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1차전당대회'가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제1차대회대표이자 광주당지부 책임자인 진공박은 회의상에서 기고만장했고, 스스로가 옳다고 믿고, 조직은 무시했다. 회의기간동안, 프랑스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되었다. 안전을 위하여, 가흥 남호의 유람선에서 회의를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진공박은 그러나 그쪽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부인과 함께 항주로 가서 유람을 했다. 그가 상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회의가 끝나 있었다.
나중에 중공중앙의 특파원인 장태뢰(張太雷)가 광동으로 가서, 그에게 상해로 가서 당조직에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진공박은 한마디로 거절했을 뿐아니라, 진독수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독립하여 행동하고, 당의 구속을 받지 않겠다." 얼마후, 광주당조직의 회의에서는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나는 다시는 당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겠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큰소리쳤다: "당을 떠나서 별도의 광동공산당을 조직할 계획이다." 진공박의 분열적인 언동으로 인하여, 중공중앙은 1923년 봄에 그를 당에서 제명한다.
바로 이해의 11월, 진공박은 미국 컬럼비아대학으로 가고. 경제학석사학위를 받는다. 이때 그는 왕정위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는다. 1925년 4월에 귀국한 후, 요중개가 직접 그를 소개하여 국민당에 가입하고, 국민당중앙당부 서기장의 직위를 맡는다.
진공박은 먼저 왕정위를 철저히 추종했다. 나중에는 장개석과 심하게 싸웠다. 장개석과 왕정위의 갈등이 아주 첨예하게 되면서, 진공박은 여러번 생각하다가 결국 무한을 선택하고, 왕정위의 품에 안긴다.
무한에 있는 기간동안, 진공박은 왕정위를 지지하여 반장(反蔣), 토장(討蔣)을 주장하고, 동시에 공개적으로 분공(分共), 반공(反共)도 주장했다. 남경정부,무한정부의 분열과 합류의 스캔들이후, 장개석은 재기한다. 장개석이 군대를 보내어 진공박을 체포하려고 하자, 진공박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서 홍콩으로 간다.
진공박은 다시 권토중래한다. 1928년 겨울에 다시 '오방위원(奧方委員) 고맹여, 왕법근등고 함게 '중국국민당개조동지회'를 결성하여 자신이 책임자가 된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국민당개조의 구호를 내걸고 공개적으로 장개석에 반대한다. 장개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1929년초에 개최된 국민당 제3차당대회에서 영원히 당의 기율을 위반한 진공박의 당적을 제명한다고 결정했다.
항전이 시작된 후, 진공박은 월남의 하노이로 가서 왕정위와 만난다. 그리고 주불해, 도희성등과 함께 일본수상의 성명에 호응한다. 일본의 지원하에, 왕정위는 공개적으로 친일정부를 조직하고, 부인인 진벽군을 홍콩에 보내어 진공박을 모신다. 진공박은 잠시 밀고당긴 후 결국 상해로 돌아온다. 그리고 왕정위에게 "당신은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천하를 바꾸려는 정신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당신의 걱정과 우려를 덜어드리겠다."
1941년 3월 30일, 남경에 정식으로 '남경정부'를 결성한다. 왕정위는 주석 겸 행정원장이 되고, 진공박은 입법원장,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겸 훈련부장이 된다. 그는 왕정위의 바로 다음가는 제2인자였다. 진공박의 매국적인 행위에 전국인민이 성토했다. 국민당 당중앙은 제5기 8중전회에서 다시한번 진공박을 제명한다.
왕정위는 끝이 좋지 못했다. 1943년말, 등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기 위하여 왕정위는 여러번 수술을 받는다. 다음해 초, 일본에서 치료를 받던 왕정위는 삼절흉추골에 심각한 변형이 생겨, 골막에 염증이 생겨, 거의 뼈만 남은 상태가 된다. 11월 10일 오후, 왕정위는 나고야시의 차가운 지하실에서 죽어간다. 그의 생전 유언에 따라, 진공박이 국민정부 주석, 행정원장의 직을 물려받는다. 그는 왕정위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한다. 5년간 존속했던 남경정부도 그 목숨을 다한다. 10일후, 진공박, 이여장(李勵庄) 부부 및 행정원비서장 주륭상, 실업부장 진군혜, 안휘성장 임백생, 군사위원회 총감 하병현, 여비서 막국강(진공박의 정부)등 7명은 일본으로 도주한다.
8월 28일, 국민당은 사람을 보내어 진공박의 공관을 수색하나, 이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육군총사령관인 하응흠은 즉시 일본의 주중국파견군에 비망록을 보내어, 일본이 진공박의 행방을 제공하고, 본국송환을 할 준비를 하라고 요구한다. 일본측은 어쩔 수 없이, 중국의 의견을 진공박에게 전달한다. 진공박은 스스로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하응흠에게 전보를 보낸다. 그는 자신이 도망친 것은 장개석 위원장이 환도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귀국하여 처분을 달게 받겠다고 말한다. 일본에 도망친 후 28일만인 10월 3일에 중국으로 다시 압송된다.
다음해 4월 5일, 강소성고급법원은 진공박에 사형을 언도한다. 1946년 6월 3일, 55세의 진공박은 총살형을 받고 일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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