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억(何憶)
최근에 우연히 석달개가 숨긴 보물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은 석달개가 대도하(大渡河)전투에서 패배하기 전날, 군중에 휴대하고 있던 대량의 금은재보를 은밀히 숨겼고, 보물지도를 만들어서 남겼다는 것이다. 보물지도에는 "면수고산, 보장기간(面首靠山, 寶藏其間)"는 여덟글자가 쓰여 있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 보물지도를 나중에 국민당 사천성 주석인 유상(劉湘)이 얻었고, 그는 지도에 그린대로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찾았는데, 대도하 자타지구 고승점의 뒷산 산자락이라는 것이다. 비밀리에 1000여명의 노동자와 군인을 동원하여 팠다고 한다. 노동자와 군인들은 산에 구멍을 내고 뚫고 들어갔는데, 과연 3개의 동혈(洞穴)이 있었다는 것이다. 동혈의 입구는 모두 돌맹이를 쌓아서 막아 놓았고, 삼합토로 봉해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2개의 동혈을 파냈는데, 그 안에는 자질구레한 도금물품, 금머리띠, 은혁대버클, 조도(弔刀), 옥액화(玉額花), 손화살통, 호수(護手), 목각품등 소량의 물건들이 나왔을 뿐, 대량의 보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 물건들은 나중에 상자에 담겨 성도(成都)로 옮겼고, 성정부 기요비서 요패순(廖佩純)이 유상의 부인인 유주서(劉周書)에게 건네주었다.
나중에 노동자 병사들이 세번째 동혈을 파냈을 때, 군통(軍統)의 이목에 탐지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장개석에 보고가 올라가고, 장개석은 이를 안 후에 고생물학자 겸 인류학자인 마장숙(馬長肅) 박사등으로 하여금 천강(川康, 사천성 서강성)고생물고찰단을 이끌고 가서 간여하게 하였다. 그리고 고공골동품보호위원회등이 전보를 보내어 발굴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유상은 어쩔 수 없이 발굴을 중단한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상은 명을 받아 부대를 이끌고 사천을 나와 항일전쟁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보물발굴작업은 중단되게 된다.
이 일은 <<세계의 숨겨진 보물의 수수께끼>>와 <<숨겨진 보물 이야기>>등의 책에 기술되어 있다.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다만, 유상이 파낸 것이 과연 석달개의 보물일까? 이 점을 확실히 하려면 필자의 생각으로는 고고학적 발굴이 필요할 뿐아니라, 당시 대도하변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석달개는 군사천재였다. 그는 일찌기 배상제교에 가입해서, 홍수전, 풍운산, 소조귀, 양수청등과 함께 금전의거를 일으킨다. 나중에 익왕(翼王)에 봉해지고,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선다. 광서에서 남경까지 그는 전공이 혁혁하여, 태평천국의 주요 장수중 하나로 성장한다. 태평천국의 서정(西征)시기에 증국번의 상군에게 패하여 계속 물러나게 된다. 이때 석달개가 명을 받아, 구강(九江)의 전선으로 증원되어 나간다.
그는 한편으로 구강등지의 수비군들의 완강한 저항을 지휘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정예부대를 몇 개의 소규모부대로 나눈 다음, 증국번의 상군수사(湘軍水師)들을 파양호안에 고립시킨다. 그리고 화공을 써서 불태워버린다. 이 전투로 증국번의 수군은 거의 전멸된다. 다급해진 증국번은 물에 빠져 자살하려고까지 생각한다. 나중에 석달개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청나라의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을 훼멸시킨다. 그리하여 청나라군대의 천경에 대한 포위공격을 푼다. 이로써 태평천국은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석달개는 이때의 혁혁한 공로로 태평군의 장사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다.
1856년 여름, 양수청은 천왕 홍수전으로 하여금 친히 동왕부로 와서 그를 만세(萬歲)에 봉하게 하자, 홍수전은 양수청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다. 홍수전은 비밀명령을 내려, 안휘독사인 북왕 위창휘로 하여금 천경으로 돌아오도록 한다. 위창휘는 양수청과 원한이 깊었다. 그는 병사를 이끌고 천경으로 와서 양수청과 그의 가족과 부하 2만여명을 죽여버린다. 석달개는 천경에 사태가 발생한 것을 보고 급히 천경으로 되돌아온다. 살인에 눈이 벌개진 위창휘는 석달개까지 죽이려고 한다. 석달개는 부하들의 도움으로 천경을 빠져나간다. 위창휘는 석달개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부하 2만여명을 죽여버린다.
석달개는 강서의 전선으로 나간 후, 즉시 친병 수만명을 모아서, 천경으로 되돌아가서 위창휘에게 복수의 기회를 노린다. 홍수전은 이렇게 계속되면 국면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천경군민의 협조하에 위창휘를 죽이고, 이 피비린내나는 내분을 끝낸다. 석달개가 천경에 되돌아온 후, 이전의 원한을 잊고, 심지어 그의 전가족을 몰살시킨 위창휘의 부친과 형제들도 다치지 않게 처리한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천경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변란으로 인한 혼란국면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다만, 석달개의 충성심은 홍수전의 시기를 불러온다. 그는 석달개가 정권을 잡은 후, 공로가 현저하고 인심을 얻는 것을 보고, 그리고 석달개의 수하부대는 모두 태평천국의 정예부대이며 실력이 상당한 것을 보자, 석달개도 양수청이나 위창휘처럼 자신을 해칠까 걱정했다. 그리하여, 석달개에 대하여 경계하고 그가 국가를 독단할 것을 두려워했다. 홍씨 일가의 천하를 그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석달개를 견제하기 위하여, 홍수전의 그의 형인 홍인발을 '안왕'에, 홍인달을 '복왕'에 앉혀 군대의 양식과 풀을 관리하게 하고 국가정사에 관여하게 한다. 홍수전의 이런 조치는 그들이 의거를 일으킬 때 처음한 약속에 위배되었다. 당시, "금전에서 함께 의거를 일으키는데 참가하고, 큰 공을 세운 자가 아니면 왕의 작위를 주지 않는다"라고 약속했었다. 이는 또한 석달개의 충성심에 큰 상처를 준다.
석달개는 홍수전이 자신을 함정에 빠트려서 제거할까봐 우려했다. 그리하여 결국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석달개는 자신의 20만 부대를 이끌고 천경을 떠나 서쪽으로 간다.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는 가는 길에 포고를 붙였다: "나는 원정을 떠나 나라에 보답하겠다. 언젠가 공을 이루고 되돌아와서 우충(愚忠)을 나타내겠다". 석달개가 이끄는 십여만대군은 여러 곳에서 전투를 계속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근거지가 없는 상황하에서, 군대의 손실이 참혹했고, 양식과 풀이 모두 모자랐다. 사기도 떨어졌다. 상군의 총사령관 증국번은 이 점을 알아차리고, 기뻐하며 말했다. "석달개는 절강에 주둔하다가, 북건에 주둔했다. 호남에 들어온 후 영기에 주둔하고, 보경에 주둔했다. 이자를 따르겠다는 자가 점점 줄어든다. 식량을 조달해줄 근거지가 없다. 양식은 반드시 노략해야 하고, 탄약도 반드시 운반해야 한다. 행군하다보니 산골짜기의 사이에 피로해 있다" 그러므로 포위공격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석달개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장사령으로 물러났다가, 사천성을 전전했다. 결국 사천에서 상군에게 대패한다. 나머지 부대는 청나라군대의 포위에 대도하에 고립된다. 진퇴유곡의 처지에, 사지에 빠진 것이다.
나중에 청나라군에서 사람을 보내어 투항을 권고한다. 석달개만 투항하면, 태평군의 수만병사의 생명은 다치지 않겠다고 하였다. 석달개는 수만부하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5살된 아들 석정충(石定忠)을 데리고 청나라군영에 가서 담판을 벌인다. 낙병장, 당우경에게, 부하들을 살려줄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청나라군대는 말을 뒤집었다. 석달개부자를 감금했을 뿐아니라, 따라온 태평군의 무기를 회수한 후 모두 죽여버린다.
석달개는 성도로 붙잡혀가서 심문을 당하게 된다. 심문하는 도중에, 청나라 총사령관 낙병장이 그에게 묻는다: "너는 투항할 것인가?" 석달개는 늠름하게 대답했다: "나는 죽으러 온 것이다. 다만 나의 부하들을 살려달라고 온 것이다. 현재는 그냥 죽고 싶은 생각뿐이다." "성공하면 왕이요, 실패하면 도적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번에는 네가 나를 죽였지만, 내세에는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을지 어떻게 아느냐?" 그후에 대의늠름하게 형장으로 가서 능지처참의 형을 당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석달개가 형을 당할 때, 여전히 태연했다고 하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고 한다. 능지처참으로 죽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고 한다.
석달개의 처지는 역사의 비극이다. 후인들이 그를 그리워하여, 그가 죽지 않았다는 전설이 떠돈다. 즉, 당시 청나라군영에 가서 담판한 것은 석달개가 아니라, 그의 용모가 비슷한 양자라는 것이다. 당시에 5살짜리 석중청을 데려간 것은 바로 그가 석달개라고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석달개 본인은 일찌감치 청나라군대가 진공해 오기 전에, 이미 심복을 데리고 포위권을 벗어났다. 이런 주장은 아주 그럴듯하게 전파되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천에 은거해 있는 석달개를 본 적이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장은 더욱 구체적이다. 석달개가 포위를 뚫고 나간 후에, 자기의 나머지 부대와 대량의 보물을 가지고 귀주와 광서의 경계선인 총산(叢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곳은 여러 산이 연이어져 있어, 군대를 숨기고 주둔시켜 동산재기를 도모하기에 좋은 곳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이 곳에 산채를 만들고, 보물을 산채의 한 동굴에 묻었다. 이를 그가 재기할 때 쓸 자금으로 삼고자 했다. 다만, 나중에 천경이 청나라군대에 점령되고, 홍수전이 병사하여, 태평천국이 철저히 실패하게 되자, 이곳에 은거하고 있던 석달개도 나이가 들면서, 점차 동산재기의 신념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이곳에 오랫동안 은거하였다. 당연히 이것들은 모두 후세인들의 아름다운 상상일 뿐이다. 실제로 당시의 상황과 청나라군대장수들의 기록을 보면, 석달개는 죽임을 당했다는데 전혀 의문이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보물이라는 것도 전설에 따르면, 석달개가 보물을 묻은 시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죽기로 결심하고 청나라군영으로 떠나기 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설에서와 같이 포위망을 뚫고 나온 후이라는 것이다.
양자를 비교하면, 역시 첫번째 주장이 그래도 더 믿을만하다. 그리고 구체적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석달개가 포위망에 갇힌 후에, 그의 처첩은 어느날 밤에 동시에 자살한다. 석달개는 사람을 시켜 6개의 관을 사오게 해서 처첩의 시신을 묻는다. 다만, 나중에 어떤 사람이 강에서 석달개의 처첩의 시신을 봤다고 한다. 관에는 그가 처첩의 시신을 묻은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쓴 것같다는 것이다. 무슨 용도로 쓰는 것이 처첩을 묻는 것보다 중요할 것인가? 당시의 상황하에서라면 당연히 재기에 쓸 군자금일 것이다.
이들 관은 비밀리에 고승점의 뒷산에 있는 산자락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소위 보물지도를 남겼다. 나중에 이 보물지도는 뇌(賴)씨성의 한 노인이 얻어서, 자자손손 전해줬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유상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첫부분에 얘기했던 유상의 보물찾기가 시작된 것이다. 나중에 장개석은 중경으로 도망쳐 온 후에 군통의 두목인 대립에게 명하여, 석달개의 보물을 찾으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산사태가 나서, 진흙이 흘러내려 현지의 모습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그리하여 유상이 예전에 발굴하던 곳이 어딘지를 도저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상의 여러가지 흔적과 상황에 비추어 보면, 석달개는 군중의 중요한 물건을 묻은 것은 사실인 것같다. 그러나, 당시에 긴박한 상황하에서, 대단한 보물숨기기공사를 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당시에 태평군은 이미 몰릴대로 몰린 상황이므로, 옷도 부족하고 양식도 부족했다. 그러므로, 무슨 대단한 금은보화를 묻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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