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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하(夏)왕조의 역사와 고고학의 곤경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민간문화망 

 

이리두(二里頭)등 "선상(先商)"유적지의 출토로 <사기>에 기록된 중국최초의 왕조 - 하왕조에 대한 논쟁이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비록 이 논쟁은 이미 반세기동안 지속되었지만, 논쟁의 수준을 놓고 보면, 그다지 제고되지도 않았다. 일부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긍정설과 부정설은 그저 각자 자신의 말만 하고 있다. 사상교류는 전혀 없다.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실로 비애이다.

 

필자는 "이리두 = 하"라는 이론의 지지자였다. 최근 들어 필자는 업무상 원인으로 산서남부와 하남북부를 여러번 갔다. 업무를 본 나머지 시간에 몇몇 박물관과 연구기관을 다녔고, 다행히 현지의 연구인원들과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해 볼 수 있어싿. 그 결과는 나의 원래 생각을 깊이 흔들었다. 이것은 그들이 무슨 놀라운 새로운 발견을 했기 때문이나, 무슨 핵심증거를 획득했기 때문이 아니고, 방법문제였다.

 

이번 논쟁의 근원은 증거가 아니라, 방법이다. 사고방식이다. 하왕조의 유무에 대한 논쟁의 긍정설과 부정설은 모두 이로 인하여 책임질 필요는 없다.

 

절대다수의 중국인(얼마전의 필자 포함)은 하왕조문제와 백년전 상왕조의 문제를 간단하게 동일시한다. 갑골문이 아직 학술계에서 '발견'되기 전에, 국제적으로 상왕조의 존재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결과로 우리는 갑골문을 발견하고, 은허를 발굴했다. 상왕조의 존재는 이미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로 되었다. 하왕조의 증명도 이러해야할 것이다: 문물발견 - 도시유적지발견 - 문자해독 - 고서의 기재를 사실로 증명. 하왕조의 증명과정디 이것과 다를 게 뭐 있겠는가?

 

절대다수의 중국인(얼마전의 필자 포함)은 모두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다를 게 없다.

절대다수의 중국인(얼마전의 필자 포함)은 아마도 틀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왕조와 상왕조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왕조와 상왕조간의 구별은 상왕조와 주왕조간의 구별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 학계의 하왕조에 대한 의문은 그들의 선배들의 상왕조에 대한 의문과 비슷해 보이지만, 성격은 아주 많이 다르다.

 

하왕조에 대한 의문의 가장 유력한 증거(비록 언급하는 경우가 아주 적지만)는 은허 갑골문 자체에 있다.

은허갑골문은 아예 하왕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갑골문은 이미 1천여자를 해독했다. 그중에 어느 하나의 글자도 '하(夏)'로 확정되지 않았다. 어떤 학자는 아직 해독하지 못한 어떤 글자가 "하"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널리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현재 이미 확정된 갑골문으로 말하자면, "하"자가 없을 뿐아니라, "동(冬)"자도 없다. 그저 "춘(春)"과 "추(秋)"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선진중국편년사서를 왜 <춘추>라고 부르는지, 갑골문에는 왜 "하"와 "동" 두 글자가 없는지, 상나라사람들이 "춘"과 "추" 두개의 계절만 두고 각 계절이 6개월로 하였으며, 두 계절이 바로 1년이라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상왕조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과 동시대의 같은 위도의 수메르인들도 그러했다. 이 위도구간내에 기온이 덥거나 춥다. 1년에 두 계절이면 충분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과도기는 아주 잛다. 1개월대문에 별도로 계절을 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상왕조에도 4계절이 있는데, 다만 '춘''하''추''동'으로 표시하지 않았고, 다른 글자로 표시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이에 대하여 상세히 다루지는 않기로 한다.

<사기>등 고적의 기록을 보면, 상왕조의 개국군주는 탕(湯)이다. 탕무왕(湯武王)이라고도 한다. 갑골문 혹은 기타 고적에서 "태을(太乙), 천을(天乙), 함(咸), 당(唐), 성탕(成湯), 성당(成唐), 열조(列祖)"등등으로 불린다.

갑골문에서, 탕무왕은 상왕조의 개국지군이 아예 아니다. 기껏해야 상왕조를 크게 발전시킨 중흥지군(中興之君)이다. 청나라의 건륭제에 유사한 인물이다.

 

탕무왕이 설마 포악한 하걸(夏桀)을 멸망시키고, 각지 제후의 추대를 받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아주 유감스럽게도, 갑골문의 복사(卜辭)에는 탕무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문구가 적지 않은데, 일찌기 '걸(桀)"을 타도했다거나, "하(夏)"를 멸망시켰다는 내용이 없다. 갑골문에는 "하"라는 글자가 없을 뿐아니라, "걸"이라는 글자도 없다. 심지어 의심할만한 대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갑골문의 기록에 따라 중국역사를 정리하자면, 오제(五帝)시기이후에 중국에는 하나의 왕조만 존재한다. 신성하고 위대하고 천년일계(千年一係)의 상(商)왕조.

이 왕조는 오제의 하나인 제곡(帝嚳, 帝俊)부터 시작하여 1300년가량을 지속했다. 개략 기원전24세기에서 기원전11세기까지이다.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기원전16세기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왕조의 사람들이 곡필(曲筆)해서 자신들이 일찌기 신하국으로 모셨던 하왕조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까?

제곡부터 시작하여 탕무왕까지, 대부분의 상족우두머리는 모두 '왕(王)'이라 칭했다: 자계(子契, 玄王), 후토(后土, '후'는 '왕'보다 한등급 높은 직급이다), 왕해(王亥), 왕항(王恒), 상갑(上甲, 微), 등등이다.

반대로 일찌기 상나라에 복속했던 주나라사람들은 주문왕 말년 "삼분천하의 그 둘을 가졌을 때"부터 '왕'이라 칭했다. 이것은 이들 '왕'을 칭한 상족영수들은 그 어떤 세력에도 신하로 복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기>등 고서적에서도 상족들이 하왕조에 신하로 복속했다는 말은 적지 않았다.

상인(商人)들은 일찌기 대우(大禹)에 신복한 바 있고, 이 일은 확실히 존재했다. 갑골문에도 여러번 "우(禹)"자가 나타난다. '우'는 상왕조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다. 그러면 그의 후예는?

아마 근본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시종 상나라사람들에게 억눌려 지낸 것같다.

<사기.하본기>를 보면 알 수 있다. 5분의 4의 부분을 모두 대우에 대하여 쓴다. 나머지 5분의 1을 그의 후예에 할애한다. 400년내에 그들은 겨우 이런 일을 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더라고 날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본기>의 스토리와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계(夏啓)가 하왕조를 건립한 후, 하왕조에는 모두 3건의 큰 사건이 있었다. 유과씨멸하(有過氏滅夏), 소강중흥(少康中興) 및 하걸망국(夏桀亡國). 앞의 두 가지 사건은 합쳐서 한 건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유이씨(有易氏)가 상왕해(商王亥)를 죽이고, 왕해의 아들 상갑미(上甲微)가 하백(河伯)의 협조를 받아 유이씨를 공격하여 멸망시킨다(유이씨는 아마도 <상서>의 유호씨(有扈氏)일 것이다), 부친의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 아주 비슷하다. 심지어 시대도 기본적으로 같다(기원전19세기가량)

 

하걸망국의 과정은 여러가지 세부적인 사항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모두 상주망국(商紂亡國)의 이야기와 동일하다: 국왕이 젊었을 때는 재기가 있고, 공을 세운다. 그후에 자만하고, 주색에 빠진다. 사악한 왕후와 몇몇 간신을 총애하고, 제후갑 권하다가 잔인하게 죽는다. 제후을은 권하다가 구금된다. 그 후에 석방된다. 제후을은 인의도덕이 있어 이웃나라를 합병하고, 결국은 국왕을 토벌한다. 국왕은 한번 싸어 패배하고 도성을 지키지 못한다. 전쟁은 이렇게 끝난다. 왕조는 교체된다. 아주 세부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양자는 똑같다.

 

설마 사백년간 지속된 왕조가 이 정도의 역사이야기만 남겼단 말인가? 심지어 민간전설도 아주 적다. 그리고 백분의 구십이상은 모두 대우에 관한 것이다. 이를 보면 고대의 이야기꾼이나 청중도 하왕조에 댛여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나보다.

그외에 은허는 상왕조의 시작이 아니다. 상왕조의 말기를 대표할 뿐이다. 각종 고적을 보면 이미 기록되어 있다. 상왕조는 여러번 천도하고, 안양 은허는 그중 마지막 도성이다.

그래서, 연대가 은허보다 더욱 이른 이리두 유적지는 상왕조 전기의 어떤 도시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상왕조는 기원전16세기이전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십년동안 가장 의문을 품었던 한 가지 가능성이다. 그것이 또 다른 방국(方國)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전설에 따르면 하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유궁씨(有窮氏)부족의 도시이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갑골문의 기록에 따르면, 하왕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상왕조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저 주왕조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사기.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주왕조의 조상은 하나라의 관직을 지냈다. 나중에 하왕조가 쇠퇴하면서, 산서 서남부에서 섬서로 이주하여 독립한 것이다. 주나라사람은 하나라사람에 깊은 감정이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우(夏禹)는 있는데, 하조(夏朝)는 없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일 소강, 하걸등 하왕조의 군주는 모두 후세인들이 나조하였다면,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적에서 하왕조는 멸망했지만, 그 핵심부락은 쇠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분 사람들은 하걸을 다라 명조(鳴條)에 유배되고, 또 다른 일부분의 사람들은 왕자 훈죽(獯粥)을 따라 북상하여 그 후손이 흉노이다. 상왕조는 무공이 혁혁하여 대외확장을 계소했다. 이 두 갈래의 하인의 후예들과 연략을 끊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그후 날로 강대해지는 흉노족과는 그럴 것이다. 많은 증거를 보면, 하왕조는 기실 기원전16세기에 멸망하지 않았고, 그저 진지를 옮겼을 뿐이다. 적지 않은 고고학자들은 의문을 품는다. 하왕조의 후예는 상왕조의 호적수인 "토방(土方)"일 것이라고. 즉, <시경>에서 말하는 하우(夏禹)가 개창했다는 하토방(下土方)이다. 무정(武丁)시기가 되어 토방의 황하유역에 대한 위협이 기본적으로 제거된다.

 

진정한 학자는 아주 엄격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필자와 교류한 몇몇 노선생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엄격한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ㄱ래서 비록 많은 재미있는 관점이 있지만, 그것들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실제로, 도사(陶寺), 이리두등지의 도부(陶符)를 '문자'로 보지 않는 주요반대의견은 국외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제기되었다. 아마도 다시 몇십년이 지나면, 다음대 중국역사와 고고대가들은 비교적 더 대담하게 고증할 수 있지 않을까?

가설은 대담하게, 증명은 조심스럽게. 이것은 널리 인정되는 학풍이다. 필자는 조심스럽게 증거를 찾을 재주는 없다. 그저, 이 작은 글이 말미에 대담한 가설을 내놓고자 한다:

 

대우가 죽은 후, 그의 사업은 신속히 와해된다. 각 방국은 비록 문화와 경제에서 여전히 상당히 가까워졌지만, 정치적으로는 각자 나름대로 하였고, 상인들이 날로 강대해진다. 상왕 상갑미는 유이씨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후, 이미 황하유역의 최대패주로 등장한다. 탕무왕은 더더욱 단기간내에 대량의 방국을 합병한다. 상왕조를 전성기로 이끈다. 다만, 하인들은 정복되지 않았다. 일부는 서쪽으로 이주하여 섬서로 가고, 또 다른 일부는 산서, 하북 및 내몽고로 북상한다. 이리하여 상조의 호적수인 "토방"이 된다. 상왕조와는 남북조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왕조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하왕조는 존재하지 않는다(그들은 단지 대우의 우두머리지위만 인정한다. 하나의 군주가 하나의 왕조가 될 수는 없다). 상왕조가 하왕조를 반란행위로 보고 있을 때, 토방도 상왕조를 마찬가지로 취급했을 것이다. 무정이 토방에 승리한 후, 주나라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상왕조의 통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여전히 시시때때로 반발하고 마지막에는 각 반상세력을 연합하여 상왕조를 멸망시킨다. 이 의미에서 보자면, 13세기나 지속된 은상천하는 아마도 시종 인정하거나 얘기하기 꺼렸던 '하왕조'의 그늘 속에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하왕조는 있었다. 설사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학술문제가 아니다. 주로 정치입장문제이다. 사람은 어쨌든 천성적인 정치적 동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