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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왕라오지 vs 자둬바오

"왕라오지": 광야오와 홍다오의 17년은원록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조탁(趙卓), 왕원(王媛) 

 

2012년 8월 28일 광야오집단의 반년실적보고회가 열렸다. 왕라오지의 대변인인 니이동(倪依東)은 이렇게 말했다: 중산대학 법학원교수, 광동민상법학회회장 저우린빈, 광동지적재산권법학회 부회장 관용홍, 광동지적재산권법학회 부회장 황리핑등 여러 전문가, 변호사들이 공동으로 발표한 법률의견서에 따르면, 왕라오지양차의 저명상표에 특유한 '붉은캔'과 '붉은병'포장의장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광야오집단에 속한다. 자둬바오가 계속 붉은캔포장을 사용하는 것은 광야오집단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고, 엄중한 부정경쟁행위이다. 사건은 현재 상소단계에 있다.

 

이전에 광야오의 "상표강탈" "광고문구강탈" "붉은캔포장강탈"의 "3가지 강탈"행위에 대하여, 자둬바오는 이미 북경제1중급인민법원에 권리침해소송을 제기하여 수리되었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광야오의 붉은캔제품이 자둬바오의 포장의장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누구의 왕라오지" 싸움이 막 끝나자마자, "누구의 붉은캔" 싸움이 다시 양차시장을 뒤집어놓고 있다. 그리고 누가 진정으로 왕라오지 비방을 가지고 있는지도 제대로 말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광야오와 홍다오의 17년합작의 배후에는 어떤 은원이 쌓여 있을까, 누가 누구와 싸우는 것일까?

 

63년전에 둘로 분리되다.

 

진정으로 왕라오지와 자둬바오의 은원을 이해하려면, 그리고 몇몇 세력의 싸움을 이해라려면 청나라 도광연간으로 거슬러올라가 보아야 한다.

 

1828년, 왕라오지양차의 창시자인 왕택방(王澤邦)은 광주십삼행로 정원가에 첫번째 양차점을 연다. 그 후에 제품이 잘 팔리자, 왕택방의 세 아들이 광주에 양차점을 개설한다. 그리고 판매지역을 광동, 광서에서 호남, 강서, 상해까지 확대하고, 나중에는 북경, 하르빈까지 진출한다. 곧이어 동남아각국과 미국까지 진출한다. 왕택방이 죽은 후, 제3대전인은 양차점을 홍콩, 마카오에 개설한다. 그리고 왕라오지 "귤홍저항선호로(橘紅底抗線葫蘆)"의 상표등록을 한다. 이렇게 첫번째로 등록한 화상상표가 된다. 이렇게 왕라오지라는 제품명상표권리가 실제로 왕택방가족이 창립하고 고정하게 된다.

 

1949년, 왕라오지는 둘로 나뉜다. 광저우왕라오지양차는 국유로 귀속된다. 홍콩의 왕라오지는 여전히 왕택방가족의 후손이 경영한다.

광야오가 제공한 공식설명에 따르면, 1956년 공사합영하여, 구가가 매입형식으로 왕라오지의 가업을 인수해서 광저우시 여러개의 백년전통상호중 돋보이는 것이 된다. 1992년, 회사는 백여년간 전승된 양차배합비방을 가지고 독창적으로 팩포장 왕라오지와 캔포장 왕라오지양차를 내놓는다. 이것은 중국내 최초의 양차식물음료이다.

 

이때 국내 왕라오지브랜드를 장악하고 있던 곳은 이미 명칭변경한 "광저우양성약창"이었따. 1997년, 광야오집단이 정식성립되면서, "광저우양성약창"은 광저우의약집단유한공사의 산하로 들어오고, 왕라오지상표도 광야오집단에 귀속된다.

다른 한편으로, 홍콩왕라오지는 전체적으로 가족산업이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1940년대에 제4대전인 왕예강(王豫康)이 6번째 분점을 개설한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홍콩왕라오지는 더욱 중요한 자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타이완, 일본, 마카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카나다등 30여개국가와 지역에 '왕라오지'상표를 등록해놓았다. 현재 회사의 제5대전인인 왕건의(王健儀)는 홍콩과 해외의 상표등록권을 가지고 있다.

 

"왕라오지브랜드는 홍콩에서 발전이 보통이었다. 대륙에서의 발전은 더욱 좋지 않았다. 여러해동안 왕라오지는 광야오에서 성적이 바닥인 제품이었다. 계속 손해보는 제품이었다. 마지막에는 급여조차 지급하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당시의 광저우양성약창은 왕라오지상표의 임대를 결정한다." 당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이다.

 

동시에, 홍콩홍다오집단의 동사장은 홍콩왕라오지의 전인과 잘 알았다. 쌍방은 왕라오지라는 백년브랜드를 크게 키우고 싶었고 바로 의기투합한다. 홍다오집단은 광동으로 간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홍다오집단은 등록자본금이 210만홍콩달러이고, 1990년에 설립된다. 홍다오발전유한공사가 변경된 것이다. 홍콩을 기지로 하여 음료생산과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다.

 

1995년 홍다오집단 산하의 자둬바오집단과 광저우양성약창은 계약을 체결한다. 왕라오지의 최초발전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1999년 자둬바오가 생산한 왕라오지제품이 팔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선순환의 상태로 접어든다. 바로 이 해에, 자둬바오집단은 광동성 동관시 장안진에 거점을 마련하고 첫번째 공장을 짓는다. 2008년까지, 왕라오지는 자둬바오의 손에서 판매액이 이미 140억위안에 이른다.

 

다시 광야오를 보자, 맛이 쓴 편이고, 마케팅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광야오 산하의 왕라오지제품은 시종 결손상태였다. 2004년까지, 광야오는 1.6억위안을 들여 홍콩동흥약업을 왕라오지약업의 전략합작파트너로 삼아 중외합자기업인 "왕라오지약업"을 정식으로 설립한다. 광야오와 동흥약업은 각각 48.0465%를 보유하여 나란히 제1대주주가 된다. 합자회사 동사장은 동흥약업이 동사장 리주저(李祖澤)가 맡는다. 전 왕라오지약업 동사장, 총경리 스샤오빈(施少斌)은 총경리를 맡는다.

 

이제, 광야오와 자둬바오는 신혼밀월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혼전의 서두름과 시간부족으로 쌍방의 많은 합작계약은 완비되지 못했고, 나중에 문제의 씨앗을 남긴다.

 

누가 배후의 조종자인가?

 

홍콩동흥약업을 장악하고 있는 5명의 출자자는 모두 홍콩사업계에서 풍운을 질타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각각, 전국정협 상임위원, 홍콩상장회사북해의 주석인 쉬잔탕(徐展堂): 전국 정협위원, 홍콩동흥약업유한공사 동사장 리주저; 전국정협 상임위원, 화펑국화유한공사 동사장 황광한(黃光漢); 전국정협 상임위원, 홍콩위화백화유한공사 동사장 위궈춘(余國春); 전국인대 대표, 홍콩입법회의원 황이홍(黃宜弘).

 

여러가지 증거를 보면, 동흥약업과 홍다오집단은 관계가 밀접하다. 당시 푸젠 췐저우 스스(石獅)광전망의 보도에 따르면, 2005년 자둬바오는 푸젠 스스시 샹즈진에 공장을 건설하였다. 투자금액은 3000만달러인데, 천홍다오가 이 프로젝트를 시찰할 때 동흥약업의 동사, 주주중 하나인 황광한이 수행했다. 이외에, 동흥약업의 또 다른 주주인 황의홍과 황광한은 모두 푸젠 췐저우 사람이다.

 

그외에 합자회사 설립 2년전인 2002년 9월 5일, 동관동흥음료유한공사라는 기업이 동관공상국에 등록한다. 이 회사는 홍콩계기업이다. 주로 판매하는 제품은 붉은캔 왕라오지였다. 자둬바오와 동흥약업의 관계는 이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해에, 광저우 왕라오지는 여러번 홍콩 왕라오지와 협상을 한 후, 쌍방이 2002년 11월 합의를 이룬다. 양성약업이 홍콩왕라오지상표의 해외사용권을 임차하기로 한다. 쌍방은 10년의 사용권기한을 두었다. 이 기간동안 광주양성약업이 생산한 왕라오지제품은 해외에서 판매할 수 있다. 동시에 양성약업은 판매액의 일정비율로 상표사용료를 받는다.

이것은 나중의 합자회사의 설립과 국내외왕라오지의 대통합에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합자회사설립후, 전 자둬바오 판매부경리,붉은캔 왕라오지의 발전의 공신인 타오잉저(陶應澤)는 판매엘리트를 데리고 이 회사로 온다. 그리고 녹색팩 왕라오지의 시장건설을 도운다. 이때부터 녹색팩 왕라오지의 상품이 정상궤도에 진입한다. 광주약업이 공표한 2009년도 재무제표를 보면, 광저우약업의 모든 순이익중에서 광저우약업 산하의 합자회사인 광저우왕라오지약업주식유한회사의 공헌도가 77%에 달한다. 2011년 녹색팩왕라오지의 판매액은 16.8억위안에 달한다. 금년 전4개월의 판매액은 6.2억위안이다. 전년동기대비 30%가 성장했다.

합자회사설립후, 왕라오지 브랜드를 둘러싸고, 현재 4가지 역량이 다툼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는 광야오집단, 자둬바오집단, 광저우왕라오지에 지분참여한 동흥약업과 홍콩왕라오지이다.

 

당시 동흥약업 동사장 리주저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합자후 매입 혹은 지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홍콩과 해외시장의 또 다른 '왕라오지'브랜드의 상표합작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것은 금후 '왕라오지'는 '통일'을 이루고 장기적으로 광야오 왕라오지가 해외시장을 개발하는데 있어서의 관련문제를 모두 풀기 위함이라고 했다.

리주저는 또한, 동흥약업은 홍콩의 '왕라오지' 제4대전인과 협상을 했고, 현재 상대방은 명확히 합작의사를 표시한다. 동흥도 광야오가 국내의 일부 상표를 매입하이를 원하고,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환난을 함께 하는 것은 쉽지만, 부귀를 함께 하는 것은 어렵다. 서로 사랑하던 부부도 결국 거액의 이익앞에서는 갈라섰다. 왕라오지라는 광동에 치우쳐 있던 브랜드가 전국으로 향하면서 단일제품으로 100억위안을 넘는 판매신화를 이룩하여, 코카콜라 펩시콜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각 당사자들은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천홍다오는 동흥약업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왕라오지약업에 진주한다. 자둬바오가 순조롭게 왕라오지브랜드로 시장을 개척하게 하였을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미래 왕라오지브랜드의 통합과정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원래 묘수였다. 그러나 자둬바오와 광야오간에 짧은 밀월기가 지나자, 붉은캔과 녹색팩의 두 가지 양차의 맛이 비슷해지면서, 채널배치, 판매전략 그리고 소비자가격에서 쌍방은 모두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놓이게 돈다. 갈등은 점점 드러난다. 2008년에 쌍방 직원이 광고를 붙이면서 서로 상대방의 광고를 찢어버리는 일까지 벌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먼저 동흥약업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2007년, 동흥약업의 동사, 주주의 하나인 황광한이 병사한다. 그후 동흥약업이 왕라오지약업에 파견하는 동사 3명중 하나인 쉬잔탕도 2010년 서거한다. 2010년 3월 25일, 해외브랜드권을 장악하고 있던 왕라오지홍콩의 왕건의가 2010년 3월 25일 동흥약업의 동사회에 들어와 동사장을 맡는다. 2011년 1월, 왕라오지약업의 경영진교체후, 왕건의는 동시에 이 회사의 동사장에 오른다.

 

홍콩홍다오집단이 왕라오지의 미래발전을 그린 청사진에서, 더욱 큰 시장은 해외였다. 중국양차를 외구으로 내보내 세계로 향하게 하여, 코카콜라, 펩시콜라등 전통적인 서방음료강자들과 자리를 다투는 것이 왕라오지의 최종목표였다. 사실상, 자둬바오도 해 냈다. 2011년 자둬바오가 생산하는 붉은캔 왕라오지는 판매액이 약 160억위안인데,몇년동안 계속하여 코카콜라를 추월하여 중국내 캔음료의 판매1위를 차지했다.

 

다만, 자둬바오와 광야오의 분쟁, 광야오와 동흥약업의 분쟁은 결국 이 거대한 꿈을 깨트려버린다. 2008년 광야오집단은 홍다오집단과 협의하여, 상표사용료가 너무 맞으므로 국유자산유실의 혐의가 있다고 말한다. 2010년 광야오는 상표라이센스를 회수할 계획을 세운다. 2011년 광야오는 중국국제경제무역중재위원회에 중재를 제기한다; 2012년 5월 9일, '왕라오지' 상표는 광야오집단에 귀속되는 것으로 판정한다.

 

홍콩왕라오지의 제5대전인인 왕건의는 자둬바오편에 섰다. 왕건의에 따르면, 2004년 합자때, 쌍방은 국내외의 왕라오지상표를 합자후의 왕라오지약업에 넣기로 했고, 동흥약업도 이미 광야오집단의 서면약속을 받았다. 국내의 왕라오지상표를 왕라오지합자기업으로 넘겨야 하는데, 6년이 지났지만, 상표양도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외에, 금년 3월, 왕야오집단은 왕라오지약업이 바이윈산양차를 대리판매한다고 선포한다. 동흥약업은 이에 대하여 항의한다. 왕라오지약업의 양대주주의 투쟁은 직접적으로 상표통제권에서 채널자원의 쟁탈전으로 발전한다. 왕건의는 왕라오지양차의 시장판매는 현재 상승단계이다. 그리고 아직도 발전공간이 많다. 이때 다른 양차제품을 판매대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왕라오지합자기업의 정관이나 경영목적에도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왕라오지약업 동사장 왕건의는 왕라오지의 전인이다. 그가 자둬바오를 극력 지지한다. 왕라오지의 배합비방을 자둬바오에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해외경영권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광야오집단의 동사회비서인 팡젠휘는 "이 일은 너무 불가사의하다. 분명히 이쪽 사람인데, 상대방을 지지한다."

왕건의가 이렇게 한 동기에 대하여, 팡젠휘는 추측하기 껄끄럽다도 말한다.

다만, 광야오에 대한 돌연한 변화는 최종적으로 결별을 맞이한다. 아마도 여기에는 암중으로 제5의 세력이 작용하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2011년 광야오 녹색팩왕라오지의 판매액은 16.8억위안이다. 이는 붉은캔 왕라오지의 득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광야오는 이미 2011년에 100대 중국의약공업기업중 1위에 오른다. 처음에 광야오는 왕라오지 브랜드를 회수하여 완전히 자기가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면 시간도 들고 힘도 들며,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성패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나중에 모종 원인으로, 광야오는 중재를 제기하고, 결국 승리를 거둔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이 배후에는 도 다른 세력의 그림자와 작용이 있다고." 내부를 잘 아는 인사의 말이다.

 

누구의 붉은캔인가?

 

왕라오지상표쟁탈전이 끝나자마자. "누구의 붉은캔인가?"의 분쟁이 일어난다.

자둬바오집단 법률고문을 맡고 있는 베이징 룽안(隆安)율사사무소의 송위보(宋宇博) 변호사는 붉은캔양차포장은 자둬바오 회사가 스스로 설계하고 가장 먼저 사용했다. 일찌기 1995년에 붉은캔포장을 설계해서 내놓았다. 그리고 붉은캔양차를 생산경영하기 시작한다.

1996년 외관특허를 신청했고, 1997년 특허증서를 받았다.

 

송위보에 따르면, 법률규저에 따르면, 외관특허의 유효기간은 단지 1년이지만, 붉은캔양차는 자둬바오가 창조하고 경영하여 저명상표로 만들었다. 저명상표 특유의 포장, 외관은 설계자와 우선사용자의 것이다. 저명상품의 특유한 포장, 외관은 저명상품과 분리할 수 없다. 상표와 불가분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둬바오의 붉은캔포장외관은 <반부정당경쟁법>의 보호를 받는다. 국가공상행정총국의 1995년 제33호 국장령으로 반포실시된 <저명상품특유의 명칭, 포장, 외관을 모방하는 부정경쟁행위를 금지하는데 관한 약간규정>의 제4조 관련규정에 따르면, 붉은캔을 창조하고 최초사용한 자둬바오는 논쟁의 여지없이 붉은캔외관권리를 가지고 있다. 여하한 다른 기업이나 개인은 유사한 붉은캔 포장을 쓸 수 없고 쓰게 되면 권리침해이다.

 

"결혼도 황급히 했지만, 이혼도 서둘렀다. 그러다보니 혼전과 혼인중의 재산을 분배하기 어렵게되었다." 광야오와 자둬바오는 각자 할 말이 있다. 베이징 인레이(銀雷)율사사무소의 레이하이쥔 변호사의 말이다.

 

이 사건에 관하여, 레이하이쥔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쌍방이 모두 법률근거가 있는 소송이다. 만일 북경에서 재판하면, 북경중급법원은 반드시 최고인민법원의 의견을 알아볼 것이다. 요 몇년동안 최고인민법원이 유사한 사건을 처리한 태도 및 최고인민법원 연구실의 발표글에서 보이는 최고인민법원의 태도는 제품포장은 제품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즉, 자둬바오가 붉은캔포장외관의 권리를 보유할 가능성이 높다.

 

만일 광저우에서 소송을 하면, 반드시 광동성고급인민법원의 의견을 고려해야 한다. 이전에 광동성고급인민법원은 판결을 낸 바 있다. (2003)월고급민삼종자제212호 판결이다. 여기에서 여러번에 걸쳐 제품의 포장권과 상표의 표지는 제품포장이 상표를 따라간다고 하였다. 즉, 왕라오지상표를 보유한 광야오집단이 승소할 가능성이 크다.

 

이 미묘한 국면에 대하여, 자둬바오는 이전에 상표중재과정에서 자둬바오는 이미'절차불법'등 불공정대우를 받았다. 베이징룽안율사사무소의 주좡이 율사는 "사법공정을 잘 체현하기 위하여, 이 사건은 광저우 이외의 제3의 법원에서 공정하게 심리하여야 한다. 사건심리가 정부간섭을 받는 요소를 피해야 한다. 우리는 강력하게 제3의 장소에서 심리할 것을 요구했다."

 

누가 비방을 가지고 있는가?

 

똑같은 붉은캔포장, 똑같은 "물, 백사탕, 선초, 계단화,포사엽, 국화, 금은화, 하고초, 감초"의 배합방법에 심지어 배합순서도 같다. 두 양차의 배합은 원료와 비율이 대체로 같다.

 

하나의 캔 위에 "양차시도왕라오지. 백년전승. 1928년창시"라고 쓰여 있고, 다른 하나에는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대표작", "왕택방전승배합비법을 독점사용"이라고 적혀 있다. 왕라오지의 진정한 배합비법은 누가 보유하고 있는가? 누가 진정한 왕라오지인가?

 

홍콩왕라오지를 잘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광야오의 수중에는 진정한 왕라오지 비법이 없다. 건국후 국영약창이 확실히 왕라오지의 산업을 접수했지만, 그저 점포등 재산만 가져갔다. 그리고 그후 '파사구(破四舊)', 문화대혁명의 파괴로 전승해내려온 것은 더욱 적어진다.

 

진정 왕라오지비법은 홍콩으로 가져갔다. 왕씨가족의 매 세대 전인은 이 신비의 배합비법을 보호했다. "당시 광야오와 자둬바오의 합작시, 이 비방을 보관한 사람을 우리는 '타아이(음역)'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70여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인사에 따르면 광야오의 녹색팩 왕라오지는 맛을 자둬바오에서 생산하는 붉은캔양차에 맞추어 조정했다고 한다.

자둬바오의 기자회견에서, 품질관리 총경리인 팡전궈(龐振國)은 "자둬바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으로 '양차창시장' 왕택방 선생의 조전비방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왕건의는 이전에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다. 왕라오지브랜드를 녹두죽등 기타 유형의 제품에 쓰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양차만 하라"는 조상의 유훈에 벗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상의 유훈을 지키기 위하여, 나는 조상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비방을 자둬바오집단에 독점적으로 전수했다" 자둬바오가 생산하는 양차는 독점수권을 받은 조전배합비법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광야오집단의 부총경리, 왕라오지상표 대변인 니이동은 이렇게 말한다. "건국전의 배합비법은 왕라오지약점에 속했고, 공사합영후, 광야오는 왕라오지약창이 승계했으며, 왕라오지양차의 배합비법과 공법은 광야오박물관에 계속 보관되어 있었다. 자둬바오와 왕건의의 수중에는 배합비법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만 광야오에는 왕라오지 배합비법이 있다."

 

"당시 국가는 왕라오지 브랜드를 광야오에 넘기면서, 상표와 배합비법을 한꺼번에 광야오에 주었다.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정종의 왕라오지배합비버은 계속 광야오에 있었다. 왕건의측은 당시 왕씨집안의 후인들이 일부분 배합비법을 가지고 홍콩에서 사업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배합비법의 전부가 아니다." 광저우왕라오지대건강산업유한공사 공관경리 왕전싱은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최초에 광야오에서 기자인터뷰를 할 때는 이렇게 말했다는 점이다: "양차배합비법은 특허도 아니고, 비방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중에 말을 바꾸어 광야오가 왕라오지의 '배합비법'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비물질문화유산신청을 했다고 하였다.

 

누가 더 멀리 갈 것인가?

 

중투고문 식품업종연구원 양밍쉔은 이렇게 말한다. 미래 중국의 양차시장의 용량은 현재의 5배일 것이다. 현재 중국의 양차시장은 여전히 자둬바오가 독보적으로 크고, 허치정(和其正)이 2위이다. '홍록지쟁'이 계속 발효하면서, 미래의 양차시장의 국면은 아마 타파될 것이다.

 

광야오집단의 총경리 리추웬은 2015년에 '대건강산업' 규모를 500억위안까지 달성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집단은 2012년에 통합상장을 하고자 하며, 2015년에 판매수입 600억위안을 이룩하여, 광야오집단을 중국의 전략적 선두기업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어떤 전문가는 광야오의 전환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한다. 전통양차배합비법중 본초식물은 통제가 가장 어렵다. 양밍쉔에 따르면 광야오판 왕라오지의 첫째 은환(隱患)은 자체 생산라인이 제품생산의 수요에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붉은캔 왕라오지의 대부분을 OEM으로 생산한다. OEM공장은 수준이 들쭉날쭉이다. 광야오의 전체 제품에 품질리스크를 가져올 것이다.

 

둘째 은환은 의약업종 애널리스트닌 벤천광의 분석이다. 국유메커니즘의 문제로 신속하게 자유시장경제모델에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이 광야오를 괴롭히고 있다. 광야오의 의사결정과 집행능력이 모두 문제된다. 자둬바오는 매년 판매액이 이미 180억위안에 달했는데, 이와 비교하자면, 광야오 자회사인 판가오셔우(潘高壽)식품음료유한공사가 운영하는 판가오셔우양차의 2011년 판매액은 겨우 2000만위안이다.

 

광저우왕라오지대건강산업유한공사의 공관경리 왕전싱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 대건강이 붉은캔양차의 생산,판매를 책임지고 있다. 이전에 합자회사가 녹색팩의 생산,판매를 책임졌다. 미래에 합칠 것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광야오 산하의 양차브랜드는 이미 왕라오지, 판가오셔우, 바이윈산(白雲山), 상칭인(上淸飮)과 싱췬샤상쥐(星群夏桑菊)등 양차음료가 있다. 바이윈산양차는 광야오집단 산하의 바이윈산과 황중야오가 내놓는다. 공식수치에 따르면, 바이윈산양차는 2010년 판매규모가 이미 55만상자에 달했다. 바이윈산양차는 2011년초에 전면적으로 왕라오지양차의 판매채널에 들어왔다. 왕라오지약업 총대리상는 바이윈산양차가 매년 100%의 속도로 증가할 것을 보장했다고 한다.

 

벤천광은  광야오지반이 "먼저 아들이 있고, 다음에 부친이 있다"는 역사적 연고를 얘기한다. 그래서 집단의 자회사에 대한 통제력이 크지 않다. 주브랜드가 강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복수브랜드양차를 공동으로 내놓은 것은 광야오의 내부를 동업경쟁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합자당사자인 동흥약업이 강렬하게 반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셋째 은환은 쌍방이 2002년 홍콩왕라오지와 체결한 계약이다. 홍콩왕라오지상표의 해외사용권을 10년간 '임대'했는데, 2012년이 만기이다. 광야오는 홍콩왕라오지와 싸움을 선택했고, 그후 왕라오지의 해외발전은 순조로울 수 없을 것이다. 양밍쉔은 먼저 왕라오지가 이미 여러 국가에 판매하였고, 그중 중앙아시아가 많았다. 그러나, '왕라오지'상표를 광야오가 빼앗아가면서, 자둬바오의 국제화 발걸음도 늦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하여 광야오집단의 동사회비서 팡젠휘는 현재는 국내시장부분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니이동은 그러나 광야오라오지는 해외에도 등록했고, 해외시장판매도 빨리 추진하겠다고 밝힌다.

 

쌍방의 오래끄는 소송분쟁과 관련하여, 레이하이쥔은 소송이 어떻게 되든지간에 상대방을 일거에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다. 소송외의 채널건설과 품질보증이 더욱 중요한 관건이다. 현재 두 붉은캔양차는 입맛이 같지 않다. 생산공법도 다르다. 하나는 코카콜라의 농축즙을 캔입하는 방식으로 생산하고, 하나는 끓이는 방식으로 생산한다. "마지막에는 소비자들이 어느 입맛을 더 좋아하느냐에 달렸고, 누구의 채널이 더욱 빨리 더욱 튼튼하게 자리잡느냐에 달렸다."

 

현재, 베이징, 광저우의 대형수퍼중에 두 가지 붉은캔 양차가 모두 판매된다. 다만 산시등 지역에는 자둬바오의 붉은캔 양차와 왕라오지의 녹색팩만이 판매된다. 광야오에 있어서, 요 몇개월의 제품보급과 판매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를 놓쳐버리면 북쪽은 겨울이 되고, 양차의 판매량은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야오판 왕라오지에게 불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