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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산업

한유(韓愈)의 죽음이 남긴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진재지(陳在智),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고대실 

 

장경(長慶) 2년(822년), 이월 초이틀,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은 병부시랑(兵部侍郞) 한유는 골치아픈 임무를 맡았다.

 

진주(鎭州, 지금의 하북성 정정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원인은 조정에서 진주에 절도사(節度使)로 파견한 전홍정(田弘正)이 사치하고 행사를 좋아하며, 부하들이 힘든 것은 신경써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주의 장병들은 극도의 불만을 품게 된다. 진주병마사(鎭州兵馬使)인 왕정주(王庭湊)는 이를 틈타서 난을 일으키고자 하여, 장병들을 선동하여, 전홍정과 그의 막료 및 그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리고 조정에 왕정주를 절도사로 정식 임명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중당(中唐)이레 대당제국의 고질이다. 번진할거자립의 사태가 다시 한번 생생하게 벌어진 것이다.

 

이런 무력협박에 조정이 굴복하기는 싫다. 그래서 15만대군을 파견하여 토벌한다. 왕정주는 겨우 1만여명의 군대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앙에서 파견한 군대의 내부불화를 잘 이용하여, 성동격서하여 그들을 하나하나 각개격파하였을 뿐아니라, 오히려 주요도시 심주(深州, 지금의 하북성 심주시)를 포위한다. 조정은 전투를 계속할 힘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왕정주를 절도사로 임명하는데 동의한다. 그 후, 나이 반백이 넘은 병부시랑 한유를 진주로 보내어 '선위(宣慰)'한다. 왕정주를 설득하여 심주에 대한 포위를 풀고 성안의 수비장수 우원익(牛元翼)이 떠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왜 한유를 보내어 왕정주를 선위하게 했을가? 이것은 한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유가 명을 받아 출발한 후, 당시 재상을 맡고 있던 원진(元稹)은 당목종(唐穆宗)에게 말한다. "한유가 아깝다!" 원진은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 아니다. 당시의 번진은 극히 발호하고 포악했다. 사람이 목숨은 초개처럼 여겼다. 특히 그들은 아예 조정을 눈에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유가 사신으로 떠난 것은 확실히 큰 위험을 안은 것이었다. 당목종도 바로 이 점을 깨닫는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내어 저지한다. 그러나, 조정의 위엄을 지키기 위하여, 한유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황실의 사신에게 강개하여 말한다: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군주의 어짊이다. 죽은 것은 신하의 의리이다. 군주의 명을 받았음에도 어찌 스스로를 돌보며 머물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는 길에 황제의 명을 받았으므로 한유는 극도로 조심했다. 하루빨리 진주에 도착하고자 했다. 밤낮으로 달리는 중에, 그는 두번이나 옛날의 상사인 배도(裴度)에게 시를 써서 보답했다: "찬축삼년해상귀(竄逐三年海上歸), 봉공부차착정의(逢公復此着征衣), 선음가구환편마(旋吟佳句還鞭馬), 한부득선거조비(恨不得先去鳥飛)"(<봉사진주행차승천행영봉수배사공상공>). "함명산동무난사(銜命山東撫亂師), 일치삼백자혐지(日馳三百自嫌遲), 풍상만면무인식(風霜滿面無人識), 하처여금갱유시(何處如今更有詩)(<진주로상근수배사공상공중견기>). 이를 보면 당시 한유는 반드시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었다.

 

상대방의 왕정주는 이미 진영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완전무장을 한 갑병이 '좁은 길에서' 한유라는 흠차대신을 환영했다. 갑병들이 칼을 칼집에서 꺼내고, 활을 시위에 걸고,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진주관역에 들어간 후, 한유, 왕정주가 자리에 앉는다. 무장병사들이 건물 안에 가득했다. 한유는 개인의 안위는 도외시했다. 얼굴에 적의충만한 적병들을 대하면서도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그는 늠름하게 행동하여, 오히려 주적심허(做賊心虛)의 왕정주가 약간 겁을 먹게 만들었다.

 

왕정주는 먼저 책임을 떠민다. 이는 탐색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말한다: "국면은 이미 복잡해졌다. 모든 것은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병들이 조성한 것이다." 동시에 건물 바깥의 무장병사들은 왕정주가 미리 조치한대로 한꺼번에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기세가 흉흉했고, 앞으로 나와서 한유를 포위한ㄴ다.

 

한유는 흔들림이 없이, 당당하게 이들 무장병사들에게 말한다: "아들들이여. 함부로 굴지 말라. 한유가 하는 말을 들으라. 나는 너희들에게 반역과 충순의 이해관계를 알려주러 온 것이다. 옛날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이, 우리 왕조의 안록산, 사사명과 같은 반적을 보자. 그들의 자손이 아직 남아있는가? 아직도 관직에 있는가?"

무장병사들이 말한다: "없다."

한유가 이어서 말한다. "영공(전홍정)은 충의로와 절도사에 봉해졌다. 중서령에도 봉해졌다. 자손은 아직 어리지만, 이미 관직을 받았다. 그의 영예는 천하에 빛난다"

무장병사들이 소리친다: "전홍정은 우리를 각박하게 대하였고, 그래서 군심이 불안해졌던 것이다."

한유가 말한다: '그러나 너희 삼군은 그를 죽여버렸다. 또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무장병사들이 그 말을 듣고는 "시랑의 말이 옳습니다."라고 말한다.

 

왕정주는 군심이 동요하는 것을 보고는 사태가 좋지 않다고 판단한다. 부하들이 한유에게 설득당할까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무장병사들에게 물러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한유에게 말한다. "시랑이 이번에 온 것은 왕정주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어서인가."

한유가 대답한다."군중에 우원익과 같은 장수는 적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그를 특별히 아끼는 것이 아니라, 대국을 고려해서, 그를 함부로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왜 그를 죽어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까"

왕정주는 바람방향에 맞추어 키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풀어주겠다. 풀어주겠다. 나는 바로 그를 풀어주겠다."

한유가 말한다. "그렇게 하면 그건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왕정주는 술자리를 열어 한유를 대접한다. 그리고 심주의 포위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와 동시에, 우원익은 어렵게 포위망을 돌파한다. 왕정주는 한유의 말을 듣고, 추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전투는 이대로 끝나버린다.

진주에 갔던 일은 한유가 적의가 충만한 병사들 앞에서 삼엄한 무장병사에 둘러싸여서, 담담하게 응대하고, 이치로 설득하여,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정을 위하여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이는 대의늠름한 기질과 거중약경(擧重若輕)의의 재주를 드러낸 것이다. 송나라때의 대문호 소식은 <조주한문공묘비>에서 한유의 "용탈삼군지수(勇奪三軍之帥)"를 칭찬한다. 그가 언급한 것은 바로 문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담량이다.

 

진주를 선무하고, 우원익을 구하는 임무를 완성한다. 한유는 자연히 기뻤다. <진주초귀>라는 시에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별래양류가두수(別來楊柳街頭樹), 파농춘풍지욕비(擺弄春風只欲飛), 환유소원도리재(還有小園桃李在), 유화불발대랑귀(留花不發待郞歸)"

당목종은 한유가 조정으로 개선한다는 소식을 듣자 기뻐하지 마지 않으며 말했다: "봐라. 경은 문장을 잘 쓰는 고수일 뿐아니라, 기민한 연설가이기도 하다." 그를 극도로 칭찬하며 중용할 준비를 한다. 한유가 기대해마지 않던 빛나는 관직의 길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한유는 어려서부터 청빈한 생활을 해왔다. 그의 운은 아주 좋지 않았다. 20살때 장안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한다. 여러번 시험을 쳤지만 불합격한다. 25살때, 겨우겨우 진사에 합격한다. 그러나 연이어 여러해동안 이부(吏部)의 선발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공명만 얻었고, 관직은 얻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지방절도사의 막료로 지낸다. 35살때, 마침내 관직에 나간다. 그러나 환관, 권력자와 대항하다가 십여년간 뜻을 펴지 못했다. 생활비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장경4년(824년) 여름, 57세의 한유는 중용된지 얼마되지 않아 돌연 병이 난다. 부득이 휴가를 받아 새로 만든 성남쪽의 별장에서 휴양한다. 중추절이 지나고 병세가 악화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사망한다. "고사산좌우(古史散左右), 시서치후전(詩書置後前), 기수두서충(豈殊蠹書蟲), 생사문자간(生死文字間)" 한유의 이 자조시(自嘲詩)처럼, 그는 사서를 편찬했고, 군대를 따라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군사, 사상, 교육등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여러가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것은 문학사업이다. 그는 '생사문자간'의 문인이다.

 

한유는 당시의 문단 상황을 잘 알았다. 명확하게 '고문(古文)'을 쓸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대량의 창작실천으로 유행하던 병문(騈文)에 대항한다. 그의 이론과 실천은 많은 문인들의 옹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영향력이 아주 큰 고문유파(古文流派)가 형성된다. 그는 또한 시를 쓰는데 이전 사람의 것에 의지하지 말고 독창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웅기(雄奇), 험괴(險怪)한 시가를 즐겨 썼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시인들과 단결하여, 그와 맹교(孟郊)를 대표로 하는 한맹시파(韓孟詩派)를 형성한다.

 

장경4년(824년) 십이월 초이틀, 즉 양력 825년 1월 25일 새벽, 장안 정안리의 저택에서 한유는 이미 위급한 상황이었다. 가족과 친구 장적(張籍)등에게 후사를 당부한다. 한유는 원래 장적에게 유서를 대신 써달라고 하였는데, 가족들이 통곡을 하는 바람에 완성하지를 못한다. 그는 그저 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큰형이 있는데 덕행이 높고 의술에 정통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본초강목을 보았다. 그 결과 마흔 살에 죽었다. 나는 양생, 섭식에 아무런 금기도 없었다. 그래도 관직이 시랑에 이르고, 큰형보다 열몇살이나 더 살았다. 뭐가 불만스러운 점이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선인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세상을 뜬다.

 

한유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1000여년간 지속되었다.

한유의 사위 겸 제자인 이한(李漢)은 이렇게 말했다: "장경4년 겨울, 선생이 죽다(先生歿)."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거이는 친구 원진을 회고하는 <사구(思舊)>에서 이렇게 말한다: "퇴지복유황(退之服硫磺), 일병흘부전(一病訖不痊)". 오대시기의 도곡(陶穀)은 한유의 죽음의 원인에 대하여 설명했고, 널리 알려졌다. 그는 한유가 만년에 여색을 가까이 하였고, 매일 유황을 먹은 수탉을 한 마리씩 먹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한유는 말년에 희첩(姬妾)을 여럿 샀다. 어떤 여인은 비파를 잘 타고, 어떤 여인은 쟁을 잘 다루었다. 이름이 알려진 경우로는 강도(絳桃)와 유지(柳枝)가 있다. 모두 가무에 능했다. 여색을 가까이 하는 생활에는 갖은 방법으로 정력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당시 연단이 유행했다. 한유가 먹은 '유황닭'은 아마도 어떤 약방일 것이다. 당연히, 단약을 미시는 것과 만년에 여인을 가까이 하는 것은 시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년을 즐기는 방법이다. 당시에 무슨 정리에 위배되는 일은 아니고, 한유의 말년 명성을 해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청나라때 방송경, 이계가, 전대흔등은 모두 도곡의 주장이 '선현(前賢)을 무방(誣謗. 거짓으로 헐뜯는 것)'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방송경은 <위부군묘지>에서 당시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위중립(衛中立)이고, 호가 "퇴지(退之)"였다. 그가 단약을 먹고 죽었는데, 백거이가 말한 것은 바로 위중립이라는 것이다. 한유가 아니고. 이계가, 전대흔은 더 나아가, 한유는 일찌기 사망하기 1년전에 <이간묘지>를 쓴 바 있는데, 6,7명을 비판했다. 모두 단약을 먹고 죽은 사람들이다. 한유가 겉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서, 암암리에 자신이 단약을 시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중립설에 대하여, 근대의 국학대가 진인각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백거이와 한유는 그저 평범한 교우관계였다. 그러나 어쨌던 약간의 내왕은 있었다. 그의 고증에 따르면, 백거이가 진사출신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변방에서 막료로 지내던 위중립과 교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백거이가 <사구>를 쓸 때, 어찌 돌연 자신과 아무런 교분도 없는 사람을 더올리겠는가? 위중립설은 그래서 더욱 비합리적이다.

 

한유도 아니고, 위중립도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인가? 설마 백거이가 친하게 사귀던 사람중에 또 다른 '퇴지'가 있었단 말인가? 이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