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일명(佚名)
"북벌(北伐)"은 중국역사의 긴 흐름에서 아주 유행하던 단어였다. 그것은 왕왕 역대 남방정권이 중원을 회복하기 위하여 장강, 황하의 천험을 넘어, 전국을 통일하려는 거동이었다. 그러나, 실제효과는 왕왕 사람의 뜻과는 달리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역사상 중국의 북방이 정치, 군사, 결제실력에서 모두 남방보다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방이 전국을 통일할 조건과 시기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역사상 실패한 북벌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동진(東晋): 조손(祖遜)북벌
당시 동진정권은 막 건립되었다. 북방에서 도망쳐 강남으로 온 사람들은 고향을 회복하기 위하여 북벌을 진행한다. 사람들은 조손을 앞세웠다. 당시 사마예는 북벌할 뜻이 없었다. 그는 조손의 말을 들은 후, 조손을 분위장군(奮威將軍),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임명하고, 그에게 천명의 식량과 3천필의 포(布)를 주고, 무기는 주지 않는다. 그리고 조손에게 스스로 알아서 조달하라고 한다. 조손은 자신의 사병 합계 100여호를 데리고 장강을 건넌다. 강의 가운데서 노를 치면서 말한다: "조손이 만일 중원을 깨끗하게 만들고 광복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대강처럼 흘러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그래서 회음에 도착하여 주둔하고, 용광로를 만들어 무기를 제련한다. 그리고 2천여명을 모집한 후 계속하여 전진한다. 4년여의 고전을 거쳐 조손이 이끄는 북벌군은 황하이남의 많은 실지를 회복한다. 석륵이 감히 병력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오지 못한다. 태흥4년(321년), 조손이 식량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시키며, 황하의 이북으로 진공하고자 할 때, 동진조정은 대연을 보내여 도독북방육주제군군사지휘로 하여 조손의 군대를 지휘하게 하고, 조손의 군대의 후로를 막는다. 동시에 동진의 통치자내부투쟁이 매우 치열했다. 이런 상황은 내부에 열정으로 가득했던 조손의 우울증이 병으로 바뀌어, 군대내에서 병사한다. 북벌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북방영토는 후조의 석륵에게 넘어간다.
동진: 환온(桓溫)북벌
조손 북벌이 실패한 후, 동진의 권신 환온은 공을 세우고,자신의 조정내의 위신을 수립하기 위하여 북벌을 진행한다. 영화3년(347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촉(사천)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저(氐)족의 이씨가 세운 한(漢)을 멸망시켜, 명성을 크게 떨친다. 나중에 그는 세번이나 북벌을 진행한다. 제1차는 영화10년(354년), 그는 친히 보병기병 4만여명을 이끌고 저족의 부건(苻健)의 군대를 연파하며, 패상(섬서성 장안의 동쪽)에가지 이른다. 현지 주민은 '소와 술을 가지고 환온을 길에서 환영하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다. 늙은이들은 오늘날 다시 관군을 볼 줄 몰랐다'고 말하며 눌었다." 환온은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서 장안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양양으로 물러난다. 제2차북벌은 영화12년(356년), 환온은 강(羌)족 귀족 요양(姚襄)을 격패시키고 낙양을 회복한다. 환온은 진목제에게 낙양으로 환도할 것을 건의한다; 나중에 서진말년에 남으로 이주한 선비와 서인등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거의한다. 그러나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고관귀족들까지 모두 강남에서 편하게 살고 있어 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환온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중에 환온이 강남으로 돌아오고, 낙양과 그가 회복했던 토지는 연이얼 잃어버린다. 제3차북벌은 태화4년(369년)의 일이다. 환온은 보병,기병 5만명을 이끌고 전연(前燕)군대를 대파한다. 방두(하남성 준현)에 까지 이른다. 그러나, 전연은 전진(前秦)의 지원으로 진(晋)나라군대의 군량미조달길을 끊는다. 환온은 할 수 없이 퇴각한다. 퇴각하는 도중에, 동진군은 전연의 명장 모용수(慕容垂)의 기병의 추격을 받아 3만명의 사상자를 낸다. 결국 북벌은 실패로 끝난다.
동진: 유유(劉裕)북벌
동진말기, 북부(北府)장령 유유는 조정을 장악한다. 산동지구를 점거한 선비족 모용씨의 남연정권은 이때 동진이 쇠락하는 틈을 타서, 여러번 동진의 변방을 침범한다. 의희5년(409년) 이월, 모용초는 회북을 대거 약탈한다. 유유는 병력을 일으켜 북벌을 한다. 사월, 수군을 이끌고 건강에서 북상한다. 회하를 따라, 대현(지금의 산동성 기수의 북쪽 목릉관)를 넘어, 다음 해, 남연의 도성이 광고(지금의 산동성 익도 서북)를 공격하여 함락시켜, 청주, 연주의 두 개 주를 수복하고, 모용초를 추격하여 붙잡아 건강에서 참수한다. 9년(413년), 서쪽으로 초종을 공격하여 파촉을 회복한다. 12년(416년), 후진의 군주 요흥이 병사한다. 아들 요홍이 즉위하고, 형제간에 서로 죽여 관중이 혼란에 빠진다. 유유는 기회를 틈타 대군을 4로로 나누어 후진을 북벌하고, 관락(關洛)으로 진공한다. 황하를 따라, 북위군을 격파한다. 다음 해, 낙양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고, 동관에 이른다. 대장 왕진악에게 장안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한다. 요홍은 투항하고 후진이 멸망한다. 동진군은 장안을 수복한다. 소수민족통치하에 백년간 압박받던 한족은 속속이에 호응한다. 이때 조정에 남아있던 상서 좌복야 유목지가 병사한다. 유유는 정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까 우려하여, 차남 유의진을 장안에 남기고, 왕수, 왕진악등 병력 만며영이 보좌하게 하면서, 자신은 황급히 건강으로 돌아간다. 장안유수군은 내분이 일어, 하주 혁련발발이 기회를 틈타 관중을 탈취한다. 유의진은 비록 장안에서 철수했지만, 동관의 동쪽 황하의 이남에서 청주는 이미 남조의 판도에 들어왔다. 강회유역이 보장받게 된 것이다. 이는 조손, 환온이 100년간 경영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이다. 유유는 조정의 명망이 최고조에 이르러 결국 선양을 받는다.
유송(劉宋): 송문제(宋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원가북벌(元嘉北伐)
유송은 원가7년(430년)과 원가27년(450년) 두번 대거 북벌을 진행한다. 매번 북벌은 모두 송나라군대가 여름 우기를 틈타 북진한다. 그리고 신속히 황하일선의 중요도시를 점령한다. 그 후 강을 따라 수비를 한다. 원가7년에는 하남을 점렴한 후 하남사진을 설치한다: 낙양, 호뢰, 활대, 확오. 다만, 천고마비의 시절이 되면 북위의 철기가 남하하고, 강을 따라 설치된 방어선은 금방 붕괴된다. 그래서 두번의 북벌은 모두 실패로 끝난다. 송문제의 연호가 원가이므로, 이 대규모의 북벌은 원가북벌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척발도(拓拔燾)의 병력이 장강북안의 과보산에 이르므로, 과보지전이라고도 부른다. 후세의 대사인 신기질은 일찌기 <영우락. 경구북고정회고>라는 사를 지었는데, 그 안에 "원가초초(元嘉草草), 봉랑거서(封狼居胥), 영득창황북고(赢得倉皇北顧)"라는 구절이 있는데 거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천고의 교훈이다.
남조(南朝) 양(梁): 진경지(陳慶之)북벌
남조 양무제 소연은 이위도위(以魏圖魏)하고자 했다. 그래서 양무제 대통원년(529년) 장군 진경지로 하여금 7천의 백포기병을 데리고 북위 북해왕 원호를 옹립하여 북상한다. 진경지는 군대를 이끌고 영성(지금의 상구 동쪽), 양국(상구), 대량(개봉),영양, 호뢰를 연이어 함락시키고, 낙양으로 들어간다. 위나라의 군주 원자유(元子攸)는 북으로 도망가고, 원호는 낙양에서 등극한다. 당시 북위의 권력자는 이주영(爾朱榮)이다. 이주영은 진양에 자리압고 멀리 낙양조정을 견제해다. 이주영은 낙양에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남하한다. 행군하면서 각 부대를 신속히 남하시겨 집결시킨다. 그후에 위나라군주를 모시고 낙양으로 진격한다. 진경지는 하양하교를 지키며, 이주영의 군대를 막는다. 이주영은 나무를 엮어서 배를 만들어 황하를 건넌다. 원호 및 진경지의 군대는 궤멸된다. 원호는 피살되고, 진경지는 남조로 도망친다. 위군주는 다시 낙양으로 돌아온다. 진경지가 낙양으로 들어간 전투는 유송이후 남방의 북방에 깊이 들어간 첫 병력이동이엇다. 유송시기의 북벌과 마찬가지로 진격도 빨랐지만, 패퇴도 빨랐다.
남송(南宋): 송고종(宋高宗)때의 악비(岳飛)북벌.
악비는 남송 소흥4년(1134년) 반장(叛將) 이성(李成)을 격파하고, 양양을 수복한다. 그리고 승기를 틈타 북빈한다. 제(齊)나라의 수중에서 등주, 당주 및 신양을 수복한다. 소흥10년(1140년), 악비는 양양에서 대거 북진한다. 연이어 영창(하남 허창), 회녕(하남 회양) 정주를 수복하고 적후방에서 금나라에 항거하는 이흥을 도와 낙양등지를 수복한다. 칠월, 악비는 언성에서 금나라의 총사령관 종필의 군대를 격파한다. 그리고 영챵에서 금나라군의 반격을 물리친다. 승기를 틈타 주선진(변경에서 사십오리)으로 진격하여 금나라군대와 대치한다. 강을 건너 실지를 수복할 준비를 한다; 악비의 승리와 진격으로 하동, 하북의 백성들이 속속 호응하고, 금나라군대를 습격하고, 그 귀로를 막는다. 금나라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고, 북방으로 물러날 준비를 한다. 바로 이 때, 진회와 송고종은 회하이북의 땅을 포기하면서 금나라와 화해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급히 악비에게 회군을 명한다. 악비는 어쩔 수 없이 퇴각한다. 수복한 여러 주는 다시 잃는다. 송고종은 악비를 죽인다. 이는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린 것과 같다. 그리고 악비북벌의 성과도 모조리 잃는다. 남송은 굴욕의 대가로 잠시의 평화를 얻는다. 이것이 바로 '소흥화의(紹興和議)'이다.
남송: 송효종(宋孝宗)의 장준(張浚)북벌.
송효종은 주화파와의 격렬한 투쟁을 거친 후, 장준을 파견하여 북벌한다. 장준은 양주에 주둔한다. 수하장령 이현충(李顯忠)과 추굉연(鄒宏淵)을 보내어 북벌한다. 송나라군대는 처음에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영벽과 숙주를 수복한다. 그러나, 금나라는 금방 하남에서 병력을 보아서 반격한다. 이현충과 추굉연의 불화로 숙주를 잃고, 곧이어 송군은 다시 부리에서 궤멸하고, 북벌이 실패한다. 주화파는 전쟁이 실패하자, 다시 주화론조가 나타난다. 그래서 주화파들이 우세를 점한다. 주전파는 타협을 하지 않고, 전쟁을 벌이려 한다. 송효종은 금나라의 화의조건을 시험해 보았는데, 너무 가혹해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때, 송나라는 북벌실패후, 이미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금나라는 다시 기회를 틈타 계속 송나라를 공격한다. 송나라는 위기에 처해있다. 마지막으로, 송효종은 금나라에 약간 양보한 화의조건을 받아들인다. 즉 완안량이 침입한 후 송나라가 수복한 당주, 등주, 해주, 사주의 4개주를 금나라에 돌려준다. 송나라는 금나라에 칭신하다가 숙질의 국가로 바뀐다. 세공(歲貢)은 세폐(歲幣)로 바꾼다. 수량은 이전보다 20만이 줄어든다. 진주, 상주의 두 개주의 토지를 금나라에 할양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의 융흥화의(隆興和議)이다.
남송 송영종때 한택주는 개희2년 북벌한다. 한택주는 북벌을 진행한다. 그 결과 금방 실패에 부닥친다. 북벌의 실패로 한택주는 만인의 적이 된다. 그의 정적인 사미원은 이를 핑계로 주화파와 한택주의 반대파를 모아서 결맹한다. 금나라사람은 다시 한택주를 죽이는 것을 화의조건의 하나로 삼는다. 개희3년 십일월 삼일, 사미원등이 양황후의 지원하에, 밀지를 위조하여, 한택주를 죽이고, 그의 수급을 금나라에 보낸다.
태평천국(太平天國): 임봉상(林鳳祥), 이개방(李開芳)북벌
태평군의 북벌. 1851년 1월 11일 홍수전(1814-1864)이 광서 금전촌에서 금전의거를 일으킨 후, 태평천국이라 한다. 의거군은 태평군이라 칭한다. 1853년 3월 19일, 태평군이 남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천경(天京)으로 고친다. 천경을 수도로 저한 후 임봉상, 이개방, 길문원등으로 하여금 2만여명을 이끌고 북벌하게 한다. 1853년 5월, 북벌군은 양주를 출발하여, 안휘, 하남을 거쳐 직예로 들어가, 천진으로 가까이 접근한다. 함풍제는 경사의 계엄을 선포한다. 1853년 8월, 북벌군이 천진을 공격하나 실패한다. 1855년 3월 임봉상은 연진에서 포위망을 돌파하다가 포로로 잡힌다. 4월 3일, 북경에서 처형된다. 이개방은 산동 천평 풍관둔으로 물러난다. 포로로 잡힌 후 북경으로 압송되어 6월 11일 능지처참당한다. 태평군의 북벌은 단독부대의 원정이고, 6개성에 걸쳐서 전투가 이루어진다. 비록 정예병사이지만, 후방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전멸하고 만다. 많은 장병들이 용감하게 분전하고, 청나라의 심장지구를 뒤흔들었고 많은 청나라병사들을 견제했으며, 남방태평군과 북방인민의 투쟁에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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