전혀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이때 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서,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꼬리를 흔들고 애걸할 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죽음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볼 때, 이수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수성이 죽을 때 42살이었다. 그는 형을 받기 전에 전혀 두려움이 없이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그리고 10수의 절명시를 썼다. 이는 이수성이 일찌감치 죽을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삶을 구하는 희망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증국번에 투항한 것은 주로 증국번으로 하여금 자립하여 황제가 되도록 권하기 위함이며, 반청의 거병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증씨집안의 후인은 이런 말을 퍼트렸다: "이수성은 문정공(증국번)이 황제가 되도록 권유했다. 문정공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라는 소문이 그것이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진인각(陳寅珏)은 이렇게 추측한다. 증국번이 <<이수성자술>>의 원고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것은, 그 안에 반드시 남에게 말못할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아니한 부분은 도대체 어떤 부분일까? 무슨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지금 고증할 수는 없다. 증국번이 반란을 획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청나라조정이 의심하는 것은 피하고자 했을 것이다. 잘못하면 자신에게까지 살신지화가 미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방법을 강구하여 <<이수성자술>>의 원고내용을 일부 삭제하고, 명을 어기고 마음대로 이수성을 죽여버린 것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이수성이 증국번에 투항한 것은 강유를 본받아, 동산재기를 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목숨을 구걸하는 반도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증국번이 친히 이수성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그에 대하여 어떤 약속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수성은 노련하고 심계가 깊은 증국번에 대하여 환상을 품었을 것이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수성의 자술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수성이 홍수전의 후기행위에 대하여 불만이 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술서에서 스스로 "사람을 잘못만났다"고 적은 것이다. 태평천국후기에, 홍수전은 일종의 미신적인 광신상태에 들어간다. 위창휘 양수청의 변란과 석달개가 떠난 사건등의 영향으로, 그는 성이 다른 왕들에 대하여 경계심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한했다. 이수성은 후기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홍수전의 의심과 견제를 받았다. 충성심에 큰 타격을 입는다. 한번은 이수성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소주항주의 포위망을 뚫어보겠다고 건의했다. 홍수전은 그가 병사를 이끌고 떠나버리거나,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했다. 이수성은 떠나기 전에 자기의 노모와 처자를 천경에 남겨 인질로 삼았다. 이렇게 심한 의심은 충성심에 가득찬 이수성에게 커다란 모욕이었다. 이러한 점은 그가 홍수전의 태평천국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주인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없는 충성의 보답이 이런 것이었던가? 진술에서 이수성은 증국번을 추켜세웠다. 그리고, 공을 세워 청나라황상에 속죄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동시에, 당시 이수성을 심문하는데 참여했던 청나라장군 조열문(趙烈文)은 자기의 필기에서 이수성이 "말에 삶을 구하는 뜻이 있었다"고 적었다. 이수성은 증국번을 믿었다. 한줄기 희망을 안고 수만자의 투항서를 썼다. 그리고 염치를 모르고 증국번에게, "은혜를 입었는데 갚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증국번은 후환을 남겨두지 않았다. 자술서를 얻은 후에 이수성을 죽여버린 것이다.

 

위의 두 가지 논쟁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학자들이 논쟁하는 바탕은 모두 이수성이 쓴 <<이수성자술>>이다. 그런데, 이 자술은 도대체 진짜인가 가짜인가? 1864년 8월 7일, 이수성은 자술서를 다 쓴 후에 증국번의 남경군영에서 처형당한다. 청나라 법률에 따르면, 이렇게 중요한 범인이 쓴 자술서는 범인이 화압(畵押)한 후 원본 그대로 조정에 보고해야 한다. 다만, 증국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때문인지 모르겠다. 증국번은 8,9명의 이수성과 필적이 비슷한 막료를 모아서, 이수성의 자술서를 다시 쓰게 했다. 모든 사람은 그 중의 작은 부분만을 썼다. 모두 자술서의 전체 내용은 알지를 못했다. 증국번은 이 자술서를 가지고 한번 수정한 후에 군기처로 보냈다. 동시에 안휘 안경의 구여당에서 인쇄했다. 이것이 바로 후인들이 보는 "구여당각본(九如堂刻本)"이다. 증국번은 왜 자술서를 다시 쓰게 했을까? 왜 자술의 원본은 그가 수장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았을까? 여기에 정말 후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말못할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후세의 학자들은 <<이수성자술>>의 진위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일찌기, 태평천국에서 관리를 지냈던 영국인 Augustus Fredrick Lindley는 자신의 <<태평천국혁명친역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1852년, 태평군이 남경을 점령하기 전에, 만청의 정부측에서는 이미 <<천덕공장(天德供狀)>>이라는 문서를 날조했다. 그들의 말로는 반군우두머리의 공술서라고 했고, 그들이 이 우두머리를 체포했다고 했다. <<이수성자술>>은 아마도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이 문서는 아마도 어느 유명한 포로가 위조하였거나(그는 아마도 이때문에 사면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양강총독 증국번의 교활한 막료가 위조한 것일 것이다." 1956년, 국가사법부의 법의연구소의 필적감정전문가도 증씨후인이 수장하고 있는 <<이수성자술>>은 "증국번이 위조한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태평천국사전문가인 나이강 선생은 반대의 결론을 제시한다. 그는 광서통지관의 호남 상향 증국번의 후인의 집에서 초록한 <<이수성자술>>의 원고의 초본을 당시 찍은 사진의 필적, 용어, 어투로 보면, 증국번의 후인의 집에서 소장한 <<이수성자술>.은 확실히 이수성의 친필이라고 한다.

 

이후, 학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사학자 영맹원(榮孟源)은 자술서에서 태평천국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기휘(忌諱)를 범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를 근거로 <<이수성자술>>은 증국번의 위조라고 결론을 내렸다. 진욱록은 그러나 <<이수성자술>>이 그의 친필이라는 의견을 견지한다. 기휘를 범하는 문제는 아마도 이수성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일시적인 소홀로 빚어진 것이라고 본다. 동시에 <<이수성자술>>의 원고가 만일 가짜라면, 증국번은 왜 이것을 보배처럼 후손에게 물려주었겠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원본원고는 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민국시대, 광서통지관이 상향 증국번의 후인에게서 찍은 "원고"이고, 다른 하나는 대만에서 영인출판한 증국번의 후인 증약농이 소장한 "원고"이다. 다만, 학자들은 이들 원고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있다. 어떤 학자는 <<이수성자술>>의 원고는 이수성의 진짜 글이라고 본다; 어떤 학자는 현존하는 자술은 모두 증국번이 고친 것이라고 본다, 글자체가 비슷한 것은 전문적으로 위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수성자술>>이라는 책이 바로 이수성이 도대체 변절하여 투항했는지 여부를 밝히는 유일한 근거이고, 또한 이수성이 충성스러웠는가 아닌가를 밝히는 유일한 근거이다. 유일한 증거인 <<이수성자술>>이라는 글의 진위조차 의문이 있다면, 이수성이 변절했는지 여부를 밝히는 문제는 더욱 답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