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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서예

천하제일행서 난정서(蘭亭序)를 둘러싼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8. 7. 31.

글: 중화유산 2007년 9월호

 

절강성 신창(新昌)과 승주(州)의 접경지역에 왕한령(王罕嶺)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산 위에는 각각 외만(外灣)과 이만(裏灣)이라고 부르는 두 개의 작은 마을이 있고, 10여호가 조용하고 담백하게 살아가고 있다. 두 마을의 사이에는 아주 작은 "면우만댐(眠牛灣水庫)"이 있다. 댐의 곁에는 푸른 산이 줄지어 서 있어, 경치가 아주 뛰어나다. 그러나, 1년중 대부분의 기간동안, 이곳은 그 이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고, 늙은 소가 누워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같다. 그러나, 신창현의 한 중학교 교사인 원백초(袁伯初)에게 있어서, 이곳은 천고의 수수께끼를 숨기고 있는 곳이다. 이 수수께끼는 그를 여러번 다시 찾아와서 살펴보게 만들었다. 시간이 오래되다보니, 마을 사람들도 안경을 끼고 작은 배낭을 짊어진 중년남자를 모두 알아보게 되었다.

 

난정(蘭亭)의 모임

 

왕희지(王羲之)라는 이 서성(書聖)의 생애는 사서에 별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소집했던 난정의 집회는 천백년이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왕희지가 즉흥적으로 창작해서 기록한 이번 성회의 <<난정집서(蘭亭集序)>>는 문학사상의 불후의 명작일 뿐아니라, 중국서예사상 누구도 뛰어넘지 못할 최고봉이다.

 

동진 영화9년(353년), 음력 삼월 삼일, 날씨는 맑았고, 바람은 화창하게 불었다. 왕희지와 친구들은 수계(修)활동을 했고, 장소는 회계(會稽) 경내의 난정으로 정했다. 소위 "수계"라는 것은 고대의 일종의 더러운 것을 없애기 위한 제사활동이었다. 일반적으로 음력 삼월 삼일 봄볕이 따스할 때, 물가에서 한편으로는 신에게 제사지내면서 사람들이 물에 손발을 씻는 것으로, 사악하고 불길한 것들을 씻어내는 활동이다. 이 의식은 서주(西周)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점차 최초의 제사활동에서 봄놀이, 음주부시의 답청활동으로 변모했다.

 

난정에 참가한 사람은 당나라때 하연지의 <<난정기>>의 기록에 따르면, 사안(謝安), 손작(孫綽), 지둔(支遁)...그리고 왕희지의 세 아들등 합계 41명이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시와 글을 지었다. 마지막에 술기운이 조금 오른 왕희지가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왕희지는 가볍게 서수필(鼠鬚筆)을 들고, 잠견지(蠶繭紙)를 펼쳤다. 그가 가장 장기로 삼는 중봉행해(中鋒行楷)로 28행, 324자에 달하는 글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이 짧은 글에서, 왕희지는 난정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묘사했을 뿐아니라, 친구들이 함께만난 즐거움도 묘사했고, 동시에 인생의 고통과 짧음, 노는 것의 즐거움등의 생각을 읊었다. 문장은 깊이가 있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서예의 기법은 아름다우면서 힘이 있고, 변화가 무쌍했다. 20여개에 이르는 갈지자(之)는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양이 없었고, 마치 신령이 도운 것같았다. 나중에 왕희지는 <<난정집서>>를 수십번 새로 썼다고 하는데, 모두 원본만 같지 못하다고 자탄했다고 한다.

 

난정집회가 있은 지 2년후에, 왕희지는 그가 <<난정집서>>에서 밝힌 포부를 실현한다. 즉, 관직을 물러나서, 가족을 데리고 전원에 은거한다. 그가 어디로 은거했는가? <<진서>>에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이것도 역사상 해결되지 않은 의문으로 남았다. 본문의 첫머리에서 언급한 원백초 선생은 바로 이 의문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의 하나이다.

 

자연히, "천하제일행서"라는 명칭을 얻은 <<난정집서>>의 원본은 처음에는 왕희지를 따라 시끄러운 묘당을 벗어나서 조용한 수양지로 왔다. 그렇다면, 그것과 그 주인은 도대체 어디로 갔던 것일까?

 

금정(金庭)의 변(辯)

 

<<낭야왕씨종보>>에 기록된 비문이 하나 있다. <<석고산왕우군사당비문>>인데, 비문에서는 "왕우군이 엄령(嶺)에 금정도원(金庭道院)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금정산"은 절강성 승주에 있다. 지금의 승주 금정진 후엄촌에 금정관(金庭觀)이라는 도관이 있는데, 아주 웅장하다. 위치가 평탄한 골짜기여서 도로가 문앞을 지나가고, 편리한 교통으로 많은 서예애호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서예가들은 성지순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찾아온다. 다만, 이곳이 왕희지가 만년에 수련하던 바로 그 금정인가? 이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당나라때 배통(裴通)이라는 도사가 있었다. 808년 삼월의 어느 날, 몇몇 도사들과 함께 금정동천을 유람한다. 그리고는 시찰보고서와 같은 글을 남긴다. 그중에는 소향로봉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왕희지의 집이 이 산에 있었고, 서루묵지(書樓墨池)가 옛날에 만든대로 남아 있다"고 적었다. 당나라때의 이백(李白)이 "입섬심왕허(入剡尋王許)"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는 바로 왕희지의 유적을 찾아갔다는 말일 것이다. 송나라때의 고사손은 <<섬록>>에서 "관(觀)의 동쪽으로 십오리를 가면 대호산이 있는데, 봉우리의 기세가 하늘을 치속고, 위에는 적수단지(赤水丹池)가 있는데, 옛날에 왕우군(왕희지)의 집이다..."

 

이렇게 하여 "적수단지"는 왕희지 옛집의 대명사가 되었다. 연대가 오래되었으므로, 연못의 물은 이미 말랐다. "적수단지"의 독특한 풍경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 몇년 전에 이 일대를 고찰하던 원백초는 면우만댐에서 중대한 발견을 하게 된다. 1979년 만들어진 면우만댐은 바로 역사상 기록된 적수(赤水)가 흘러나오는 산간을 메워서 이루어진 것이다. 댐에는 물이 나오는 함동(涵洞)이 있다. 원백초는 바로 함동의 입구에 연결된 도랑에서 발견하였는데, 도랑에서는 물이 흐르면서 붉은 색의 때가 침전되어 있었다. 댐을 관리하는 농민에 따르면, 댐이 물을 방류한 후에는 댐 아래가 빨간색으로 물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댐에서 멀지 않은 이만촌에는 옛사원유적지가 있다. 유적지에는 대량의 부서진 기와가 있는데, 곁에는 천년고백(古柏)과 고삼(古杉)이 있다. 촌민들은 이곳이 바로 왕희지가 은거했던 금정도원의 소재지라고 한다.

 

왕희지의 집이 신창의 왕한령인가, 아니면 승주의 금정관인가? 현재 학술계에는 아직 정설이 확립되지 않았다. 현재의 사료를 보면, 왕희지가 은거한 곳은 금정으로 도가의 제이십칠동천이라고 한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천사도(天師道)를 독실하게 믿었던, 왕희지는 만년에 두 현의 접경지역에 있는 이 몇개의 산 속에서 수련을 했고, 연단을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희지 본인이 자랑스러워했던 그 작품인 <<난정집서>>는 주인을 따라 그가 59세로 인생을 마칠 때까지 함께 했을 것이다. 왕한령 향로봉 일대에는 큰 산이 연이어져 있고, 계곡물이 곳곳에 흐르며, 나무의 그늘이 우거져 있다. 그러나, 선에 사는 주민들은 그 조용함을 즐기기보다는 속속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있다. 아마도 왕희지와 같이 탈속한 사람들만이 "천하제일행서"와 같은 신품만이 천지조화와 하나가 되어 청심자수(淸心自守)할 수 있는 것일까?

 

일맥전승

 

왕희지가 죽은 후, <<난정집서>>의 행방은 또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왕희지에게는 7남1녀가 있었는데, 도대체 누가 이 작품을 보관하는 책임을 맡았을까? 역사는 이때부터 모호해진다. 7대손인 지영(智永)화상에 이르서야 <<난정집서>>의 행방이 다시 연결된다.

 

장언원의 <<법서요록>>에 기록된 당나라때 하연지의 <<난정기>>에 따르면, <<난정집서>>는 완성된 후, 왕희지 자신이 아주 아꼈고, 이것을 그의 자손에게 대대로 전해주기로 결정한다. 왕희지의 7대손인 지영은 조카인 왕효빈(王孝賓, 법명은 혜흔)과 함께 출가하고, 왕희지의 의발을 이어받아 서법을 깊이 연구한다. 항상 거주하고 있던 영흔사의 각에 <<난정집서>>를 임모하여 쓴다. 30년간 그는 버린 붓만 다섯 록()에 이를 정도인데, 1록의 용량은 모두 1석(石)이상이다. 지영은 일찌기 진초 두가지 서체로 <<천자문>>을 팔백여본 남긴 바 있고, 절동지역의 각 사원에 보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글은 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이 막 승려가 되었을 때, 모두 회계의 가상사에 머물렀다. 가상사는 옛날 왕희지의 집이라고 한다. 나중에 왕희지의 성묘에 편리하도록, 영흔사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희지의 묘도 산음현 의 서쪽으로 삼십일리 떨어진 난저산의 아래로 옮겼다. 불교에 독실했던 양무제 소연은 지영, 혜흔의 숙질 두 사람이 모두 승려가 되자, 두 사람의 법호를 따라 절의 이름을 영흔사로 해준 것이다. 하연지의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때까지, 옛날 지영이 글을 베껴쓴 각루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영선사는 백세까지 살았다. 죽을 때, <<난정집서>>를 제자인 변재(辯才)에게 남긴다. 변재의 속세성은 원(袁)씨이다. 양나라때 사공(司空)인 원앙(袁昻)의 현손(玄孫)이다. 그는 박학다식했고, 금기서화를 모두 잘했다. <<난정집서>>를 얻은 후에 아주 아꼈고, 숨겨두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자기가 거주하는 방의 서까래 위에 구멍을 파서 <<난정집서>>를 보관했다. <<난정집서>>를 아끼는 것이 지영선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당나라초기, 영명한 당태종은 남조의 선비문화를 숭배했다. 특히 왕희지의 서법을 좋아했다. 그는 조서를 내려, 모든 왕희지의 작품을 끌어모았다. 오직 <<난정집서>>만 얻지 못했다. 얼마후, 당태종은 <<난정집서>>를 변재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어든다. 그리하여 변재에게 <<난정집서>>를 바치라고 명한다. 그러나, 변재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가 젊어서 지영선사를 모셨을 때 확실히 <<난정집서>>를 본 적은 있으나, 이미 수십년의 전란을 겪어서 오래전에 행방을 모른다고 버텼다. 당태종은 강제로 빼앗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주 희극적인 색채가 강한 "소익이 난정을 얻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운문유적(雲門遺迹)

 

병가출신인 당태종은 "만일 지략이 있는 자를 얻어서 계략으로 이를 얻는다면 가능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그의 지혜주머니, 상서좌복야 방현령에게 물어본다. 방현령은 감찰어사 소익을 추천한다. 그가 "재주가 있고, 권모술수에 뛰어나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태종은 소익을 부른다. 소익은 공공연히 갔다가는 분명히 <<난정집서>>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혜로 얻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당태종에게 몇 개의 왕희지와 왕헌지(王獻之)의 잡첩(雜帖)을 달라고 하여 준비해간다. 이후 소익은 서생으로 변장하고, 소매넓은 황삼을 걸치고, 낙양에서 상선을 타고 절강으로 간다. 그리고 변재가 머무는 영흔사에 도착한다.

 

영흔사의 지리적 위치는 사서에 그저 회계라고만 되어 있다. 유적지는 일찌감치 사라졌다. 그저 보일듯 말듯한 단서만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송나라때 상세창(桑世昌)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소익의 두 시를 기록해 두었는데, 하나는 "숙운문동객원(宿雲門東客院)"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느는 "유제운문(留題雲門)"이라는 것이다. "운문"이라는 이곳은 바로 영흔사가 소재하는 지역이다. 시가의 내용으로 봐서, 그 때의 운문은 교통이 불편하고, 지세가 험준하며 사방에서 원숭이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현재 소흥에서 십여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아주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름이 아주 재미있다. 즉, 사전촌(寺前村)이다. 만일 차를 타고 간다면, 마을은 멀리서도 보이나, 사원은 보이지 않는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만, 현재 촌민들이 지은 콘크리트집의 뒤로 크지 않은 사원이 하나 놓여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산문에는 큰 글자가 눈에 띈다. "운문고찰(雲門古刹)"

 

현지의 기록에 따르면, 운문사는 원래 왕헌지의 주택이었다. 나중에 절로 고친다. 육유(陸遊)가 젊었을 때, 이곳의 "운문초당"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그는 이곳의 성황을 아주 생동감있게 묘사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당송시대에 운문사의 규모는 매우 컸다. 참관하고 유람하는 사람이 몇 시간을 들여야 다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주 길을 잃어 헤메면서 출구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원의 정전을 막 수리했고, 규모가 크지 않으므로, 전체 사묘에는 나이든 여승 한 명이 지키고 있다. 이곳은 아주 적막하고, 절의 곁에는 차가운 물이 나오는 우물이 하나 있다. 절설에 따르면, 왕헌지의 세연지(洗硯池, 벼루를 씻는 못)이다. 현재 절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은 당나라때의 석두수정권(石頭水井圈)이다. 늙은 여승은 이것을 각루위에 숨겨두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사전촌에는 지영화상의 "퇴필총(退筆塚, 다쓴 붓을 묻은 무덤)"과 "변재탑(辯才塔)"이 있다고 한다. 만일 이런 것이 사실이라면, 이곳이 바로 소익이 난정을 얻은 이야기가 벌어진 무대일 것이다.

 

소익이 난정을 얻다

 

소익이 절에 도착한 후, 절안의 벽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하여 고의로 변재의 주의를 끌고, 자신의 재능을 드러낸다. 그리고 변재와 함께 바둑을 두고, 금을 연주하며, 투호의 오락을 즐기며, 중간에 문사를 논한다. 변재는 그를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소익을 절에 머무르게 해준다. 이후 소익은 다시 여러번 술을 가지고 가서 변재와 함께 마시고 노래했다. 하루는 소익이 고의로 변재에게 자기가 그린 <<직공도(職貢圖)>>를 보여준다. 변재는 감탄해마지 않는다. 그리고 서예에 대하여 이야기를 이어간다. 소익은 자기는 집안대대로 이왕(二王, 왕희지, 왕헌지 부자)의 서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비록 바깥에 나와 있지만, 이왕의 작품 몇 개는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변재가 이 말을 듣자, 소익에게 이왕의 서예작품을 보여달라고 한다. 다음 날, 소익은 약속대로 이왕의 작품을 들고 가서 변재에게 보여준다. 변재는 작품을 감상한 후, 이것이 함정인줄 모르고, 흥분하여 소장하고 있던 <<난정집서>>를 꺼내어 보여준다. 소익은 속으로 기뻤지만, 겉으로는 그것이 아무래도 탁본인 것같고 진품이 아닌 것같다고 말한다. 변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진품인지 여부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다. 다시는 예전처럼 그렇게 꼭꼭 숨겨두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난정집서>>의 글씨를 그냥 탁자위에 놔두기도 하였다. 소익이 가져온 서예작품과 함께 섞여있기도 하였다.

 

소익은 자주 절을 찾아왔으므로, 변재와 관계가 가까워졌고, 절 안에 있는 다른 승려들도 경계를 게을리 했다. 하루는 변재가 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가서 법사를 하게 되었다. 소익은 이 기회를 틈타 절로 들어가서, 변재의 제자에게는 변재의 방안에 물건을 두고 왔다고 말한다. 동자승은 문을 열어주었다. 소익은 이 기회에 <<난정집서>>와 당태종에게서 빌려온 이왕의 서첩을 함께 들고나온다. 변재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소익이 <<난정집서>>를 들고 경사로 되돌아간 다음이었다.

 

당태종은 <<난정집서>>를 얻고 아주 기뻐한다. 방현령과 소익 두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린다. 당태종은 처음에 변재가 <<난정집서>>를 내놓지 않은데 화를 내고 벌을 주려고 생각했으나, 변재의 나이가 이미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별도로 처벌하지는 않았다. 수개월후, 변재에게 후한 상을 내린다. 그러나 변재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불탑을 만드는데,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다. 변재는 <<난정집서>.를 사기당한 후, 병이 들어 일년여만에 세상을 떠난다.

 

하연지가 기록한 이 이야기는 극적이다. <<난정기>>에서 하연지는 그가 기록한 이 이야기가 근거있는 것이라고 적었다. 즉, 변재의 제자인 현소(玄素)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소설과도 같은 기록은 원래 믿을 바가 못된다. 상세창의 <<난정고>>에서는 <<난정집서>>의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 남조의 양나라 말년에 천하대란이 일어난다. <<난정집서>>는 궁중에서 흘러나와, 진(陳)나라 승려가 얻는다. 그는 진선제(陳宣帝)에게 이를 바친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자, 누군가가 이를 다시 진왕 양광(楊廣)에게 헌상한다. 양광은 이를 중시여기지 않았다. 나중에 승려인 지과(智果)가 양광에게 이것을 빌려서 임모를 한다. 양광은 즉위한 후에도 <<난정집서>>를 되돌려받지 않는다. 지과가 죽은 후, 그의 제자인 승언(僧言)이 이를 가진다. 당태종이 진왕으로 있을 때, <<난정집서>>의 탁본을 보고는 아주 아낀다. 높은 값으로 사려고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변재가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구양순을 월주로 보내어 이를 달라고 하여 얻는다. 무덕4년, <<난정집서>>는 진왕부에 들어온다. 정관10년, 당태종은 탁본을 10본 만들어 가까운 신하들에게 돌린다. 당태종이 죽자, 중서령 저수량은 <<난정집서>>는 선왕이 아끼던 것이니, 원본을 소릉(당태종릉)에 넣자고 한다. 이 기록은 상대적으로 진실에 가깝다고 본다. 당태종이 제왕의 신분으로, 사기의 방식으로 <<난정집서>>를 얻었을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상세창은 <<난정고>>에서 <<남부신서>>를 인용하여, "무덕4년, 진왕의 노비 구양순이 거짓으로 구하여 얻었다. 그리하여 진왕부에 들어갔다. 마도숭이 2본을 탁본하여, 하나는 변재에게 주고, 하나는 왕이 가졌다. 나중에 저수량이 청하여 소릉에 묻는다" 송나라때의 강기도 이에 관하여 논하면서, 후자의 주장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였다.

 

역진역환(亦眞亦幻)

 

전설에 따르면 당태종은 <<난정집서>>원본을 얻은 후에 아주 아꼈고, 탁서인인 조모(趙模), 한도정(韓道政), 풍승소(馮承素), 제갈정(諸葛貞)등 4명에게 여러 본을 탁본하게 한 후, 황태자, 제왕, 근신에 나누어 주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난정집서>>는 풍승소가 임모한 본이라고 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우세남과 저수량이 임모한 <<난정집서>>가 있다.

 

"소익이 난정을 얻다"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상식에 어긋난다. 당태종시기에 저명한 화가인 염입본이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을 정말 염입본이 그렸는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소익을 보내어 난정을 속여빼앗은 이야기는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은 것인데, 당태종이 그림까지 그려서 남기도록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난정집서>>는 당태종이 죽은 후에 다시 무수한 수수께끼를 남긴다.

 

먼저, <<난정서>>진본의 향방이다. 당나라때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난정서>>진본은 당태종이 죽은 후에 소릉에 묻어버렸다. 하연지의 <<난정기>>에는 당태종이 죽기 전에 당고종에게 그가 아끼던 <<난정서>>원본을 같이 묻어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이 나온다.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당고종은 저수량의 건의를 듣고, <<난정서>>원본을 소릉에 묻었다고 한다. 송나라때의 주월도 같은 견해였다.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를 불문하고, 어쨌든 <<난정서>>원본은 소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당나라때 위술도 <<집현기>>에서 <<난정서>>가 이미 소릉에 들어갔다고 적고 있다.

 

당나라말기에 관중에 할거하던 군벌 온도(溫韜)는 당나라때 여러 황릉을 도굴한 바 있다. 그중에는 소릉도 포함된다. <<구오대사. 온도전>>에 따르면, 당시 온도는 당태종의 소릉을 연 후에, 부장된 진귀한 보물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유명한 <<난정집서>>원본도 포함되어 있다.

 

오대이후, <<난정집서>>원본은 다시 행방이 묘연해진다. 상세창의 <<난정고>>는 송나라때 장순민의 <<화만집>>을 인용하여, 송신종 원풍말년에 어떤 사람이 절강에서 <<난정집서>>와 전설상의 직녀지기석(織女支機石)을 함께 들고 송신종에게 바치려고 경사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태강현에 이르러, 송신종이 사망하자, 바칠 수가 없어서, 민간에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렸다는 것이다. 이후에 소식이 묘연하다. 이 이야기는 그저 전설일 뿐이다.

 

당나라이후 전해지는 임모본 중에서, 구양순이 임모했다는 것이 가장 진짜에 가깝다. 나중에 구양순의 임모본을 정무군(지금의 하북성 정정)에서 탁본한다. 나중에 이것을 "정무난정(定武蘭亭)"이라고 부른다. 송나라이후, 정무난정은 세상에서 진귀하게 취급되고, 대대로 이어지면서 임모되고 새겨진다. 정무본 난정각석의 원석은 북송말년의 전란중에 이미 소실되어 버린다.

 

1960년대, 유명한 <<난정>>의 진위논쟁이 벌어진다. 논쟁의 쌍방중 일방은 곽말약 선생을 대표로 하는데, 전해지는 <<난정집서>>는 모두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몇 가지 근거를 내놓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남경에서 출토된 왕흥지 묘지문과 왕민지 묘지문이다. 그 서체는 세상에 전해지는 이왕서법 및 다른 동진 남조 소대부의 서법과 전혀 달랐다. 그리하여 전래되어온 <<난정집서>>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고, 후세인들의 위작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곽말약 선생의 관점은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한위(漢魏) 이래의 사대부 척독(尺牘)서찰의 서법은 오랫동안 소위 비명의 서체와 동시에 사용되었고, 중국서법예술의 신천지를 개척한 것은 바로 사대부서예가들이기 때문이다. 사대부문인의 척독서법과 하층의 글쓰는 자들의 묘비명서예는 섞어서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왕희지와 다른 동진사대부들의 저낼되는 서예는 바로 이 척독위주이다.

 

<<난정집서>>가 중국서예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이라면, 바로 중국서예예술의 최고봉의 심미적 표준을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즉, 기운이 중화아정(中和雅正)하고, 산담간원(散淡簡遠)하며, 기법이 궁미측묘(窮微測妙)하고, 추이무궁(推移無窮)하다. 그의 기복이 심한 신세내력은 더 많은 전설적인 색채를 더해주고 있다. 비록 오늘날 그 원본의 풍모를 엿볼 수는 없지만, 고궁박물원에 들어가서 저명한 풍승소가 임모한 <<난정집서>>를 바라보면, 그래도 주위에서 진짜인지 환상인지, 하늘이 인간의 손을 빌어 만든 것같은 신기한 매력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