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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청)

강청(江靑)은 어디에 묻혔는가?

by 중은우시 2009. 12. 31.

글: 호가항(胡佳恒)

 

 

 

 

북경의 서쪽에 있는 복전공묘(福田公墓)의 남쪽 귀퉁이에, 제대(祭臺)앞에는 청백석의 비석이 있고, 생화로 둘러쌓여 있다. 비문은 간결하다. "1914년 - 1991년, 선모이운학지묘(先母李雲鶴之墓), 여아여서외손경립(女兒女婿外孫敬立). 2002년 3월." 다 타버린 합덕문(哈德門) 담배가 제대의 왼쪽에 꽂혀 있다. 제대의 오른쪽에는 호남(湖南)에서 생산된 담배가 꽂혀 있는데, 담배끝에는 "부용왕(芙蓉王)"이라는 작은 글자가 모택동서체로 시원하게 쓰여져 있다. 18자루의 짧은 향은 아직 다 타지 않았고 몇 무더리도 나뉘어 제대 위에 꽂혀있었다. 확실히 제사를 지낸 사람이 떠난지 얼마되지 않은 것같다.

 

이운학(李雲鶴)은 일찌기 강청(江靑)이 사용한 적이 있는 이름이고, 비문에 기록된 생졸년은 그녀와 일치한다. 얼마전에 대륙작가 서운(舒雲)이 이것과 강청의 비서였던 염장귀와 양은록으로부터 확인한 바를 근거로 하여, 강청은 확실히 북경 서부지역의 복전공묘에 묻혀 있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그러나, 최근 홍콩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양은록은 매체에 강청묘지에 관한 더욱 상세한 내용을 털어놓기를 거절했다. 양은록이 한 말을 보도하였는데, 이눌(李訥, 모택동과 강청의 딸)이 이 일에 대하여는 기밀유지를 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복전공묘내에는 유명인사들이 많이 묻혀 있다. 청왕조의 마지막 섭정왕인 애신각락 재풍(載), 근대 국학대가 왕국유(王國維), 5.4신문화운동의 창도자중 하나인 전현동(錢玄同), 중국장갑차부대의 대부인 허광달(許光達) 대장, 그리고 현대핵물리학자인 전삼강(錢三强)등이 모두 이 곳에 잠들어 있다.

 

복전공묘는 1930년에 건설되었다. 북쪽으로는 연산산맥을 등지고, 서쪽으로는 팔대처(八大處)를 이웃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영정하(永定河) 인수거(引水渠)를 안고 있다. 동쪽으로는 북경을 바라본다. 곁에 복전사(福田寺)라는 절이 있어서 복전공묘로 불리게 된다. 북경에서는 1992년에 복전공묘에 안장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를 문예계, 과기계, 지식계에서 고급직함을 지닌 인물로 하여 빈장관리처의 허가를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범위결정은 2년후에 자동폐지된다. 그동안 팔보산혁명공묘의 유골보관범위도 변경되면서, 현단급간부의 유골을 복전공묘로 옮겨서 보관하게 된 것이다. 현재 이곳의 간부 납골당에 보관된 유골은 400개가 넘는다.

 

명인묘역에 있는 강청의 묘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보기드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소박한 석비의 앞에는 다른 묘가 가로막고 있지 않다. 키작은 관목들 알프오 줄줄이 선 석비들이 강청의 묘 정면에는 마침 빈터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묘가 다른 묘와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이다.

 

진성감옥(秦城監獄)에 갇혀 있으면서, 강청은 10여평방미터의 감방이 너무 좁다고 불평을 하였다. 그녀는 재판을 받으러 나왔을 때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위원인 왕문풍에게 60평방미터의 감방으로 바꾸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강청은 1914년 산동 제성(諸城)에서 출생했다. 이름은 이숙몽(李淑蒙)이었다. 부친 이덕문(李德文)은 현성에서 목공소를 경영하고 있었고, 모친 이란씨(李欒氏)는 이덕문의 둘째부인이었다. 관련 전기기록에 따르면, 1921년 여름 소학교에 입학할 때, 교장선생이 강청의 키가 크고 두 다리가 가늘고 긴 것을 보고는 이운학(李雲鶴)이라는 학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후 강청은 제남, 청도, 상해에서 '장숙정(張淑貞)'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상해탄에서 영화회사에 들어갈 때는, '남평(藍萍)'으로 개명한다. 그러나 이 이름은 겨우 28개월만 사용한다. 7.7사변후에 그녀는 1937년 8월 연안으로 가고, <<상령고슬(湘靈鼓瑟)>>에 나오는 "곡중인불견(曲中人不見), 강상수봉청(江上數峰靑)"에서 '강청(江靑)'이라는 이름을 따서 짓는다.

 

문화대혁명(문혁)기간중에, 강청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고쳐주는 것을 좋아했다. 비서 양은록은 이것이 그녀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개명의 이유는 봉건적 냄새가 난다는 것에서부터 자산계급의 돈냄새가 난다는 것에까지 여러가지가 있었다.

 

1991년 3월 15일, 강청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꾼다. 이때 강청은 이미 보석으로 외부병원에 있었다. 그녀는 입원환자이름에서 이윤청(李潤靑)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것은 그녀가 모택동과의 혼인을 그리워하는 것을 다시 한번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潤)'은 모택동의 초기에 사용했던 자 윤지(潤之)에서 따온 것이고, '이'는 강청의 원래 성이며, '청'은 강청의 청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페어뱅크연구센터 교수인 R. Trier은 <<강청전서>>에서 이렇게 썼다.

 

1991년 청명절, 강청은 상부에 모주석기념관을 가보고 싶다는 희망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눌이 자신을 만나러 올 때 백지를 한권가져다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녀가 모주석을 참배할 때 하얀 종이꽃을 만들어 바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 두 가지 요구는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991년 5월 13일, 강청은 그날 <<인민일보>>의 머릿기사의 옆에 10개의 글자를 휘갈겨 썼다: "역사상 기념할만한 하루이다" 25년전의 이 날에, 중공중앙정치국은 회의를 소집하여, 강청을 문혁영도소조의 책임자로 임명했었다.

 

1991년 5월 14일 새벽 3시 30분, 간호사 한 명은 강청이 이미 화장실 욕조의 위에 목을 매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일찌기, 연기자, 정치가, 문예여왕 및 모택동의 부인이라는 신분을 한 몸에 가지고 있던 강청은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죽기 이틀 전에 그녀는 이눌 부부의 면회를 거절한 바 있다.

 

1930년대, 두번째 남편인 당납(唐納)과 싸우고 나서, 강청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1976년 체포된 후에, 절망으로 인하여 강청은 다시 한번 자살할 생각을 한다. 1984년 9월, 모주석기념관을 참배하고 싶다는 요구가 거절되자, 강청은 젓가락을 목에 꽂은 바 있었다. 1986년 5월, 처지에 대한 불만으로, 강청은 양말 몇 컬레로 줄을 만들어 목에 건 적이 있었다.

 

강청의 시신은 해방군총의원 장의실에 10일간 놓여졌다. 이때는 "이재(李)"라는 가명을 썼다. 강청에게는 이미 최소한 8개의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신중국이 성립된 후 유일하게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름이 붙여진 경우이다. 그녀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는 냉동고는 봉조(封條)가 붙어 있었고, 무장인원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나중에 6명의 공안인원이 명을 받아 강청의 시신을 꺼내어 팔보산으로 보내어 화장을 한다. 화장할 때는 이눌도 참가하지 못했다. 강청과 모택동의 다른 친척도 아무도 현장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때, 전중국과 전세계는 강청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1991년 6월 4일 저녁 23시, 신화사는 강청의 죽음을 보도한다. 강청의 이력은 공고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전 정치적 지위도 소개하지 않았다. 만일 학교의 아이들이 <<인민일보>> 제4면의 귀퉁이에 실린 소식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 여인이 모택동의 부인이었던 여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