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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천시통(陳希同): 솔직과 천진

by 중은우시 2012. 6. 1.

글: 진파공(陳破空)

 

 

 

천시통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바로 그의 두 가지 죄를 떠올린다: 하나는 '6.4'를 진압하는데 원흉중 하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부패로 낙마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출판된 책에서 천시통은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앞의 죄에 대하여는 다른 사람에게 죄를 미루었고, 뒤의 죄에 대하여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 책은 홍콩신세기출판사가 발행했다. 제목은 <천시통친술: 중구삭금난삭진>이며, 작가는 전 국무원발전중심 연구원 야오젠푸(姚監復)이다. 작년초부터 시작하여 야오젠푸는 천시통과 십여차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했으며, 이를 기초로 이 책을 썼다.

 

'6.4'에 관하여 외부에 널리 알려진 바로는 덩샤오핑이 심복이었던 천시통은 일찌기 덩샤오핑에게 '군부사정을 거짓으로 보고'하고, 학생운동의 심각성을 과장했으며, 이로 인하여 덩샤오핑이 진압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천시통은 이렇게 말한다: "덩샤오핑은 이목이 많았다. 그가 어찌 속을 수 있겠는가? 그를 속였다는 말은 그를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천시통은 또한 "반번도 덩샤오핑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변명은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점이 있다. 정치적 강자로서 덩샤오핑의 결정은 확실히 자신이 했고,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천시통은 북경시장으로 있었고, 그 최전전에 있었으므로, 그가 덩샤오핑에게 한 보고와 그 자신이 강경파였다는 점은 덩샤오핑에게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천시통은 자신이 "북경계엄지휘부총지휘관"이었다는 것을 부인했다. '2010년에 <리펑(李鵬)일기>를 보고서야 내가 총지휘관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89년때 리펑은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리펑을 만난 기회가 있으면, 물어봐야겠다. 당신은 왜 나에게 일찌감치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이 말은 놀랍다. 천시통이 여기서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리펑이 그가 출판하려는 일기에서 거짓말을 했을 것같지도 않다. 혹시 덩샤오핑과 리펑은 '계엄지휘부'를 만들고, 직무를 나눴지만, 명확히 통지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당시 덩샤오핑과 리펑 두 사람도 계엄과 진압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100% 자신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당시 중공내부가 혼란하여, 도대체 누가 '계엄사령부총지휘관'을 맡았는지조차도 불분명하게 되었던 것일까?

 

'6.4' 진압후, 천시통은 북경시장 겸 국무위원의 명의로, 전인대상무위원회에 <동란저지 및 반혁명폭란평정에 관한 상황보고>를 통하여 학생운동은 '폭란'으로 규정하고, 당국의 진압을 '평정'으로 규정했다. 이 보고서는 100만부가 인쇄밣행되었고, 전국의 곳곳에 배포된다. 무형중에 천시통이 '6.4'의 원흉이라는 역사적 자리매김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천시통은 해명한다: '당중앙이 나에게 보고하도록 시켰다. 나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보고서에 대하여 나는 글자 한자도 토론에 참여하거나 부호 나나도 바꾸지 못해쑈다. 그러나 내가 책임을 진다."

 

여기서 천시통이 말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절대 주요책임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여기의 천시통의 말투에서 우리는 천시통이 당시의 진압이 그다지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리펑의 일기에서의 기세등등하고 나말고 누가 있느냐는 식의 기염과는 전혀 다르다. 한 마디 '그러나 내가 책임을 진다'는 말에서 천시통에게 약간의 후회를 엿볼 수 있다.

 

야오젠푸는 천시통에게 물어본다: "당신이 시장으로 있을 때, 당신의 시민들이 무고하게 죽었는데,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천시통은 이렇게 대답했다: "시장으로서 나는 가슴아팠다. 만일 잘 처리하였더라면 한 사람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날 수백명이 죽었다." 야오젠푸는 '6.4'사건에 대한 인식에서 천시통은 여전히 집정자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화과정에서 천시통의 인간성이 소생하고 있다는 점이 나타났다고 한다.

 

당시의 같은 진압자이지만, '6.4'참극을 얘기하면서, 천시통은 리펑과 전혀 다른 말투를 보였다. 이것은 아마도 천시통의 이후 처지와 관련있을 것이다. 진압공신으로 '6.4'후에 천시통은 북경시위서기, 정치국위원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쩌민과의 권력투쟁에서 실패하고, '부정부패죄'로 투옥되며, 16년형을 받는다. 고관대작에서 죄수로 내려앉았다. 낙차가 컸고, 바닥까지 떨어진 것이다. 천시통은 여기서 인생의 여러 맛을 보았고, 인생이 무상함을 느꼈다. 이것은 리펑이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정부패죄'에 대하여, 천시통은 완전히 부인했다. 그는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으며, 문혁이래 당내의 최대 원안(寃案, 원통한 사건)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기득이익집단으로서 중국공산당의 각급 관리는 이익거래, 이익균점이 있었다. 특히 '6.4'이후, 당이 전체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천시통은 자신이 부정부패에 관련되었다는 것을 부인했지만 그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천시통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중국공산당의 고관들의 집단부패와 비교하자면 그가 약간 저지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장쩌민 가족이 전기통신분야를 모조리 먹어치운 것이나, 리펑가족이 전력업종을 농단하는 것을 보면 천시통이 권력으로 사리를 약간 도모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천시통이 감옥에 간 것은 장쩌민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야오젠푸와의 대화에서 천시통은 이 점을 명확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덩샤오핑에게 장쩌민에 대하여 고발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러나, 천시통은 다음 사실을 털어놓았다: "중공고위층의 권력투쟁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상대방은 일체의 비열한 수단을 써서 권력을 탈취한다." 그가 지적한 것은 바로 장쩌민이다. 실제로 2004년의 "보외취의(保外就醫, 치료보석)"부터, 지금의 '18대'이전에 책을 내기까지, 천시통의 동정은 또 다른 권력투쟁과 관련이 있다. 후진타오파와 장쩌민파이다. 타도된 것은 천시통이지만 완전히 폐물이 된 것은 아니다. 그는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투쟁의 한 장기말이 되었다.

 

천시통은 야오젠푸에게 책의 출판을 늦춰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이 '상소'중이라고 말했다. 그의 부정부패죄의 판결을 뒤집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상소는 이미 2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회답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보통민중이건 공산당원이건 모두 기계적이고 천진하게 공산당이라는 제도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잔혹한 사실은 만일 권력의 편에 붙지 않으면, 혹은 일단 권력의 서클에서 쫓겨나면,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평민백성이건 천광청이건, 아니면 고관을 지낸 천시통이건, 모두 예외는 없다. 일찌기 중공고관을 지낸 천시통이 이처럼 천진스럽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