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경제/중국의 산업

일본가전의 죽음

중은우시 2012. 9. 19. 01:10

: 중국경제주간

만일 우리가 일본 히타치(日立)회사의 직원앞에서, “히타치TV는 정말 좋다.” “20년전에 산 히타치TV를 지금도 보고 있다고 말한다면, 히타치회사의 직원은 아마 난감해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가전산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일본가전은 글로벌전통가전산업의 최고급, 최우수, 가장 보증할 수 있는 제품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사망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2008년이래, 일본가전기업은 흑색가전, 백색가전에서 전면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한다. TV산업의 결손이 가장 심각했다. 2009년부터 일보는 가전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바귄다. 2011년 재무연도에 일본가전의 3대거두인 소니(Sony), 마쓰시다(柗下)와 샤프(Sharp)는 모두 합쳐서 1.6조엔( 1,283억인민폐)의 결손을 입는다. 소니는 4년연속 결손이고, 샤프의 거액결손은 백년만의것이다. 마쓰시다의 결손폭은 전일본기업중 최대를 기록한다.

찬바람이 몰아치고, 거액의 부채가 몸을 짓누른다. 해외시장은 잃었고, 한국,중국기업이 계속 타격ㅇ르 가한다. 샤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첫번째 기업이 된다. 중국타이완의 홍하이과기집단 동사장 궈타이밍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같이 낮은 주가라면, 홍하이가 샤프를 완전히 인수할 능력이 있다.” 일본의 저명한 경영학자, 경제평론가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은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일본국민가전브랜드인 소니, 마쓰시다가 인수당할 가능성이 있다.

가전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것이 소니, 마쓰시다, 샤프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만일 이렇게 되면, 일본은 부득이 예전의 방직, 철강의 황금기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된 것처럼, ‘일본가전브랜드의 사망에 대하여도 묵묵히 애도의 뜻을 표해야 한다. 이들 기업은 자신의 가전제조를 속속 외국의 OEM기업에 외주를 주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들은 혹은 에너지, 의료등 다른 분야에서 재기할지 모르겠다. 다만, 여러 채널로부터 충격을 받고있는 일본경제에 있어서, 본토 가전의 죽음은 국가적인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동시에, 중국타이완의 홍하이집단은 세계가전생산의 중심에 우뚝 섰다.

히타치(日立), 토시바(東芝): 가전의 꼬리를 자르다.

30년전, 일본에 갈 기회가 있었던 중국인은 귀국시에 TV, 냉장고 혹은 세탁기등 면세가전을 사가지고 왔다. 이런 기회는 1년에 단 한번이다. 그때 일본 도쿄등지에는 중국인을 상대로 하는 면세점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때, 시골에서 도쿄로 왔다. 한번은 기차역에서 TV를 봤는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TV앞에 모여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나이 70에 가까운 사이토 다카오(齊藤孝男)의 말이다. 그때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의 수입은 수천엔이었고, 1킬로그램의 쌀이 68엔이었는데, TV 1대에 20만 내지 30만엔이었다. 당시 일본TV산업은 고이윤산업이었다.

지금 막 졸업한 대학생의 월급여는 25만엔가량이고, 1킬로그램의 쌀은 1000엔정도이다. 그러나 TV1대의 가격은 2만엔이면 된다.

TV는 이미 돈을 많이 버는 상품에서, 돈이 안되는 고철이 되었다. 이익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1980년대, 히타치TV는 중국, 미국, 유럽을 풍미했다. 그러나 오늘의 히타치 사업에서 TV는 조용히 퇴장했다. 히타치본사의 PR부장인 사이토 마사나오(佐藤正直)는 이렇게 말한다: “몇년전, 우리는 중국 푸젠에 TV조립공장을 중국기업에 양도했다. TV를 제조할 수 없어서도 아니고, 이 방면의 기술이 없어서도 아니다.우리는 이미 TV업무를 하지 않는다.”

히타치금속주식회사의 PR부 고노 히사코(河野壽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현재 제품은 주로 자동차산업, 인프라산업 및 전자등 신재료, 부품개발분야이다히타치금속은 히타치제작소의 자회사이고, 히타치의 사업전환의 주요기업이다. 전환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들 업무가 가전사업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

토시바에서, 우리는 똑같은 말을 들었다: 토시바(중국)유한공사의 PR부장인 지친(吉勤)은 이렇게 말한다: “가전사업은 우리회사에서 겨우 9%를 점한다. 만일 이윤율로 본다면, 우리의 인프라시스템, 전자부품의 능력이 일찌감치 가전을 추월했다.”

저장에서 토시바회사의 컴퓨터조립공장, LED전등,냉장도등을 생산하는 기전공장, 수력발전설비를 생산하는 공장등등을 방문했다. 중국의 가전판매점에는 여전히 토시바TV가 있다. 그러나, TV는 이미 토시바의 기술과 능력을 대표하지 않는다. 전력설비, 전자부품등이 이미 대신하고 있다.

비교적 긴 산업체인으로 인하여, 히타치, 토시바는 이번 TV기업위기에서 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 2012 3월까지의 일본재무연도에서 마쓰시다, 소니, 샤프는 거액의 손실을 나타냈는데, 히타치는 5500억엔이익, 토시바는 2000억엔이익을 나타냈다.

일본기업의 수중에는 자금과 기술이 많다. 그들은 모두 TV이외의 새로운 사업을 고려한다. 지금, 마쓰시다는 자동화부품분야의 사업을 고려하고 있다. 소니는 의료기계분야의 사업을 장래의 중요발전방향으로 삼았다. 순수하게 가전으로 유지하는 기업은 일본에서 이미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히타치, 토시바는 비교적 정확한 선택을 했다. 그러나 마쓰시다, 소니, 샤프는 전환이 필연적이게 되었다.

샤프: 일본TV최후의 보루를 잃다.

일본가전, TV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던 샤프는 가장 빨리 침몰한다.

2012 3 27, 샤프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세계최대의 최신 LCD패널공장인 사카이()공장을 중국타이완기업에 넘어갔다.

사카이공장의 투자액은 4200엔이다. 2009, 당시 샤프의 CEO인 카타야아 미키오(片山干雄)은 일찌기 강력하게 선언한 바 있다: “우리는 대형모니터의 새역사를 개척한다.” 이것은 오사카만을 마주하고 있는 수십개의 도쿄야구장크기의 토지위에 새로 연산600만대의 60인치TV패널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겨우 2년만에 이 토지는 샤프위기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슬림TV 2005년에 세계에 위세를 떨친다. 그때, 32인치 TV의 평균가격은 15만엔가량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점에 가면 같은 크기의 가격이 약 2만엔가량이다.

엔의 환율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TV패널공장이 막 생산개시하였을 대, “우리는 1달러를 90엔으로 바꿀 때는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샤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 엔화는 80위안이상으로 올랐다. 이렇게 되면 한국제품과 아예 경쟁이 되지 않는다.

2011 6, 당시 샤프CEO인 카타야마 미키오는 부득이 인정한다: “40인치이하의 TV패널은 돈을 벌 수가 없다. 더 이상 일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사카이공장은 이익을 내지 못하는 보통TV패널을 포기하기로 하고, 전문적ㅇ로 60인치이상의 대형모니터를 생산하기로 한다. 처음에 보았을 때 이것은 아주 정확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발견할 수 있다. 60인치이상의 패널은 전세계에서 수요량이 200만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카이공장의 생산능력은 600만대이다.

만일 시장이 없으면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샤프는 작년여름부터, 60인치이상의 대형모니터TV AQUOS를 북미로 가져간다. 그곳의 대형매장에서 팔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성탄절기간에 공장에는 대량의 재고가 쌓이고 AQUOS는 잘 팔리지않는다.

일본국내에서, 샤프의 브랜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때, 환경은 이미 변화가 발생했다. 2011 10– 12 AQUOS의 판매량은 전년동기대비 40%가량에 불과했다. 2012 4, AQUOS신제품발표회에서, 샤파는 80인치이상의 대형모니터TV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발표회장에서 이 약속을 듣는 사람들은 얼굴이 모두 굳어졌다.

사카이는 AQUOS를 포기하고, 세계의 각 업체에 패널을 공급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일본시장의 관련인사들은 이렇게 샤프에게 권했다. 이때 AQUOS의 세계시장점유율은 겨우 7%였다.

공장을 막 가동했을 때, 샤프도 “50%의 패널을 다른 기업에 제공할 것을 검토한 바 있다. 2008, 세계슬림TV에서 세계2위인 소니는 사카이공장에 34%를 출자하기로 결정한다. 사카이공장이 1/3의 소니패널을 생산하고, 나머지 2/3 AQUOS 및 기타 공장에서 쓰겠다는 것이다.

다만, 샤프 자체는 AQUOS를 포기하지 않았다. 공장이 가동된 후, 일본국내에서 슬림TV는 여전히 인기를 끌었다. 패널을 공급부족이었다. 샤프는 소니, 토시바의 제품에 공급하는데, 왕왕 기한을 맞추지 못하였다. 소니는 샤프가 기한을 지키지 않는데 대하여 불만이 컸다. 그래서 태도가 강경해진다. 출자를 7% 완료한 후, 더 이상 추가투자를 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샤프에서 완전히 철수해버린다.

2011년 하반기부터, 사카이공장의 가동률은 50%에 미치지 못한다. 옵저버들은 샤프의 거액투자를 회수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한다. 샤프는 LCD생산라인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2000억엔을 투입한다. 이 자금은 회사채를 통해서 공모한 것이다. 이 회사채는 2013 9월에 상환해야 한다.

2012 5월을 전후하여, 사카이공장의 대형 LCD패널의 대외판매비율(금액으로 계산하여)은 이미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금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손을 뻗어서 샤프를 구해준 기업은 전자제품OEM기업인 중국타이완의 홍하이과기집단(폭스콘과기집단의 모회사)이었다.

마지막 보루에 중국인의 깃발이 꽂힌 것이다.

2012 1월 한국삼성전자의 구매부서책임자는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이 회사는 샤프에 대량주문을 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거절한 것이다. “사카이의 설비는 절반이 놀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실, 샤프는 홍하이와 합작을 협의하고 있었기 대문이다. 대체적인 내용도 이미 합의를 마쳤다. 샤파는 이전에 OEM공장들과 합작을 시도했다. 2010년이전에 샤프는 홍하이와 접촉이 있었다.

샤프는 여전히 결심을 내리지 못한다. 홍하이의 동사장 궈타이밍이 바라는 합작은 홍하이가 샤프의 최신공장에 개입하고, 샤프의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술을 가지고 노동력비용이 비싼 일본에서 생산하던 샤프에 있어서, 거대한 위협이었다. 기업규모로 보면 홍하이의 판매액은 9.6조엔이고, 샤프는 겨우 2.5조엔이다. 양자가 대등하게 합작할 수 있을지는 아주 불투명했다.

그러나, 샤프는 외부자금이 너무 필요했다. 로이터사의 8 20일자 보도를 보면, 샤프의 부채총액은 1.25조엔이다.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자금을 조달하여 개략 3600억엔의 단기어음을 상환하고, 내년 9월에 기한도래하는 2000억엔의 전환사채도 상환해야 한다. 8, 샤프의 예상으로 이 회사의 재무연도의 결손이 2500억엔에 이른다(전년도의 결손은 3760억엔이다)

사카이공장의 리스크는 이미 없어졌다.” 소니의 히라이 가즈오(平井一夫), 마쓰시다의 쓰가 가즈히로(津賀一宏)와 함께 2012 4 1일 부임한 샤프의 신임 CEO 오쿠다 다카시(奧田隆司)는 마음을 놓았다. 그는 기쁜 표정으로 샤프는 안전하다고 선언한다.

7 12, 홍하이가 이미 사카이공장운영회사에 대한 출자를 완성했다고 선언한다. 홍하이는 같은 날 운영회사에 490억엔을 출자하여 운영회사의 약 46.5%지분을 획득한다. 이번 출자후, “샤프모니터제품회사사카이모니터제품회사로 명칭을 바꾼다.

샤프가 마침내 사카이공장을 버렸다.” 일본업계의 관련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현재 일본국내에서 패널을 양산하는 공장은 샤프의 사카이공장과 마쓰시다의 아마가사키(尼崎)(PDP를 생산함)공장뿐이다. 아는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듯이 PDP는 이미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사카이공장은 일본TV기업의 마지막 보루였다.

지금 이 보루에 이리 중국의 깃발이 꽂혔다. 일본TV산업은 무너진 것이다.

자금이 부족한 샤프는 계속 재산을 담보잡혀야 했다.

로이터사는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서 샤프는 심지어 수도 도쿄에 있는 사무실빌딩까지 매각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팔 가능성이 있는 다른 자산은 폴란드, 말레이시아와 멕시코에 있는 TV조립공장이다.

8 20, 샤프는 4개의 해외LCD TV공장중 2(멕시코와 중국난징의 두개의 주로 60인치이상의 대형 LCD TV를 생산하는 곳)를 홍하이에 매각할 계획이라고 표시했다.  두 공장의 합계 3000명의 직원은 모조리 홍하이가 인수한다. 이제, 샤프에서 떠난 직원은 8000명에 달한다. 샤프 전체 직원수의 15%에 달하는 것이다.

금년 3 27, 샤프는 홍하이에 제3자배정방식의 신주발행을 통하여 홍하이가 샤프의 지분보유율을  9.98%에 이르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홍하이가 최대주주로 된다.

비록 궈타이밍이 일찌기, “3년이면, 나는 샤프가 돈을 벌게 만들 수 있다고 했지만, 샤프의 진정한 문제는 무거운 부채와 금후산업구조조정에 있다.

샤프의 소비재전자사업은 회사의 수익중 2/5의 이윤을 가져다 주었다. 그중 가전, 프린터 및 현금수납기업무의 판매갸 1/10을 점하고있다. 태양광셀업무는 샤프에 8%의 판매액을 가져다 주고, 다른 매출액은 LCD등 부품으로부터 나온다. 8, 샤프는 TV생산량을 30%감소하기로 결정한다.

소니는 게임기와 디지탈사업으로 버티고 있고, 마쓰시다는 신에너지로 진출한 것과는 달리, 샤프의 80%업무는 LCD와 관련있다. 샤프 대중화구 CEO인 칸노 노부유키(菅野信行)에 따르면, “LCD기술분야에서, 샤프는 독립적으로 LCD패널에서 LCD TV까지 수직산업체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서 다하는 모델은 이미 한계데 도달했다. 샤프는 반드시 국면을 타파해야 한다.”

한편으로, 샤프는 홍하이와 합작하여, LCD분야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샤프는 산업구조의 새로운 흥분점을 찾으려 한다. 작년 10, 샤프는 3000만달러를 투자하여 샤프(중국)투자회사를 설립한다. 동시에 건간환경과 정보통신의 두 개의 핵심사업부를 설립한다. 그 뜻은 일본본토에 이어 제2의 시장에서 전자부품, 핸드폰, 제품설계, 상품기획 및 소프트웨어개발등 신규산업을 육성하여, 매출액의 70%에 달하는 LCDTV사업을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그외에 일본의 신법규는 공공사업회사가 재생에너지회사로부터 상품을 구매할 것을 요구한다. 샤프의 신임 CEO인 오쿠다 다카시는 금년에 이미 샤프태양광제품사업을 내놓았다.

소니에 퇴로는 없다

2012 3월까지의 2011년재무년도에 소니는 5200억엔의 결손을 나타냈다. 소니의 유사이래 최대의 결손이다. 2012 2 1, 소니의 수석부사장 히라이 가즈오가 신임 사장이 되어 4 1일 정식부임한다. 51세의 젊은 신임 사장은 회사의 위기에 중임을 떠맡았다. 그러나 마쓰시다의 쓰다 가즈히로처럼 즉시 구멍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금년 6월까지의 첫째분기에 소니의 순결손은 246억엔이다.

2001-2010년 소니의 4대부문은 촬영기자재(디지탈카메라)는 매년 이익을 나타냈고, PS(게임기) 2005-2009년 연속 5년 결손을 나타냈으며, 이동단말기는 2008,2009년 결손을 나타냈다. 가장 참담한 것은 가전부문이다. 2004-2011년까지 연속 8년간 결손을 나타낸다.

음악분야와 게임업종의 경험이 있으나, 전자제품의 개발생산에는 아무런 경험이 없는 히라이 가즈오가 어떻게 가전사업을 처분하고, 이동통신, 디지탈카메라와 게임의 삼대업무를 잘 살릴 수 있을까? 그는 강력한 상품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계속하여 소니만이 줄 수 있는 체험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그는 소니의 체제를 개선하고, 이윤을 낼 수 있어야 한다.

히라이 가즈오는 1984년 소니CBS회사에 입사한다. 1997년에 소니전자게임(SCE)회사 집행이사가 된다. 2006년에는 SCE회사 사장이 된다. 2009년에는 소니의 집행이사가 되고, 2011년에는 소니의 부사장 겸 SCE 회장이 된다. 2012년에는 소니의 사장이 되었다. “나는 자회사에서부터 해온 사람이다. 모회사에 히라이팀을 만들어 소니의 경영업무를 잘 하고 싶다.”

4 12일 경영방침설명회에서, 히라이 가즈오는 2012년도에 1만명을 삭감하겠으며, 축전지사업부서를 양도하고, 정밀화학분야의 사업도 일본정책투자은행에 양도할 준비를 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소니는 급여등 고정비용을 삭감할 것이다.

TV업무분야에 매년 결손이지만, 히라이 가즈오는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나는 2013년도에 TV사업이 이익을 실현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익을 낼 뿐아니라, 5%의 이윤을 얻을 것을 희망한다. 소니에 있어서, 5%의 이윤율은 십년동안의 최대바램이었다. 레이만사태가 터지기 전에 원래 이미 이 목표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오랫동안 불황이었다.”

우리는 TV사업을 포기하고자 하지 않는다. TV는 소니와 소비자의 최대 연결점이다.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LCD TV에서 계속 기술혁신을 하기를 바라고,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제품을 생산해내기를 바란다.” 히라이 가즈오는 우리가 이를 위하여 핵심기술을 강화하고, TV사업이 이익을 실현하고나면, 소니의 전진방향은 밝아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소니 TV사업의 거의 절반은 이미 타이완의 홍하이정밀공업에 위탁하여 생산하고 있다. ‘일본소니제품이라는 이름은 이미 중국타이완폭스콘제품이라는 것이 실제가 되었다. 그리고, 히라이 가즈오도 부득이 인정한다. “이후 원가삭감에서 더 짜낼 여지는 이미 크지 않다.”

8 15, 소니회사는 2013 3월까지의 재무연도에서 TV생산량을 20%감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히라이 가즈오는 TV에 이윤을 내라고 했던 원래의 생각이 아마 약간은 변화한 것같다.

미국애플회사의 iPhone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iTunes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소니는 소프트웨어 하드웨어의 특징을 모두 발휘하여 좋은 제품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히라이 가즈오의 말이다.

히라이 가즈오의 전임인 하워드 스트린저(Howard Stringer)는 말했다.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를 즐기는 도구이다.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우리는 빛을 잃는다.” 스트린저는 소프트웨어를 아주 중시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목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소니는 계속하여 예술가에게 감동을 주었고, 엔지니어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상품을 만들게 했다. “비교적 간단한 사례는 PS게임기이다. 이는 우리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잘 결합시킨 최초의 제품이다. 그리고 경제모델도 아주 좋았다.”

“1996, 소니회사가 미국에서 PS시장을 개척하는 중임을 나에게 맡겼다. 매일 퇴근전에, 나는 동료들과 하루의 일을 얘기했다. 우리의 팀은 업무효율이 아주 높았다. 상품이 시장에서 받아들여진 후, 팀은 더욱 단결하고 발전했다. 그때 우리의 느낌은 소니의 하드웨어(게임기)가 좋고, 소프트웨어(게임)도 특별히 좋았다. 마침내 우리는 미국에서 큰 시장을 개척한다. 1의 지위를 얻었고, 우리는 성취감을 느꼈다.”

문제는 연이어 나타났다. ‘다음에는 뭘까라는 느낌이었다.”

소니에서 히라이 가즈오는 오랫동안 마루야마 시게오(丸山茂雄, 소니음악회사의 전 사장), 구다라기 켄(久多良木健, 소니게임회사 전 사장)의 밑에서 일했다. 마루야마 시게오는 히라이 가즈오에게 말했다. 사람은 방황하면 안된다. 신축성있는 업무와 사고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구다라기 켄은 그를 이렇게 가르쳤다. 한 가지 일을 하면 반드시 잘 해야 한다. PS게임기분야에서 사업에서 어떤 세부적인 부분도 약간의 불만이 있으면, 구다라기 켄은 즉시 수정했다.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제품은 먼저 자신이 쓰기 좋다고 여겨야 한다.”

2010년 소니는 미국 일리노이의 생명과학회사인 iCyt Mission Technology를 인수한다. 2011, 소니는 미국 Micronics의료진단설비회사를 인수한다. 금년, 소니는 의료설비분야에서 장점이 있는 올림푸스와 날로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다. 바클레이 캐피팔의 주도쿄 애널리스트인 후지모리 유지(藤森裕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소니가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다. 의료섧시장과 전자제품시장의 관계는 갈수록 가까워진다. 많은 전자제품기술은 모두 의료설비에 사용할 수 있다.” 업계는 보편적으로 소니의 중점은 점점 의료설비시장으로 옮겨갈 것으로 본다.

절대로 소니에 이익을 내야 한다. 나는 이 점에서 태도는 아주 확고하다.” 히라이 가즈오의 말이다. “나는 소니에서 업무를 막 시작했다. 나는 반드시 기업에 명확한 전진방향을 가져야 한다. 기업이 성공을 하도록 모든 역량을 경주하여야 한다. 우리는 전진밖에 없고 후퇴는 없다.”

마쓰시다: 가전보다 신에너지

오사카 가토마구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거의 모든 일본 마쓰시다전기산업주식회사의 사원들은 한 사람을 언급할 때면 입을 다물었다. 동사장 나카무라 구니오(中村邦夫)는 이 곳에서 남다른 명칭을 지니고 있다: “천황(天皇)”. 그의 명성은 마쓰시다에 진동한다. 이곳에서 그 어디에도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금년 6 27일로 돌연 끝이 난다. 왜냐하면 천황이 마침내 떠났다

2012 2월말, 마쓰시다는 이사후보자를 발표한다. 이사장 나카무라 구니오는 퇴임하여 고문이 되고, 사장 오츠보 후미오(大坪文雄)는 물러나서 이사장이 된다. 일찌기 마쓰시다 산하의 AVC네트워크의 사장이자, 창업자친척이 아닌 전무 쓰가 가즈히로가 이사회의 가장 나이어린 구성원으로 되며, 앞으로 마쓰시다의 신임 사장이 될 것이었다.

2011년 일본제조업은 유사이래 최대의 적자를 나타낸다. 호츠보 후미오가 사장이 된 후 나타난 것이다. 그해 에어컨을 제외하고, 마쓰시다가전의 판매금액은 모조리 하락한다. TV, 카메라, 반도체는 속속 결손을 보이고, PDP TV는 가장 심각했다. 오츠보 후미오의 퇴임은 실제로는 문책성이다.

2 28, 오사카 신오타니호텔 봉황청. 오후 6시경, 쓰가 가즈히로가 지각한다. 그는 약간 긴장했고, 행동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오츠보 후미오와 비교하면 그의 얼굴색은 괜찮은 편이었다.

자신을 소개한 후, 쓰가 가즈히로는 점점 감각을 되찾는다 처음 나에게 사장을 맡긴다고 들었을 때, 나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마쓰시다라는 이 큰 배는 계속 항해해야 한다. 내가 나서서 키를 잡아야 겠다.” 쓰가 가즈히로는 굳은 결심을 나타냈다.

1개월전, 쓰가 가즈히로는 AVC회사의 2012년 사업계획을 얘기할 때, 누구도 그가 다시 승진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쓰가 가즈히로의 능력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2008, 51세의 그는 마쓰시다자동화설비사업무서의 일인자가 된다. 2011 AVC회사를 맡는다. 2012년에는 마쓰시다 사장에 오른다. 이 노선은 모두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임 사장 나카무라 구니오, 오츠보 후미오도 모두 이 길을 따라 마쓰시다 사장이 되었다. AVC회사는 마쓰시다 사장이 반드시 거처야 하는 자리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오랫동안 마쓰시다를 분석해온 한 증권애널리스트의 말이다.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기업에서 55세에 사장에 오르는 것은 이미 상당히 젊은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가전왕자는 지금 출구가 보이지 않은 깊은 터널에 들어가 있다. 체제개혁이 불가피하다.

2003, 당시 사장을 맡고 있던 나카무라 구니오는 거액의 연구개발비를 들여 PDP TV를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PDP신앙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PDP LCD보다 밝고, 가시성이 더욱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기술전문가의 의견을 더욱 많이 들었더라면, 아마도 LCD에 투자했을 것이다. 그 때도 LCD의 우세는 이미 명확했다.”

아마가사키 제1공장이 가동된 후인 2005, 대다수이 사람은 이미 PDP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히타치제작소는 PDP진영에서 퇴출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나카무라 구니오는 여전히 PDP를 좋게 보았고, 마침내 6000억엔을 투자한다.

끝났다.” 2011 6 AVC회사의 사장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은 쓰가 가즈히로는 PDP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작년 7월의 이사회에서 그는 공개적으로 말한다: “아마가사키 제3공장이 건설을 중단해야 한다.” 이것은 나카무라 오츠보의 노선을 완전히 부인하는 말이다.

이사들은 쓰가의 발언을 듣고 아주 놀란다. 그러나 3개월후, 마쓰시다는 2100억엔을 들이고 가동한지 1년반이나 된 아마가사키공장의 생산을 중단한다.

나 자신의 역할을 이미 다 발휘했다. 이후의 방향도 아주 분명하다. 네가 책임지로 완성해라. 나는 네가 자신의 뜻에 따라 새로운 경영을 해나가길 바란다.” 2월초, 오츠보 후미오는 쓰가 가즈히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쓰가 가즈히로는 1979년 마쓰시다에들어온 후 처음에는 기술본부 무선연구소에서 음성인식의 연구에 종사했고, 라디오, TV 5,6개 사업부에 기초기술을 제공했다.

무선전신을 연구하는 것은 대부분 계산과학출신인데, 당시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생물공학을 전공한 쓰가 가즈히로를 끌고 온 것이다.

잘생긴쓰가 가즈히로는 재능을 드러냈다. 1주일의 업무를 그는 2,3일이면 마쳤다. 만일 상사가 다른 해결방법은 없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내가 생각해보았는데, 이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왕왕 그의 결론이 정확했다.

당시의 상사는 20여세된 쓰가와 얘기를 할 때, 자주 기술관리문제를 토론했다. “기술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관리이다. 프로젝트책임자는 프로젝트자체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쓰가 가즈히로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일종이 균형감각이 있었다.”

1986, 쓰가 가즈히로는 미국자회사에 파견되어 근무한다. 그곳에서 그는 캘리포니아대학의 석사과정을 밟는다. 영어의 난관을 너은 후, 2년만에 계산과학분야의 석사학위를 받는다. 귀국후 그는 소프트웨어개발에 종사한다.

쓰가 가즈히로는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놀라운 성취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표준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사람이다. 토시바와 DVD표준을 다툴 때, 마쓰시가다가 이겼다. PDP문제에서 그는 아주 민첩했다.

쓰가 가즈히로는 마쓰시다부흥계획을 짜고 있다. 불필요한 인력의 감원을 위하여 그는 부임한 후 이미 3.6만명을 감원했다.

가전은 마쓰시다가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부서이다. 일시에 이를 버릴 수는 없다. 쓰가 가즈히로는 마쓰시다 가전사업의 전세계 59개 공장과 사무실을 병합한다. 쓰가 가즈히로의 개혁핵심은 냉장고, 세탁기 등 대형가전과 태양광전지등 에너지절약가전에 두었다.

그러나, 사실은 증명한다. 마쓰시다TV의 쇠락은 불가피하다. 7 31, 마쓰시다는 6 30일까지의 2012재무년도 제1분기실적을 내놓았다. 비용삭감계획으로 평면TV사업의 계속된 결손을 막아내어, 마쓰시다는 분기별 실적을 이익으로 전환시킨다. 준이익이 128억엔에 달한다. 2012년 재무연도의 이익은 아마도 500억엔에 달할 것이다. 이사장인 오츠보 후미오는 금년 1월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기업도 TV하드웨어로 돈을 벌지는 못한다. 마쓰시다는 가전사업에서 B2B업무로 전환하고자 한다.”

어디로 전환하는가? 쓰가 가즈히로의 이전 성공경험은 그의 다음번 개혁계획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주로 리튬전지를 생산하는 에너지부서와 반도체, 전기용품, 전기회로를 생산하는 자동화설비부서를 마쓰시다의 새로운 핵심으로 삼았다.

글로벌가전의 패자: 일본제조는 중국홍하이에 넘기다.

TV는 일본가전의 목숨줄이다.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TV를 잘 보는 사람들이다. 1집에 몇 대의 TV를 가진 것은 일본에서 아주 보편적이다.

20세기후반, 일본기업은 TV생산에서의기술이 최고급이고, 공장도 가장 많았다. 경쟁우세는 필적할 수가 없었다. 20년전의 중국인은 거의 모두 일본TV브랜드를 보물로 여겼다.

히타치는 1980년대에 푸젠에 TV공장을 설립한다. “그 때부터 히타치 브랜드는 중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중국인들과 히타이의 발전설비, 디지탈업무를 얘기하면 그들이 호기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히타치가 TV만 생산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디지탈시대가 되면서, 조립설비와 기술, 그리고 부품을 구매할 수만 있으면, 값싸고 품질좋은 TV를 생산해낼 수 있게 되었다. 브랜드의 역량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토시바(중국)유한공사 대표의 말이다. 일본TV의 전성기는 끝이 났다.

최신 조립생산라인을 가진 중국기업과 한국기업은 21세기에 일본의 통일천하국면을 희석시켰다. 특히 LCD TV시대가 되면서, 대량투자를 한 기업이 가격결정권을 가진다. 일본기업은 PDP를 통하여 시장을 점령하려 했지만, 이 기술은 세계에 보급되지 못했다. 마쓰시다는 이를 위하여 대량의 투자를 했지만, 점점 거대한 짐으로 되었다. 제품가격이 빠르게하락하여 일본기업은 기본적으로 세계에서 가격결정능력을 상실한다. 일본 TV는 전성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든다.

비록 소니를 위시한 몇 개의 기업이 ‘TV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일본TV산업자체는 이미 더 이상 시장을 제패하지 못한다는 것이 공지의 사실로 되었다. 일정한 기술을 보증하고, 시장에서 계속 싸우는 것이 일본 TV의 앞으로 한동안의 모습일 것이다.

1980년이후, 일본TV제품은 점차 철강을 대체하여, 일본대외수출의 주요제품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TV기술, 산업투자, 기업간 상호경쟁 혹은 합작의 각종 소식을 듣기는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옛날의 방직기업, 철강기업과 마찬가지로, 기업이 비록 강대하고 좋은 기술을 지니고 있지만, 이들을 가지고 TV산업의 쇠락을 막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TV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

일본 게이오대학교수인 나카무라는 2010년부터, “전체 세계의 TV는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어느 곳이든 현지에 지방TV방송국이 있는 것처럼, 지방의 모바일방송국이 있게 된다. 모바일 TV의 보급은 TV프로그램의 시청자수, 시청시간을 늘였다. 그러나 이는 TV자체에 대한 수요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TV가 없다.” 이것은 젊은이의 유행을 따르는 말이 아니다. 유행하는 현상이다. 핸드폰, 평면컴퓨터, 컴퓨터의 보급은 TV로 하여금 필수적이라는 지위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1990년대이후, 인터넷이 보급되었다. 모두 알다시피, 일본의 ADSL의 건설과 네트워크속도는 전세계에서 선진적이다. 컴퓨터의 뉴스 지식전파의 컨텐츠는 TV를 훨씬 초과한다. TV 자체는 자연히 판매가 어려워진다. 최소한 일본의 TV시장은 계속확대할 여지가 없어졌다.

일본의 TV는 시장유지를 위해 노력한다. 컨텐츠에서 사람들이 의견을 발표할 기회를 주고자 노력한다. 더 많은 방송국을 만들어, 시청자의 수요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컴퓨터, 스마트폰의 기능을 대체하지 못한다. 방송국은 프로그램컨텐츠제작기업으로 변화해야 하고, 프로그램으로 유지한다. 판매하는 프로그램은 반드시 TV를 통하여 방송되는 것이 아니다. TV는 컴퓨터로 대체될 수도 있다.

지금 일본은 여전히 적지 않은 TV수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10겨개의 TV기업을 먹여살릴만큼 되지 않는다. 아직도 TV업무를 하는 기업은 반드시 생산량을 감소시켜야 한다. TV는 산업체인의 아주 작은 부분이 된다. 도태되는 일부 TV기업이 나타나는 것은 일본에서 필연적이다.

일본가전은 부득이 인정해야 한다. 세계가전업의 패주는 이제 중국홍하이이다. 이 타이완에서 온 괴물은 현재 전세계의 근 20개의 일류기업제품제조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그리고 계속 확장한다. 옛날의 패주인 일본은 그저 바라보며 탄식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