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춘추>: 공자는 진문공의 추행을 어떻게 덮어주었는가?

중은우시 2012. 5. 28. 15:10

글: 오한운(吳閑雲)

 

기원전636년, 봄.

진(晋)나라의 공자인 중이(重耳)는 진(秦)나라의 강력한 병력에 의지하여, 그의 조국으로 되돌아가고, 당시의 진나라 군주인 진회공(晋懷公)을 죽여버린다. 그는 바로 중이의 친조카이다. 그의 손에서 권력의 보좌를 탈취한 것이다.

이 피비린내나고 잔혹한 역사에 대하여 사서는 아주 모호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좌전>의 시간순서에 따라 이 과정을 가능한한 복원해보도록 하자:

 

중이가 진(秦)나라의 대병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서 진(晋)나라를 공격할 때, 진회공은 본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저항하였다.

이월 갑오일: 진나라의 군대는 이미 "여류(廬柳)"라는 곳까지 나아간다(晋師軍於廬柳). 여유는 진나라의 경내이고, 이곳은 당시 진나라군대와 교전하던 전선이었다.

진목공(秦穆公)은 공자집(公子)을 사신으로 보낸다. 공자집은 진나라군대의 군영으로 가서 진나나측과 협상한다. 협상결과는 아주 유리했다. 아직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진(晋)나라가 병력을 물리기로 한 것이다. 부대를 "순성(城)"이라는 곳까지 후퇴시키기로 한 것이다(師退, 軍於).

진나라군대가 퇴각하였다는 것은 진나라의 군대는 비교적 공자 중이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진회공은 이때  어느 정도 "중반친리(衆叛親離)"를 느꼈을 것이다.

이날은 갑오일이다. 팔일째 되는 날, 즉 신축일에, 호언(狐偃)은 공자 중이의 대표로 진(晋)나라군대의 군영으로 간다. 진(秦)나라의 대부, 진(晋)나라의 대부는 함께 앉아서 3자간 회담을 진행한다. 여기서 합의를 이룬다(狐偃及秦晋之大夫盟於).

호언이 그들과 협상하고 교섭한 시간은 기껏해야 4시간을 넘어서지 않았다. 금방 합의를 이룬 셈이다. 이것은 결국 진(晋)나라측에서 중이가 귀국하여 군주가 되는 것을 아주 바라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다음 날, 즉 임인일, 중이는 친히 진(晋)나라군대로 간다. 그리고 진(晋)나라의 대부와 장군들과 친근하게 면담하고 얘기한다.(公子入於晋師).

군신들의 만세소리는 산을 뒤흔들었다: "폐하, 당신은 십구년전에 일찌감치 우리의 군주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다시 삼일이 지난 후, 병오일, 공자중이는 진(秦), 진(晋) 두 나라군대의 옹호하에, "곡옥(曲沃)"에 도착한다(丙午入於曲沃).

곡옥성은 공자중이가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인 진무공이 사업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그들 가족은 바로 이 곳에서 진(晋)나라의 대권을 탈취하였다. 나중에 그의 형제인 태자 신생(申生)도 이 곳으로 분배된다.

다음 날, 정미일, 공자 중이는 할아버지인 진무공의 사당으로 가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곧이어 바로 진무공묘에서 등극대전을 거행하고, 정식으로 진나라 군주에 즉위한다. 그가 바로 진문공(晋文公)이다(丁未, 朝於武宮)

그는 외국을 19년간이나 유랑했고, 천하의 험산대천을 모두 다녀보았으며 인생의 온갖 고난을 다 겪었다. 마침내 자신의 진나라로 돌아온 것이다. 어려서 집을 떠나 나이들어서 돌아오니, 사투리는 바뀌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은 하얗게 바뀌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미 62세의 노인이 되었다.

진문공의 "문"은 좋은 글자이고, 여러가지 뜻이 있다: 경천위지(經天緯地), 도덕박문(道德博聞), 근학다견(勤學多見), 충신접례(忠信接禮), 화성천하(化成天下), 경방정예(經邦定譽), 사민작위(賜民爵位), 여현동승(與賢同昇), 견강불폭(堅强不暴), 자혜애민(慈惠愛民)....

다음 날, 무신일: 진문공 중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의 조카인 진회공을 추살한다.

진회공은 아주 불쌍한 사람이다. 이전에 진(秦)나라에 인질로 있으면서 갖은 굴욕을 받는다. 지금은 국군이 된지 몇개월만에 다시 백부에게 추살당하여, 상갓집개의 신세가 되어 황급히 도주한다. 그를 보좌하는 여성(呂省), 극예(郤芮)의 두 사람은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는 투항하여 귀순하며 진문공 중이를 진나라의 군주로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진회공을 산으로 숨겨서 유격전을 대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진회공은 도망친지 하루도 되지 않아 고량(高梁)이라는 곳에서 붙잡히고, 그 자리에서 살해된다(戊申, 使殺懷公於高梁)

진회공이 죽은 후, 그는 "회"라는 시호를 받는다. "회"라는 글자는 혼란과 가련함을 표시한다. 동시에 진나라의 백성들이 그리워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갑오일에서 무신일까지, 모두 합쳐서 반달 15일정도의 기간에 쿠데타의 모든 과정이 완성된다. 이것은 아마 중국역사상 가장 기간이 짧고 행동이 빨랐던 왕위탈취극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이는 대세가 기울었고, 인심의 향방이 중이를 향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렇게 빨리, 이렇게 순조롭게 왕위찬탈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여기에 두 가지 장면은 음미할 만하다. 이것은 아마도 진문공과 같은 대인물의 명망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만한 일이다. 심지어 오점이라고 할 수도 있어서 진문공이 꺼리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첫째, 진문공은 국군이 되기 위하여 다른 나라와 결탁했다는 것이다. 외국의 세력을 이용하여, 황하를 건너서 진나라를 점령했다는 점이다.

 

둘째, 진문공은 국군이 되기 위하여, 친족의 정을 돌보지 않고, 조카를 쫓아내고서도 그냥 두지 않고 신속히 처결하여 참초제근하였다는 점이다.

 

진문공은 원래 민심을 이미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중에 춘추시대의 아주 위대한 인물이 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점을 얘기하면 그에게 별로 좋은 것이 아니고, 그의 빛나는 이미지에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공자는 비록 진문공을 "휼이부정(譎而不正, 속임수를 쓰고 올바르지 않다)"이라고 평가했지만, 그들 두 사람은 봉건예교를 보호한다는 대원칙에서는 일치했다. 구별은 바로 전자는 사상을 수단으로 함에 비하여, 후자는 행동으로 실천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는 <춘추>를 편찬할 때, 왕왕 "외존자휘(爲尊者諱, 윗사람을 위하여 감추고 덮어주다)"했다. 이들 대인물에 관련된 그다지 좋지 않은 일들은 왕왕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때가 많다. 그러나, 공자는 그래도 역사를 존중했다. 그는 아무렇게나 뜯어고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예 쓰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이들 졸렬한 사실은 숨겨지게 된 것이다. 동시에 우회적으로 역사를 존중한 것이다.

그래서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좌전>의 작자는 공자의 <춘추>에 주석을 달면서, 이렇게 공자가 왜 이 두 가지 점을 기록하지 않았는지를 해석했다.

 

1. "진백납지(秦伯納之), 불서(不書), 불고입야(不告入也)."

2. "사살회공어고량(使殺懷公於高梁), 불서(不書), 역불고야(亦不告也)."

 

무슨 뜻인가?

 

1. 진문공이 외국인과 결탁하여 군군이 된 것은 바로 진목공의 세력을 빌려서 쳐들어가서 얻어낸 것이다. 왜 이 점을 쓰지 않았을까? 그것은 당시 역사를 쓰는데 하나의 관례가 있었는데, "불고칙불서(不告則不書)"이다. 무엇이 "불고칙불서"인가? "고"는 '통고'한다는 것이고, '서'는 글로 쓴다는 것이다.

 

즉, 비록 그러한 사실이 발생했더라도, 만일 신령에게 고하지 않았으면, 조상에게 통보하지 않았으면, 천자에게 통보하지 않았으면, 다른 제후에게 통보하지 않았더라면, 즉, 정식으로 기자회견등을 통하여 발표한 사상이 아니면 굳이 써넣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진문공이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고, 진목공과 암암리에 결탁하여 음모를 꾸민 것을 왜 쓰지 않았는가? 그것은 그가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진문공은 사람을 시켜서 그의 조카를 암살했다. 왜 쓰지 않았는가? 마찬가지이다. 그가 정식으로 천하에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