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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보샤트: 장정에 참가한 영국인 선교사

by 중은우시 2010. 1. 29.

글: 위수춘(魏秀春)

 

홍군(紅軍)의 기나긴 장정의 길에, 보샤트(勃沙特, Rudolf Alfred Bosshardt Piaget)라는 서양선교사가 따라갔다. 그는 홍군의 종군신부도 아니었지만, 홍군장정의 특수한 참가자였다. 홍군을 떠난 후, 그는 자신이 홍군에서 겪었던 일을 다큐멘터리로 엮은 책 <<신령의 손(The Restraining Hand - Captivity for Christ in China)>>를 펴냈다.

 

보샤트는 1897년에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사간다. 보샤트는 중국전통문화를 좋아했으며, 그의 중국이름 "박복례(薄復禮)"는 공자의 명언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왔다. 1922년, 그는 영국의 저명한 종교단체인 "중국내지회"의 파견으로, 중국 귀주 경내의 진원, 황평, 준의 일대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1930년대초에는 신도가 수만에 달한다.

 

1934년 10월초, 당시 귀주 진원교회의 목사로 있던 보샤트는 처인 로다와 함께 안순에서 진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성밖의 한 작은 산언덕을 지나갈 때, 강서에서 귀주로 진입하던 홍군 제2군, 제6군과 부닥치게 되는데, 홍군에 체포된다. 당시 홍군은 기독교의 교리는 공산주의신념과 배치된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는 인민의 정신을 마비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홍군은 외국교회에 대하여 단속조치를 엄격하게 시행했다. 초극(肖克) 장군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외국선교사를 구금한 주요한 이유는 그들을 통하여 약품과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구금된 외국선교사에 대하여, 홍군은 교회측에 홍군이 필요로 하는 약품, 소금, 건전지등의 물자를 가지고 오면 풀어주겠다고 통보했다.

 

보샤트의 처는 금방 석방된다. 그 본인은 홍군과 함께 기나긴 장정의 길을 떠난다. 서로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는 홍군에 대하여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된다. 홍군부대의 엄격한 규율, 도박을 하지 않는 것, 아편을 피우지 않는 것은 보샤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홍군은 그의 개인물품을 몰수하지도 않았고, 엄격히 "양귀자(洋鬼子)", "대비자(大鼻子)"등의 멸시하는 말로 그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를 "외국인" 혹은 "노발(老勃)"이라고 불렀다. 행군도중에 가능한 한 그를 보살펴 주었다. 습기가 많고 비가 많이 내려서, 보샤트가 유포(油布) 한조각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홍군은 그에게 침대보(床單)를 하나 내준다. 행군도중에 보샤트의 신발이 망가졌는데, 홍군은 그에게 발에 딱맞는 장화를 찾아다 주었다. 그리고 그 장화는 바로 '입을 뾰루퉁하게 내밀고 있는 한 홍군전사에게서 '몰수'해온 것이었다" 이런 것들로 인하여 보샤트는 홍군에 대한 편견과 원망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홍군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한다. 보샤트는 여러번 상해, 남경등지로 서신을 보내어 홍군의 약품구매와 경비조달을 도와준다.

 

홍군 부대에서 보샤트는 초극, 하룡(賀龍), 왕진(王震)등의 홍군지휘관을 만난다. 그가 가장 먼저 접촉하고, 인상이 깊이 남은 사람은 초극 군단장이었다. 하루는 초극이 보샤트를 초청해서, 프랑스어로 된 귀주지도를 번역해달라고 부탁한다. 당시, 홍군이 귀주에서 쓰던 지도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던 20센티미터정도의 지도였다. 지도에는 성회, 현성, 대도시와 대하류, 대산맥이 그려져 있을 뿐이어서, 사용하기 아주 불편했다. 이 프랑스지도는 1미터 크기이고 주석이 상세히 있었다. 보샤트는 초극이 요청하는 바에 따라, 지도의 중요한 산맥, 마을, 하류등의 중문명칭을 얘기한다. 그 후에 하나하나 지도에 표기했다. 한 밤중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지도를 모두 번역할 수 있었다. 초극은 보샤트의 우호적인 협력에 아주 만족한다. 초극장군이 나중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홍군이 귀주 동부를 전전하고 호남 서부로 들어갈 때, 이 지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36년 4월 12일, 홍2, 홍6군단은 운남에서 사천으로 북상했다. 거기서 그들은 보샤트를 석방한다. 군단장 초극은 친히 보샤트에게 석방령을 읽는다. 초극등 홍군지휘관들은 보샤트를 배웅하고, 그와 악수를 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곤명까지 갈 수 있도록 충분한 여비도 쥐어준다. 보샤트는 홍군을 따라 장정에서 560일을 같이 다녔다. 귀주, 사천, 호북, 호남, 운남등 5개성을 돌았다. 거리는 6천마일이었으니, 홍군장정에서 아주 특이한 참가자인 셈이다.

 

보샤트는 곤명에 도착한 후, 즉시 자신이 홍군에서 겪은 경력을 정리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보샤트는 12장, 288페이지에 이르는 회고록 <<신령의 손>>을 작성한다. 1936년 11월 런던 HODDER AND STOUGHYON출판사에서 출판된다. 이 책은 서방에 최초로 홍군장정을 소개한 서적이다. 책에서, 그는 중국홍군이 용감하게 싸우고, 규율이 엄격하다고 칭찬했다. 홍군의 장정때 두려움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도 홍군장정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세계에 홍군장정의 상황을 알린 저작이므로, 이는 중국공농홍군의 장정역사를 연구하는데 중대한 참고적 가치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도 일부 노홍군 그리고 역사자료에서 당시 홍군장정의 사료를 수집할 수 있는 외에, 전문가들은 이 책이 현재 중공당사를 연구하고, 특히 홍군장정사를 연구하는데 유일무이한 원시사료라고 평가한다. 그 사료가치는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이나 해리슨 솔즈베리의 <<장정 - 전대미문의 이야기>>보다 뛰어나다.

 

1939년, 보샤트는 국제교회조직에 의하여 다시 파견되어 귀주로 와서 선교한다. 보샤트는 현지에서 선교를 하는 외에 현지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학교도 만들었다. 반현 해방초기에 보샤트는 부상당한 해방군 병사들도 많이 고쳐주었다. 1951년, 보샤트와 처는 고국으로 소환당한다. 떠나기 전에 보샤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귀주를 떠나 귀국하는 외국인이다. 다른 외국선교사들은 모두 공산당을 두려워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내가 본 홍군과 같다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우호적이고, 믿을 만한 친구이다."

 

1986년 5월 27일, 초극 장군은 보샤트의 근황을 들은 후, 서신을 보내여 옛친구 보샤트를 위문했다. 1987년말, 보샤트는 <<인민일보>> 영국주재기자의 취재에 응하여 그가 홍군과 함께 했던 경력을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