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도단방(陶短房)
홍선교(洪宣嬌)를 얘기하자면,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다. 태평천국의 맹아에서 멸망까지, 근 20년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그녀 서왕낭(西王娘)이 아닐까?
일부 태평천국에 우호적인 사람들의 묘사를 보면, 홍수전의 친여동생인 홍선교는 무예가 고강할 뿐아니라 대의를 알아서, 단결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단결시켰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소조귀(蕭朝貴)에게 시집가고, 나중에 홍수전, 양수청 및 석달개의 안정과 화합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했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쌍칼을 잘 썼고, 신술(神術)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홍수전, 풍운산을 구해주었을 뿐아니라, 청나라의 맹장을 죽이고, 서양의 병사를 죽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평천국을 사교로 보고 반역으로 보고, 대청을 정통으로 보는 문인들에게도, 홍선교는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먼저 예쁜 얼굴을 무기로 하여 무지몽매한 농민들을 입교시켰고, 다시 미색으로 홍수전, 양수청, 위창휘, 석달개의 사이를 오갔다. 홍수전은 그녀의 매력으로 천하를 얻는데 큰 도움을 받았고, 그녀의 홍안화수로 나라가 흔들리기도 했다.
또 일부의 사람들, 예를 들어 유명한 극작가인 양한생 선생은 홍선교를 아주 복잡한 여성으로 그렸다: 어떤 때에는 질투로 이성을 상실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본성을 깨달아 두뇌가 아주 맑기도 하다.
치켜세우는 것도 좋고 깍아내리는 것도 좋다. 어쨌든 문인들이 쓴 홍선교는 모두 무예가 고강하고, 능력이 뛰어난 여강자, 여영웅이며, 부끄럽지않은 태평천국의 여자제일인이다.
그런데, 기괴한 것은 홍선교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은 청말민초, 즉 태평천국이 멸망한 30여년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그녀를 여장군, 여영웅으로 묘사한 것은 1902년 황소배가 광동의 <<소년보>>에 연재한 <<홍수전연의(洪秀全演義)>>이다. 그리고 그녀를 최초로 구미호로 묘사한 것은 약간 뒤에 채동번이 쓴 <<청사연의(淸史演義)>>이다. 나중에 그녀에 대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묘사는 거의 모두 이 두 권의 책에 나오는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일찌기 일부 사학계의 선배들이 지적한 바 있다. 태평천국시대에 청나라측의 기록에 '홍선교'라는 사람에 대하여는 털끝만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홍선교는 철두철미한 허구의 인물이라고 얘기한다.
홍선교라는 사람이 존재했는가?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다.
홍선교는 사실 홍수전의 친여동생이 아예 아니다. 홍수전에게는 두 명의 누나와 동부이모의 여동생이 하나 있다. 그러나 금전의거전날인 1850년에야 홍수전의 모친과 처는 광서로 왔다(혹은 아예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홍선교는 광서 토착인이다. 일설에는 광서 계평 자형산 사람이라고 하고, 일설에는 광서 귀현 사곡촌 사람이라고 한다. 부친은 왕정권(王政權)이라고 하는데, 마치 홍수전의 4촌인 사곡(賜谷)의 왕씨(王氏) 후손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녀는 홍수전과 4촌형제자매관계에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홍선교는 당연히 '왕선교'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홍씨로 부르는가?
사실 그녀는 처음에는 '홍'씨로 성을 고치지 않고, 양(楊)씨로 고쳤었다. 원래 석탄을 굽던 양수청과 소조귀는 모두 한 세력의 우두머리였다. 그리하여 둘은 서로 연합하여 의형제가 되었다. 방법은 양수청이 소조귀의 처인 왕선교를 여동생으로 삼는 것이다. 왕선교는 그리하여 '양선교'가 된다. 나중에 홍수전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선교는 홍수전의 신격화에 상제의 친딸이 되어, 예수, 홍수전, 양수청등의 친여동생이 되는 것이다. 거의 이때, 그녀는 양선교에서 홍선교로 변신한다. 소조귀도 거의 이때부터 '상제의 사위'로 변신한다.
'거의'라는 것은 쓰여져 있는 제1차자료에는 모두 '홍선교'라는 이름에 제대로 쓰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선교성홍(宣嬌姓洪)'나 그녀의 '천왕매자(天王妹子)'라는 신분에서 추단해낸 것이다. 그러나 상제교의 방식에 따르면, 양수청, 위창휘, 풍운산, 석달개 등이 모두 홍수전의 상제와 관련이 되지만, 모두 성을 '홍'으로 고치지 않았다. 이를 보면 선교가 성을 고칠 이유는 없는 듯하다. 이것도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만일 홍선교가 양씨나 홍씨로 이름을 바꾸지 않았더라도, 계속하여 '왕선교'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홍수전은 일반사람들이 왕(王)이라는 성을 쓰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홍선교의 부친은 성을 황(黃)으로 바꾼다. 홍선교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다면 아마도 '황선교'가 되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점이라면, 홍선교의 부친인 황정권의 이름에 나오는 3글자이다. 이것은 모두 피휘하여 고친 것일 가능성이 많다. '왕'씨성을 황으로 고친 것 이외에도 홍수전의 전(全)은 모조리 천(泉), 전(荃) 혹은 권(權)으로 바꾸게 했다. 위정(韋正, 위창휘의 이름)의 '정(正)자는 모조리 정(政)으로 바꾸게 했다. 아마도 '황정권'의 본명은 '왕전정(王全正)'일 수도 있다.
홍선교는 제1차사료에서 정말 찾아볼 수 없는가?
사실 찾아볼 수 있다.
<<이수성자술>>에 소조귀에 대하여 얘기할 때, '천황의 여동생이 그에게 시집가서 처가 되었다'라는 문구가 있다. 비록 홍선교라는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분명하지 않게 쓴 기록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은 홍선교가 홍수전의 친여동생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일찌기 천경(남경)에 거주한 바 있는 장여남은 <<금릉성난기략>>에서, 소조귀를 '제서(帝婿)'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처가 천부의 여섯째 딸이라는 것이다. 비록 성도 이름도 적어놓지 않았지만, 사실을 이수성보다는 분명하게 적었다.
홍수전의 당제(堂弟)인 홍인간(洪仁玕)이 1853년에 홍콩에 있을 때, 스웨덴 사람인 한산문에게 태평군에 대한 적지 않은 이야기를 구술한 바 있다. 거기에 '남자는 풍운산을 배우고, 여자는 양운교(楊雲嬌)를 배운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양운교'는 바로 소조귀의 처라는 것이다. 바로 홍선교이다.
1932년, 소일산 선생은 영국 런던에서 태평천국에서 1857년에 발간한 <<천부시(天父詩)>>를 발견한다. 그 안에 들어있는 한 수의 시는 <<천부하범교도선교고(天父下凡敎導先嬌姑)>>이다. 여기의 '선교고'는 분명히 홍선교일 것이다.
최근 들어 국외에서 발견된 <<천형성지(天兄聖旨)>>에도 여러번 소조귀가 천형하범하여 교훈을 내리고, '서왕낭'을 억압하는 내용 및 '서왕낭'의 육신의 부친인 황정권을 억압하는 내용이 있다. 이 서왕낭은 자연히 홍선교이다. 왜냐하면 '천부의 딸'만이 '육신의 부친'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즉, 인간세상의 부친, 하늘의 부친은 상제이다)
이상을 보면 홍선교가 믿을만한 사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기록에는 '홍선교'라는 이름이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왜 '양운교'라는 말이 나왔을까? 어떤 전문가에 따르면, 풍운산의 이름을 피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운교(雲嬌)'라고 불러야 하는데, '선교'로 이름을 바꾼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믿을 바가 못된다. 왜냐하면 홍인간의 구술은 홍콩에 있을 때이므로 이미 필요가 없을 뿐아니라, 그는 아예 태평천국의 피휘를 몰랐고, '운교'라는 것은 한산문이 영문으로 주석해놓은 것이므로 아마도 와전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先嬌)'에 대하여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홍선교는 원래 홍선교(洪先嬌)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와전되어 선교(宣嬌)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책을 인쇄하는 자의 오타라는 것이다.(태평천국의 책이나 문건에는 오탈자가 많다). 셋째는 홍선교가 이때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서 "선교고(先嬌姑)"라고 하여 죽은 자에 대한 존중을 표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홍선교는 도대체 어떤 일을 했는가?
홍선교의 사적에 대하여 한산문의 기록에 따르면, 주로 홍수전이 1847년 자형산에 도착했을 때, 10년전에 상제를 꿈에 나타나서 그녀에게, "10년후에 누군가 이곳에 와서 사람들에게 상제를 모시게 하면, 너는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고, 홍수전도 스스로 그해에 꿈을 꾸어서 상제의 둘째아들 신분 및 사자의 신분으로 '세상사람들을 구원한 바 있다'고 하였다. 두 사람이 꿈속에서 본건이 우연히 들어맞았다. 이는 홍수전의 명망을 더욱 높여주는 작용을 했다. 홍선교는 바로 홍수전의 친척이고, 양수청 소조귀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졸지에 그녀는 상제교의 핵심인물로 떠오른다. '천부의 여섯째 딸'이 되었을 뿐아니라, 여자신도들 사이에 영향력이 아주 컸다. 그리하여 홍수전은 '남자는 풍운산을 배우고, 여자는 양운교를 배워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따라야할 모범이 된다.
그런데,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홍선교는 금방 '너무 잘난체 하고' '말을 함부로 한다'는 죄명으로 양수청, 소조귀에 의하여 처리된다. 양수청은 천부하범으로 소조귀에게 수권하여 홍선교에게 60대의 곤장을 치도록 한다. 소조귀도 천형하범을 빌어, '여자는 양선교를 배워라'는 문구를 '여자는 호구매(胡九妹)를 배워라'고 바꾼다. 이때부터 홍선교는 거의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즉, 그후에 그녀가 전쟁터에서 여장군이 되었다든지, 각 왕부에서 비구름을 내렸다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허구의 각색이다. 태평군에 진정한 여병은 없었다. 홍선교라는 싸울 줄이나 아는지도 모르는 가정주부가 어찌 수백명의 여병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갈 수 있었겠는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양수청과 소조귀는 자신의 의여동생, 부인에게 이렇게 심하게 대하였을까?
아마도, 홍선교의 친가가 사곡왕씨라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양수청, 소조귀는 홍수전의 사촌에게서 권한을 빼앗아오려고 사곡왕씨에 탄압을 가했고, 홍선교도 그 화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홍선교가 '꿈에 상제를 보았다'는 것에 재미를 붙여서, 나중에 여러번 같은 짓을 벌이다가 같은 방식으로 먹고사는 양수청, 소조귀에게 제지를 당한 것일 수도 있다.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모두 금전의거의 전날, 양수청, 소조귀는 다른 천부의 말을 전한다는 가짜 요마들과 치열하게 투쟁을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홍선교가 이런 짓을 했음에도 곤장 60대만 쳤다면 그것은 많이 봐준 것이 될 것이다.
아마도, 홍선교가 여자들이 자주 범하는 잘못 즉 질투를 했을 수도 있다. 소조귀는 당시에 이미 적지 않은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사료를 보면 소조귀, 양수청은 홍수전을 도와주기도 하고, 위창휘의 첩을 다스리는 어록도 냈다. 홍선교는 아마도 성질을 냈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외부에 말하기 힘드니 그저 '말을 함부로 한다'고 하였을 것이다.
홍선교의 애인
100여년동안 사람들은 홍선교를 위하여 애인을 많이 찾아주었다. 양수청, 석달개, 임봉상....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
사료를 보면, 소조귀는 봉건부권사상이 아주 농후했던 농민이다. 그가 살아있을 때, 홍선교가 바람을 피우려고 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소조귀가 죽은 후에 홍수전은 '남자는 남행, 여자는 여행'으로 보냈다. 남녀를 격리시킨 것이다. 여기에 홍수전은 소조귀보다도 더욱 봉건적이다. 홍선교는 아마도 남자를 만나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무슨 애인을 두겠는가?
홍선교의 최후
홍선교의 최후에 대하여, 전설은 아주 많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뇌한영과 함께 태평천국이 멸망한 후 홍콩에서 편안히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천경이 함락될 때 영웅적으로 희생되거나 자살했다고 한다. 이것들은 모두 허무맹랑한 말이다. 뇌한영은 1853년말에 이미 죽었다. 자연히 1846년에 홍선교와 홍콩으로 갈 수가 없다. 유천왕 홍천귀복이 포위망을 뚫고 호주로 도망치면서, 일부 여자친척들을 데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홍선교의 아들인 소유화(蕭有和)는 홍천귀복을 따라 호주로 갔다. 며칠 후에 호주에서 병사한다. 그러나 그는 모친의 행방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만일 홍선교가 1864년 천경함락시까지 살았더라면, 그녀는 분명히 성안에서 죽었을 것이다. 혹은 전리품으로 입성한 상군들에게 붙잡혀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857녀에 태평천국에서 공식적으로 내놓은 글에 '선교고'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 이전에 저세상으로 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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