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남방주말
푸칭방(福淸幇). 이미 일본, 미국, 영국, 카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등 국가에 뿌리를 내린지 오래된 중국계 방파는 이번 공안부 및 아프리카경찰의 공동작전중에 이름이 드러났다. 앙골라에서 발생한, 중국인에 대한 여러 건의 강도살인, 납치협박사건은 이 동남아 및 북미에서 활약하는 방파를 겨냥하고 있다.
푸칭방의 흑색 '사업'은 언제부터 아프키라에서 전개하기 시작했는가? 어떻게 앙골라에 뿌리를 내렸는가? 그리고 어떻게 현지 중국인들의 피땀어린 돈을 착취해갔는가?
앙골라는 신흥국가의 특징을 보유하고 있다. 부와 GDP는 급속히 증가하고, 급속히 현대화, 도시화하고 있다. 그리고 실패국가의 특징도 보유하고 있다. 전란, 부패, 빈부차이가 거대하다. 2002년, 앙골라는 27년간 지속된 내전을 끝내고, 수천수만의 중국인들이 앙골라에 와서 부호의 꿈을 펼친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2008년 한해에만 앙카라 주중국대사관은 수만장의 노무비자를 내주었고, 어떤 것은 손으로 써주었다.
앙골라에는 24만 내지 26만의 중국인이 있다. 전체국가의 인구가 2000만이므로, 개략 100명중 1명은 중국인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앙골라에 사는 중국인들이 모여있는 포럼에서는 30만 내지 40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은 아프리카에 사는 중국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축소판이다. 10년동안, 수백만의 중국인이 아프리카로 돈을 벌기위해서 왔다. 남아공독립일보기자인 리차드 보프라크는 이미 2년간 아프리카의 중국인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이 없으면, 아프리카가 수년동안 GDP를 매년 6%씩 증가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국가>의 작가이자 영국학자인 마킨 메리디스는 중국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실력있는 역외참가자라고 말한다.
개발도상국의 전환기 관리들의 저효율, 부패는 앙골라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느슨한 치안, 한편으로 전쟁이 남긴 무기와 단기간내에 유입된 외국인인구. 이런 요소는 중국계범죄단체로 하여금 성장할 수 있는 온상을 마련해주었다.
2011년 4월, 앙골라의 한 중국회사의 재무담당자인 장리(張力)는 공사현장의 사무실에서 몇몇의 총을 든 중국인들에게 납치당했다. 안전금고안에 들어있는 7만달러의 달러는 강탈당했다. 이 돈은 막 인출한 것인데, 납치강도들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강도들은 직접적으로 장리에게 자신이 얼마의 가치가 있는 지를 물었고, 그 후에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서 돈을 요구했다. 4일후 장리는 석방된다. "그들은 아주 겁이 없었다. 핸드폰심카드도 바꾸지 않았다."
여러명의 앙골라 중국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장리와 유사한 경우가 최근 들어 상당히 많아졌다. 범인들은 일반적으로 푸칭방이라는 이름을 내건다. 왜냐하면 소문에 의할 때, 푸칭방은 일처리가 악독하고, 담량이 크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들 흑방의 내력과 활동상황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어떤 설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가장 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먼저 앙골라의 푸젠(福建) 사람들중 의류사업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2008년이후, 많은 중국인들이 앙골라로 몰려든다. 남아공에서 건너간 푸칭 사람들은 고향사람들끼리 모여서, 협박과 납치활동을 벌였다. 피해가 가장 심각한 것은 현지 중국수퍼마켓과 지하기원이었다.
현지의 명망있는 중국인 탕센(唐賢)에 따르면, 일찌기 어떤 납치범이 그의 친구를 찾아왔다고 한다. 공사프로젝트를 협상하자는 명목으로 속여서 데려갔다. 그리고 그후에 가족들이 돈을 보내주었다. 2011년 상반기부터, 앙골라정부는 탄압조치를 내린다. 범죄집단은 현지의 흑인을 이용하여 망을 보게 하거나 행동을 하게 했다.
암스테르담자유대학의 학자인 팔 니리교수는 중국이민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니리에 따르면, 유럽에서의 연구에 의하면, 1990년대말에서 2000년대초, 유럽의 중국인들은 자주 '푸칭방'을 얘기했다. 그 시기, 푸저우, 특히 푸칭의 이민이 이미 아프리카와 아르헨티나까지 뻗어갔다. "푸칭에서 온 사람들은 항상 범죄와 광야(狂野)와 관련이 있었다." 니리의 말이다.
미국의 중국방파연구학자인 로저스대학의 형사사법학원 교수 천궈린은 이렇게 말한다. 소위 푸칭방은 전통적인 의미의 중국방파와는 서로 다르다. "나는 앙골라에 푸칭방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는 아마도 푸젠에서 간 범죄집단이 쓰는 하나의 이름일 것이다." 천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이 조직은 삼합회나 비룡방과 같은 엄밀한 조직을 가지지 못했고, 그저 같은 지역에서 온 범죄집단일 뿐이다.
전통적인 중국방파의 습속에 따르면, 방회는 통상적으로 구정등 명절에 의식을 행하고, 현지 화인들의 홍포(紅包, 돈을 담은 봉투)를 받는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한다. 그러나, 앙골라의 중국인방파가 활동하는 지방에 구정에도 전통적인 방회활동이 없었다.
앙골라에서 이미 여러해동안 살고 있는 치인팡에 따르면, 초엄에 범죄는 푸젠인들의 집단이었다. 나중에는 쓰촨, 안후이, 동베이등 성에서 온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모두 푸칭방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벌인다. "왜냐하면 푸칭방이 유명하고 일을 비교적 악독하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치인팡의 말이다.
그외에 천궈린은 중국인범죄가 전세계에서 보편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천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중국인들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공갈협박과 납치는 중국인범죄집단에서 갈수록 보편적이 된다. 사건은 주로 두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돈이 있거나 명망있는 중국인을 공갈협박, 납치 혹은 절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박매춘장소를 개설하는 것이다. 현지인을 상대로 하지는 않는다.
중앙국유기업의 앙골라 파견주재원으로서, 요 몇년동안 양카이는 푸칭방에 관한 이야기를 적지않게 들었다. 납치당한 적이 있는 친구가 그와 얘기한 적이 있다. 납치범들은 뜨거운 물을 붓고, 칼로 베어서 어떤 사람은 죽기도 했다. 그러나 푸칭방이라는 이름은 도대체 하나의 방파인지 아닌지 그로서도 잘 알지 못한다.
이전의 '현지전통'에 따르면, 흑인은 자주 중국인을 공갈협박하고, 어떤 때는 납치한다. 그러나 앙골라에서 근 10년간 생활한 중국인 탕센에 따르면, 흑인은 과거에 그저 자잘한 좀도둑이거나, 빼앗고는 도망쳤다. "흑인은 수백년동안 아주 착실했다.' 치인팡의 말이다.
현재, 거의 모든 악성사건의 배후에는 모두 중국인범죄의 그림자가 있다. 흑인들은 밝은 대낮에 중국인의 회사로 가서 강탈해가고, 강도를 하러 온 흑인들은 미리 지키고 서서 기다릴 줄도 알고, 누가 사장이고 누가 돈많은 사람인지를 알고, 회사에서 돈을 언제 은행에서 찾아오는지도 안다. "중국인이 참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최근 들어 앙골라의 중국인범죄는 감기보다 유행하고 있다. 인터넷포럼, 블로그 및 현지 신문 <앙골라화인보>에서 이런 사건은 자주 볼 수 있다. 앙골라의 중국인들은 친히 겪었거나 친구가 해를 입었다. "이곳의 흑인들이 강탈하는 것은 아주 자주볼 수 있다. 우리는 회사에서 외출하면 모든 사람들이 500달러의 돈을 가지고 다닌다. 미리 준비하는 돈이다. 그 목적은 흑인이 강탈할 때, 돈을 흑인에게 주는 것이다. 흑인은 돈을 보면 우리를 풀어준다." 현지의 한 중국회사 직원인 왕쥔의 말이다.
통역인 양카이는 비교적 안전하다. 그는 중앙국유기업에 있다. 앙골라정부가 파견한 무장경호원이 보호해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3대의 차를 강탈당했다. 직장에서 양카이는 동료와 외출할 때, 절대로 다른 사람을 태우지 않는다. "흑인들을 태워주지 않는다. 더더구나 중국인은 태워주지 않는다."
왕쥔은 금년에 이미 4번이나 사람이 AK47로 머리를 겨누는 일을 당했다. 평균 2달에 1번씩이다. 6월의 어느 날 저녁, 6명의 흑인이 AK47소총을 들고 회사본부로 밀고 들어왔다. 회사외부의 철사망, 전기철조망은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강도들은 모든 사람을 제압한 후 총으로 사람을 때리면서, 입으로는 중국말인 "돈, 돈"을 얘기했다. 마지막에 강도들은 모든 전자제품, 컴퓨터, 핸드폰, 돈 그리고 일부 옷까지 모조리 가져갔다. 그리고 회사의 SUV 한대까지 끌고가 버렸다.
다음 날, 아무런 거리낌없이 강도들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총으로 왕쥔과 다른 사람을 핍박하여 어제 빼앗아갔던 모든 컴퓨터, 핸드폰의 충전기와 전원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후의 두번의 강도는 모두 길을 가다가 당한 것으로 상황은 유사했다. 돈을 많이 빼앗겼다. 왕쥔은 발견했다. 매번 강도당한 것은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러갈 때이거나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을 때이다. 그리고 강도들은 누구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해야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배후는 분명히 중국인이다. 흑인 자신들이 어떻게 그런 상황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앙골라의 중국인조직은 공동방어매커니즘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현지의 보안회사를 고용한다. 치인팡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효과적인 보호방법이 없다. 조치를 취하면 보복을 받을까봐 겁이 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반드시 국가와 연합해야 한다." 치인팡의 주장은 대다수 앙골라의 중국계상인의 바램을 대변한다. 이번 공안부에서 앙골라로 가서 범죄소탕작전을 버린 것에 대하여 앙골라의 상인들은 모두 이후 중국정부가 더 많이 개입해주기를 기대한다.
앙골라의 중국기업이 거의 모두 강탈당한 경력이 있다. 위험이 가장 큰 것은 하층의 노동자와 개인사업가이다. 그들에 있어서 강도는 생활중 악몽의 일부분이다.
"경찰과 이민국이 그들에게 돈을 빼앗아가는 것은 우리가 점심에 쌀밥을 먹는 것처럼 정상적이다. 나 개인은 거의 외출하지 않는다. 외출은 회사의 행위이고 몸에 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강도를 당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손에 쥔 돈이 적다. 그러나 자주 외출한다. 그래서 강탈당하는 것이다."왕쥔의 말이다.
앙골라에서 죽는 것도 골치아픈 일이다. 왜냐하면 화장에만 10여만위안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부서를 뛰어다녀야 하고 십여종의 포르투갈어로 된 서류를 채워넣어야 한다. 개인사업자인 자오샹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몇몇 친구들은 현지 강가에서 몰래 화장했다고.
그러나, 2011년이래, 앙골라정부와 중국정부는 타격활동을 시작한다. 양카이의 회고에 따르면, 2011년 여름, 수도 루안다에서 앙골라정부는 매일 헬리콥터를 중국인집단거주지로 보내어 순찰을 돌았다. 중국인들이 소규모로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면 다음날 가서 조사를 하곤 했다.
그런, 8월말 공안부의 행동이 끝나게 되자, 양카이는 다시 어떤 친구가 수만달러를 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중국공안부가 외국경찰과 협력하여 처음에로 아프리카에서 대규모활동을 벌였다. 앙골라의 중국국민의 합법적 권익을 침해하는 범죄단체 12개를 뿌리뽑고, 중대형사사건 48건을 해결했으며, 중국국적의 피해자 14명을 구해주었다. 중국인들이 과거 10년간 앙골라에서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돈을 벌기 위하여 사업을 해왔다는 것이 이렇게 드러났다.
앙골라의 특수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 전에, 황제(黃潔)은 한때 절망적으로 '다시 납치강도를 만났구나"라고 생각했다.
현지시간으로 2012년 8월 1일 5시, 앙골라 벤피카지구의 쑤항호텔. 저장 상인 황제는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일찌감치 눈을 떴다. 앙골라의 건기에 첫번째 비는 저녁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방에는 그녀를 따라 일하러온 사촌여동싱부부가 있었다. 이 날을 그들이 앙골라에 온 넷째 날이었다.
돌연, 주점에서 총성이 밀집해서 들렸고,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방문을 차서 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정상가격100달러짜리 룸안에서 황제는 창가로 가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희미한 하늘빛만 보였다. 신발이 카페트위를 걷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3명은 거의 절망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황제는 경찰복을 입고 총을 든 복면흑인경찰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다. 그후 들어온 중국인의 얼굴을 보니 친근했다. 그들은 수행관찰원인 중국경찰이었다. 그후 복면의 경찰이 그녀의 여권, 핸드폰, 카메라를 가져가고, 황제와 사촌여동생부부를 데리고 호텔을 떠난다.
황제는 나중에야 알았다. 이것은 중국공안부업무팀을 앙골라에 보내어 해결한 "5.11" 체포행동이었다는 것을 일찌기 2012년 5월 11일, 공안부 형사수사국의 유괴판공실 주임 천스취가 책임자인 선발팀은 명을 받아 앙골라로 간다. 피해자와 관련자들을 방문조사하여, 앙골라에서 중국공민의 궈익을 침해하는 범죄사건에 대하여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한다.
"임무는 범죄단체의 조직구조, 구성원명단을 알아내고 관련증거를 수집하는 것이다" 천스취는 일찌기 산발팀의 회의에서 말했다. 중국경찰아 앙골라에서 알아낸 상황은 놀랄 정도였다: 중국공민의 권익을 침해한 사건이 57건에 이르렀고, 납치협박, 살인, 무장강도, 유괴등의 범죄가 있었다. 현지 중국인들을 해친 것은 대부분 중국인범죄조직이었다. "장쑤방 황쩐싱(黃振興), 푸칭방 천밍쥔(陳明俊)등 여러개의 범죄조직이었다."
앙골라의 경제건설은 2002년 내전이 끝나면서 시작된다. 중국의 현지와의 경제협력은 갈수록 긴밀해졌다. 현재, 중국은 앙골라의 최대투자국이다. 앙골라도 중국최대의 수출공급국이다. 수입총량의 15%를 차지한다. 앙골라의 내정부 자료를 보면, 현재 앙골라의 중국인 총수는 약 26만명이다. 그리고 앙골라 경제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돈을 벌기위해서 온 사람"으로서, 앙골라의 특수한 기회는 그들에게 신속하게 부를 축적할 수있게 해주었다. 이 신흥국가의 두드러진 집단이 된다. 그러나, 현재에서 중국인에게 준 것은 '부의 댓가'만이 아니었다. 섬뜩한 폭력도 있었다. 2011년에 중국인에 대하여 발생한 납치사건이 14건이고, 각중 심각한 폭력범죄로 모두 8명의 중국인이 중상을 입고 5명이 사망했다. 2012년 1분기에 발생한 총기강도사건이 9건이고, 납치사건이 3건이다.
앙골라의 형사수사국의 책임자인 사이카이라도 인정한다: "중국인은 아마도 범죄사건의 피해자일 것이다. 예를 들어 제품을 가진 상인들" 그는 각 국가의 사람들이 모두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앙골라는 총기가 많고, 사회치안이 혼란스럽다. 안전보장이 없는 중국인은 범죄분자의 좋은 '먹잇감'이다. 이런 토양하에서, 중국계 범죄조직세력이 성장했고, 원래 느슨한 '상인'무리에 삼투해들어간다. 동시에 중국인의 습성을 잘 알고 있으므로, 범죄행위로 폭리를 취한다. 외우내환, 수도 루안다는 상당한 중국인들에게 악몽의 도시가 되었다.
앙골라의 중국인에 대한 폭력은 중국국내의 관심을 끌었다. 2012년 4월 25일, 국무위원, 공안부장 멍젠주는 앙골라 내정부장 마틴스와 공동으로 <공공안전과 사회질서를 유지보호하는데 관한 합작협의>를 체결한다. "5.11"특별팀은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탄생한 것이다. 7월 19일, 공안부 형사조사국 국장조리 우중페이와 유괴판공실주임 천스취는 22명의 선발팀을 데리고 앙골라로 간다. 거기서 앙카라 중국공민의 권익을 침해하는 범죄행동을 타격하는 임무를 집행한다. 7월 30일, 공안부 형사수사국장 류안청은 명을 받아 인원을 데리고 앙골라로 간다. 친히 이번 타격행동을 지휘한다. 8월 1일, 새벽 중국-앙골라 양국경찰이 공동행동을 진행한 것은 일련의 수사과정의 '마무리단계'였다. 앙골라측에서는 총통경비대의 400여명 특수경찰이 행동에 참가한다. 목적지는 루안다시내의 13개 중국경찰이 점찍어둔 '범죄협의자소재지와 범죄거점'이었다.
황제 일행 3명도 한 건물로 데려간다. 그곳에는 이미 십여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경찰측은 이후 모든 사람의 신분정보를 확인한다. 관련없는 인원은 석방했다. 사후에 발표된 소식에 따르면, 이 행동으로 앙카라의 중국국민에게 납치, 강도, 공강협박, 부녀자유괴매춘강요등 범죄집단 12개를 소탕한다. 각종 중대형사사건 48건을 해결했고, 중국적 피해자 14명을 구해주었다.
"나는 앙골라에 남편과 외숙부의 시신을 수습하러 홨다. 그들 둘은 십여일전에 이곳에서 피살당했다." 황제는 현장이 중국공작조원에게 말했다. 앙골라 중국상회에 연락하여 신분을 확인한 후, 황제와 사촌여동생부부는 건물을 떠난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여권, 핸드폰, 카메라를 돌려받았다.
앙골라의 가장 최근 폭력범죄로 사망한 중국인으로서 황제의 남편 다이원성은 2012년 7월 18일에 피살된다.
"밥먹으러 나가겠다.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자" 그날 저녁 42세의 건재점사장인 다이원성은 처에게 QQ에 이런 말을 남겨놓고 마지막 저녁을 하러 떠났다. 처는 만리 떨어진 저장성 하이닝시의 집에서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처에게 빠른 시간내에 컴퓨터 앞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그의 외숙부인 마장롱은 또 다른 디지탈제품점포에서 다른 사람과 마작을 하고 있었다.
다이원성은 앙골라에 와서 장사를 시작한지 이미 4년이 되었다. 처음에 그의 형과 형수의 건재회사에서 판매를 하다가, 3년후 독립했다.
"당시 우리는 105만위안을 빌려서 200만위안의 사업자금을 모아서 시작했다." 2011년 11월, 다이원성은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에서 50여리 떨어진 Viana시에 건재점을 연다. 안착한 후, 그는 다시 국내에서 자신의 외숙부 마장롱을 불러서 가게를 보게 하고, 자신은 고객을 만나러 다니는데 정력을 집중한다. 그외에 점포에는 현지흑인을 고용해서 일을 시키고 있었다.
안전을 위하여, 조심스러웟던 그는 두 명의 무장보안을 고용해서, 점포를 지키게 했다. 이 조치는 다이원성의 앙골라에서의 생활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전에 그의 형의 점포는 일찌기 강도집단의 강도를 당한 적이 있는데, 화물속에 숨어있어서 발견되지 않았었다. 비록 다이원성도 현지의 치안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나이가 마흔을 넘긴 그는 '부귀는 위험 속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믿었다. 앙골라에서 목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요행은 없었다. 위험은 신속히 그에게 다가왔다. 강도는 금방 그가 건설중인 점포에 나타난다. 2012년 1월의 어느 날, 총을 든 강도들은 자동차를 타고 그의 부지대문을 뚫고 들어온다. 그리고 신속히 그의 앞에 나타났다. 강도들은 부지내의 디지탈점포를 모조리 쓸어가고는 다이원성을 전깃줄로 묶고서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들은 집게로 살을 집기도 하고, 라이터로 살을 태우기도 했다." 황제의 말이다. 위험을 벗어난 후, 다이원성은 처에게 자신이 붙잡혔던 경위를 얘기한다.
점포를 짓는 중이어서, 돈을 내면 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강도들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여러가지로 고문을 가한 후에 다이원성은 의식이 모호해진다.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하다. 돈이 무슨 소용이냐" 이날 30여만의 현금을 강탈당한다. 같은 건물내의 디지탈제품점포는 60여만위안의 현금과 물건을 손해본다.
30만을 빼앗겼지만, 목숨을 건졌다. 다이원성은 컨테이너를 사서 침실로 삼았다. 안에는 강판으로 두텁게 만들었다. 유일한 작은 문도 강철문걸쇄를 걸었는데 언제든지 용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후에 다이원성은 처에게 웃으며 말했다. "포탄으로 깨부수거나, 불로 태워버리지 않는 한, 강도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외에 다이원성은 대화소프트웨어를 항상 열어두는 습관을 가졌다. 처와 얘기하면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남편이 걱정되어 고향의 황제도 앙골라의 시간을 사용했다. 남편이 앙골라에서 깨어있는 시간에는 언제든지 그녀를 찾아서 얘기할 수 있도록. "우리는 매일 새벽 5,6시가 되어야 잠이 들었다."
2012년 7월 18일저녁, 장시간 기다렸지만 다이원성은 인터넷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황제는 불안해진다. 새벽 1시 37분이 되어서, 남편의 QQ가 돌연 검게 변한다. 황제는 바로 남편의 전화로 전화를 건다. 그러나 연결되지 않았다. 다시 같은 건물의 디지탈점포 사장에게 전화를 건다. 그래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후 그녀는 앙골라의 고향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린다. 누군가 그녀에게 사고가 났다고 말해준다.
황제가 나중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이원성은 식사후의 빈 시가에, 강도들은 Viana고속도로 입체교차로에서 200미터 떨어진 이 건재상을 노렸다. 짧은 소매의 옷을 입은 다이원성은 칼에 몇 차례 찔렸고, 외숙부 마장롱은 머리를 철추로 맞았다. 병원으로 후송하는 도중에 사망한다.
유사하게 잔인한 사건은 이전에도 있었다. 2011년 8월 24일, 앙골라 하이산국제 제6프로젝트부 구매부서의 시칭은 루안다의 벤피카에서 자재를 구매하고 기지로 돌아오는 도중에 강도들에게 살해당한다. 시신은 휘발류를 뿌려서 불태워버렸다. 2011년 10월 23일 10시경, 벤피카지구의 내력이 불분명한 범죄인은 AK47소총으로 픽업트럭의 유리창을 깨고, 저장 진화 푸장사람인 러우용전에게 두 발을 쏜다. 러우용전은 소형 건재공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앙골라에서 일하는 여러 명의 중국인들은 현지 범죄집단은 모두 잔인하게 중국인사회를 겁주고 있다. 강도를 당한 후에 반항하면 죽여버린다."그는 분명히 반항해서 살해당했을 것이다." 황제는 고통스럽게 말한다. 강도는 점포내의 모든 돈을 가져가 바렸다. 그리고 모욕을 주기 위하여 디아원성의 하의를 모조리 벗겨버렸다.
2010년부터, 앙골라의 중국상인들이 중국범죄분자에게 납치된 것이 이십여건이다. 그후 이 추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범죄사건이 더욱 빈발하고 있다. 2012년초, 현지의 중국어신문 <앙골라화인보>는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에서 현지 중국인들의 공황과 미망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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