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학빈(王學斌)
1912년 1월 1일, 남경, 총통부, 밤 11시. 하얀 달이 하늘에 떠 있고, 별들은 점점이 보인다.
손중산(孫中山)는 임시대총통 취임선서문을 들고, 광동어로 장엄하게 읽어내려갔다:
"만주독재정부를 전복시키고, 중화민국을 공고히 하며, 민생과 행복을 도모하는 것은 국민의 공통된 뜻이다. 그대로 따르며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위하여 봉사할 것이다. 독재정부가 이미 무너뜨려서 국내에 변란이 없고, 중화민국을 세계에 우뚝 서게 되어, 열국의 공인을 받게 되면, 임시대총통의 직을 내놓을 것이며, 삼가 국민에게 선서한다."
취임식은 간단하면서도 짧았다. 섬서대표였던 마릉보(馬凌甫)의 회고에 의하면, 의식이 끝난 후 사람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고함을 질렀는데', 근처에 사는 사람들중 많은 사람들이 잠을 자다가 깼다고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병사들이 소란을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고 한다. 아무도 당시에 국가최고권력기관을 장악한 대표들이 기쁜 나머지 그런 어린아이같은 행동을 했다고는 믿지 않았다."
손중산이 1일에 급히 취임한 것은 정삭(正朔)을 고쳐서 양력을 쓰기 위함이며, 그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을 옹호하는 관리와 신사들은 이에 대하여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나동은 그날 담담하게, "오늘은 서력 정월 1일이다"라고 적었다. 상해에 칩거하고 있던 정효서는 심지어 청나라조정이 "양력으로 고치려면 오늘 선포하는 것이 좋다. 듣기로 항성(원세개)는 이런 뜻을 가졌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쉽다."라고 적었다.
진정으로 강한 반향을 불러온 것은 남방의 독립한 각 성이었다. 민국원년의 원단을 경축하기 위하여, 상해학교는 1일간 수업을 쉬었고, 당시 19세이던 청년학생 육담안은 외출하여 친구를 만나러 갔다. "12시, 돌아오는 도중에 호군도독이 개삭의 고시를 여러장 붙이는 것을 보았다. 상점에는 모두 오색기를 걸었다. 돌아다는 사람들은 기쁜 표정을 드러냈다." 호북의 황주가에 학자인 주치삼은 점심을 먹은 후 성을 나섰다. "한계학당에 새로운 대련이 걸렸는데, 색깔있는 깃발이 휘날리는데 신년원단이었다."
민국이 막 건국되고, 각지에서 축하했다. 이건 원래 기쁜 일이다. 그러나, 임시대총통 손중산은 얼굴에 희색을 띄고 있었지만, 속으로 걱정거리가 많았다. 그의 걱정거리중 하나는 임시정부의 재정이 너무 빈약하여, 자금이 없다는 점이었다.
혁명은 돈이 많이드는 사업이다. 남방의 여러 성의 요인들은 손중산이 1911년말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 이유는 손중산을 존경하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요소는 바로 그가 많은 자금을 준비해서 돌아올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경렴은 이렇게 들었다. 손중산이 미국에서 수천만달러를 모집했고, 병선 10척을 모집했다. "만일 남경의 임시정부가 그를 임시대총통으로 모시면, 돈과 배를 내놓아서, 임시정부가 쓰게 해줄 것이다." 심지어 일본주상해영사인 유길명도 이 소문의 영향을 받았다. "듣기로 손씨는 많은 활동경비를 가지고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금액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일설에는 오천만원)"라고 보고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이 전해지다보니, 손중산은 위대한 혁명지도자일 뿐아니라, 재물을 모으는데 뒤어난 '화수분'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바램이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었다. 만들어지기도 빨랐지만, 깨지는 것도 빨랐다.
12월 25일, 사람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던 '손재신(孫財神)'이 상해에 상륙한다. 혁명당원이건, 외국사절이건 신문기자이건 모두 알고 싶었던 것은 손중산이 주머니에 얼마의 돈을 가지고 왔느냐였다. 그날 오후 1시, 손중산의 환영대회가 장원(張園)에서 개최된다. "온 사람이 만명이 넘었다." 일본유학생 황존삼도 여기에 갔다. "중산선생은 3시에 출석했고, 연설이 꽤 길었다. 대강의 내용은 이번에 귀국했는데, 사람들은 모두 내가 수천만의 현금을 가져왔다고 여기는데, 나는 실로 한푼도 가져오지 않았다(一文未帶). 가져온 것은 혁명의 정신이다." 또 다른 버전도 비슷하다. "혁명은 돈에 있지 않고 모두 열정에 있다. 내가 이번에 귀국하면서 금전을 가져오지 않았다. 가져온 것은 정신뿐이다."
정신이 인심을 고무시킬 수는 있지만,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사회는 여러가지를 새로 일으켜야 했고, 신군도 먹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해야할 것은 한가지이다. "돈을 마련하는 것"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명한 기자인 모리슨이 한 말이 있다: "손중산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은 손중산이 거액의 외화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실제로 그는 돈을 전혀 가져오지 않았다. 일단 이 일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사람들은 아마도 그에게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과연 그랬다. '한푼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실망이 목소리가 온천지에서 들려왔다.
"총부리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총부리를 끝까지 유지하려면 역시 돈자루가 있어야 한다. 당시 남경에만도 주둔군대가 십여만이었다. 군비는 실제로 재정의 주요한 지출이다. 군비가 조달되지 않자, 황흥은 어쩔 수 없이, 밥을 먹던 것을 죽으로 바꾸었다. 죽을 먹기도 힘들어지자 군대는 할 수없이, 남경성의 기차를 일본상인에게 저당잡히고 20만원을 빌려서 잠시 유지하고 있었다. 1월 1일, 광주혁명정부에서 남경으로 보내는 3천명의 병사들이 상해를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 엄동한설이었다. 황포강가에 사병들은 "몸에 겨우 홑겹의 평민복장을 하고, 단지 양피배심을 하나 걸쳤을 뿐이었다." 이런 장비로는 추위를 견디기 힘들다. 군대지휘관은 다음 날 상해 광조공소(公所)로 가서 면이불, 면요를 각 삼천개 만들어 3일내에 공급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공소는 '군복제조공장이 없고, 면화가 부족하여 그저 볏잎으로 요와 이불 3천장을 만들어 급히 줄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군대는 남경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다. 임시정부는 그런데 필요한 문자를 제공해줒 못했다. 그저 동향인들이 하는 공소에 가서 부탁을 했다. 이를 보면, 임시정부의 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니, 군심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소규모의 변란이 계속 일어난다. 장건이 "남경의 군대에서 사건이 있다는 소식이 매일 들린다. 군기랄 것도 없다."고 탄식한 것도 이해가 된다.
남방의 재정에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북방의 청나라조정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12월 1일, 탁지부 대리대신 소영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부창고에 실제 보관된 은이 구십팔만칠천일백칠십일냥이전육푼삼리일호이다. 보조화폐가 칠십사만매이다." 월말이 되어서 원세개가 융유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현재 창고에 겨우 이십여만냥이 남아서 쓰기에 부족합니다" 만일 재원이 이렇게 고갈되면, 남방과전투를 할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융유는 조서를 내려, 한편으로 각 성에 자금지원을 요구하고, 한편으로 황친귀족들에게 자금을 출연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결과는 우스웠다. 1월 1일 산동에서 은삼만냥, 양삼만원을 모았다고 회신이 왔고, 흑룡강에서 양삼십만원을 모았다고 회신이 왔다. 그러나, 이들 돈은 겨우 회신한 전보에만 있을 뿐이다. 즉 그림의 떡이었다. 그리고 황친귀족들은 모두 철공계였다. 돈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총무청에서 재직하고 있던 보형이 쓴 기록에 따르면, 1월 2일 오전, 원세개가 들어와서 보고할 때 융유가 말한다: "현재 궁중에서 황금팔만냥을 긁어모았으니, 네가 받아가서 써라. 시세가 이처럼 위급한데, 너는 나에게만 조를 것이 아니라, 혁현등이 평소에 모아놓은 돈이 있으니 내놓으라고 해라." 원세개가 답한다. "혁현은 은15만냥을 내놓았습니다." 융유가 말한다. "십오만냥가지고 되겠는가. 너는 더 거리낄 것없이 그들에게 더 내놓으라고 해라."
이틀 후, 단기서, 조이손, 진기룡등 8명의 대신이 연명으로 전보를 날린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황친귀족들이 외국은행에 저금한 것만 하더라도 현은으로 금액이 3천만에 이른다고 한다...황친귀국대신들은 국가와 환난을 같이 한다. 국가가 있으면 돈도 확보되는 것이고, 국가가 망하면 집안도 따라서 망한다." 그러나, 이에 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12년 1월 1일, 항주, 도독부, 오전 9시. 서호
절강도독 탕수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문을 열고 공무를 보았다. 오늘은 민국이 건국한 해이다. 항주성내에는 환호성이 넘쳤다. 오로지 이 탕대도독만이 인상을 찌푸리고 근심에 차 있었다.
절강도독이라는 관직은 겉으로 보기에는 멋있지만, 실제로 골치아픈 자리이다. 원래대로 하자면, 탕수잠이 도독을 맡은 것은 실로 의외이다. 탕수잠은 원래 군주에 충성하는 마음가짐을 지닌 전통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항주의거가 황급히 일어나는 바람에, 도성장, 장병린등 윗어른들이 해외에 있고, 성안을 둘러보아도, 오로지 탕수잠만이 '명성이 있고, 식자들이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갖추지 못한 인맥관계가 좋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치하여 탕수잠을 절강도독에 모신 것이다. 혁명당원에 있어서, 분명히 그의 경험과 명성을 잠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혁명당과 탕수잠의 밀월기는 토끼꼬리처럼 짧을 수밖에 없다. 도독부의 각 부서의 실권은 혁명당원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탕수잠은 여러가지로 제약을 받아 실로 허직에 불과했다.
게다가 적지 않은 혁명당원들은 젊고 혈기에 넘쳤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포의도독인 그를 눈에 두지 않았다. 그중에서 두 건이 사건이 그를 자극했다. 하나는 '귀림사건(貴林事件)'이다. 귀림은 항주기영의 만주인이다. 그는 사상이 개명하여, 기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공로가 컸다. 그러나, 기영이 투항한 다음 날, 사령부, 정사부는 총기은닉, 반항도모의 죄명을 씌워 도독의 명의로 그를 총살해버린다. '안정유지'를 명목으로 탕수잠은 화를 꾹 눌러참았다. 얼마후 혁명당원 왕금발이 다시 탕수잠을 곤란하게 만든다. 왕금발은 원래 탕수잠에 대하여 편견이 있었다. 일찌기 진기미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탕수잠은 우리 혁명을 반대했는데, 왜 그를 도독에 앉히는 것입니까?" 나중에 왕금발은 도독부의 명령을 더욱 무시한다. 소흥군분정부를 만들어 스스로 도독에 앉고, 사람들에게 지역을 나눠주며, 절강성 동쪽의 세금을 자신이 차지한다. 그리고는 무기를 구매하고, 부대를 확충한다. 그리고 매번항주도독부와 대항했다.
자신이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다면, 실로 고무도장을 들고 괴뢰도독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반달 후, 탕수잠은 모자를 벗고 사직하다.
탕수잠의 경우는 남방의 독립된 각 성의 축소판이다. 혁명이 깃발아래,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모였다. 마음 속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자들도 많았고, 어룡혼잡(魚龍混雜)의 상황이었다. 남창(南昌)이 독립하며 원 신군의 협통인 오개장(吳介璋)이 도독을 맡았다. 얼마후에는 고충을 호소했다: "지방의 형세는 아주 혼란스럽다. 청방, 홍방의 사람들이 지방의 정사에 관여하여, 조치하기 곤란하니, 급히 대책을 마련해주십시오." 12월 31일, 한 무리의 학생군이 황주를 지났는데, 주치삼이 관찰해보니, "학생군중 비록 1/3정도는 진짜 학생이었지만, 내가 보기에 무창에서 소규모 무역을 하거나 행상을 하던 유민들도 학생군모집소식을 듣고는 유행을 쫓아 섞여 있었다."
이를 보면 이런 배경이 복잡하고 다양한 역량을 통합하는 것이 손중산의 눈앞에 펼쳐진 난제였다. 어쨌든 혁명은 그들에 의지해야 완성될 수 있다. 최고지도자층이라고 하더라도 정견과 파벌이 달랐다. 손중산이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기 전날, 송교인은 미래정부형식이 내각제여야 하는지 총통제여야 하는지를 놓고 손중산과 얼굴을 붉혀가며 다투다가 서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헤어졌다. 동시에 동맹회와 광복회간의 숙원도 해결되기 어려웠다. 호북의 여원홍과 임시정부도 역시 속마음은 따로 놀았다. 바로 모리슨이 말한 대로였다: "손중산 혹은 여원홍과 같은 사람을 민국의 총통으로 임명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열강의 승인을 하루빨리 받기 어려울 것이다. 손중산은 중국의 상황을 전혀 모른다. 여원홍은 호북성바깥의 일은 전혀 모른다."
이와 비교하여, 청나라정부는 이미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쓸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홍장, 장지동, 녹전림, 유곤일과 같은 1820년대 1830년대에 출생한 관리들은 이미 모두 물러났다. 그때 1850년생들은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었고, 1860년대생들이 정력이 충만한 핵심이었다. 1870년대생들은 예기는 갖추었으나 아직까지 더 갈고 닦아야 했다. 능력있는 대신인 단방은 어리버리하게 '사진게이트'에 빠져서 쫓겨난다. 나중에 촉으로 가는 길에 사망한다. 또 다른 재능있는 대신인 철량은 재도, 양필의 질투로 강녕으로 좌천되어 한직을 맡는다. 숙친왕 선기는 선의로 개혁을 제창했지만, 조정에서 이단으로 취급되어 중용받을 수 없었다. 황친귀족들을 모조리 등용하고, 현명한 인재들은 모조리 버렸다. 재풍은 28살, 재순은 25살, 재도는 24살이다. 이 세명의 머리에 피도 안마른 1880년대생들이 내각의 요직을 차지하고 앉았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2월 6일, 재풍은 섭정왕의 직을 벗어나 번저로 돌아간다. 이것은 융유태후, 선통제가 유일하게 믿을 구명도초를 잃은 것을 의미한다. 비록 원세개가 "나는 대청의 총리대신이다. 어찌 공화에 찬성하겠느나? 만일 고아과부를 홀대한다면 세상사람들이 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장담했지만, 누구든지 다 알고 있었다. "항성(원세개)의 마음은 천공백규(千空百竅)하여 다른 사람이 알기 어렵다." 그는 권모술수와 변신에 능한 인물이다. 원세개는 그저 시기를 보아 움직일뿐, 충성심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원세개에 의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다. 융유는 할 수 없이 원세개에게 모든 것을 건다. <소영일기>에 따르면 12월 28일, 원세개는 남방혁명당이 공화를 주장하고, 당소의가 국회를 개원할 것을 주장하는 건의를 융유태후에게 보고한다. "황태태후는 눈물을 흘리며 원총리대신에게 말했다: '네가 보기에 어찌하면 좋을지에 따라 처리해라. 대국이 어찌되든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겠다. 황상이 어른이 되더라도 내가 있는 한 너를 원망할 수 없을 것이다." 융유는 이미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다. 그녀는 짐을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이때부터 청나라조정의 운명은 원세개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된다.
비록 민국의 임시대총통이지만, 손중산은 모든 세력을 이끌고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쓸데없는 패만 가득 쥐고 있는 셈이다. 아직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융유는 이미 내놓을 패가 없었다. 그저 원세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원세개는 이때 양쪽에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 나가든 뒤로 물러나든 그는 남북의 권력쟁투에서 가장 중요한 에이스카드가 되어버린 것이다.
1912년 1월 1일, 북경, 중남해, 오후 5시. 석양이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영국공사 Jordan은 중남해로 가서 원세개를 만난다. 원세개는 몸과 마음이 지친 것처럼 보였다. "그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심각한 불면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총리대신이 된 이래로 더욱 나이가 들어보였다." 그리고 원세개는 아주 화가 나 있었다. 화가난 이유는 바로 남방의 임시정부가 돌연 성립을 선포하고, 손중산이 임시대총통에 취임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원세개로 하여금 손쓸 도리가 없게 만들었고, 피동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원래, 원세개는 생각한 것은 혁명당과 청나라조정간을 오가면서, 혁명당에 대하여는 탄압하면서 끌어들이고, 청나라조정에 대하여는 겁을 줌으로써 자신의 몸값을 올리면서 어부지리를 얻고자 했다. 만일 혁명당이 득세하면, 원세개는 그 추세를 따라서, 쌍방의 평화협상을 성공시키며, 군주입헌을 추진하여 중국의 이토 히로부미가 되고 싶어했다. 청나라조정이 계속 유지될 수 있으면, 원세개는 군대를 이끌로 남하하여 혁명군을 제거하고 '증국번'식의 성공을 거두고자 했다. 당시 원세개의 행동은 형세에 빠라 바뀌었다. 후세인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일찍부터 청나라를 망하게하고 나라를 찬탈할 생각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어찌되었근 입헌군주주의적 경향이 짙은 정객이었다.
그러나, 손중산의 귀국은 국면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손중산이 임시대총통에 오르자, 최소한 남방의 혁명세력은 명목상 통일정권을 가졌다. 이렇게 되니, 원래 혁명당과 청나라조정간의 양자간 싸움이 돌연 손중산, 청나라조정 및 원세개간의 3자간 싸움으로 변화되었다. 이것은 손중산의 탁월한 정치적 지혜를 보여준다. 원래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정치문제가 간단명료해져 버린 것이다. 손중산은 원세개에게 일단 청나라황제가 황제위를 물러나게 하면, 대총통의 지위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이는 결국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말이다: 공화를 옹호하며 중국의 워싱턴이 되든지, 황제제를 견지하며 증국번의 길을 걷든지...
원세개는 잘 알았다. '증국번'은 하기 어렵다는 것을. 현재 전국의 17개성이 독립했는데, 이들 반벽강산을 수복하는 것은 일년반년만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워싱턴이 되는 것도 리스크가 컸다. 원세개가 온갖 노력을 다해서 선통제를 퇴위시킨다고 하더라도, 손중산이 식언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안양이 동향인 조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욕만 얻어먹을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낫고, 어느 것이 더 못한지. 개략 1월 1일을 전후한 며칠동안, 원세개는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정치리스크를 잘 아는 그는 시간을 들여 리스크를 생각했고, 가진 패를 살펴보았다.
Jordan이 본 것은 바로 망설이고, 어찌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근심이 많았던 원세개이다. 쌍방의 회담은 솔직했다. 원세개는 힘든 점을 다 말했다. 첫째, 혁명당은 "계속 정전조항을 위반한다. 이것은 이미 아주 많은 성에서의 적대적 행동으로 증명된다...그들의 적대행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둘째, 원세개는 '몽골왕공은 이미 중국이 공화제를 건립하면 독립을 선포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셋째, "황족과 군대는 협상에 반대한다. 군대는 모두 개전을 지지한다. 원세개 자신의 부대도 장교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다. 그의 정책으로 그들의 승리의 과실이 날아갈 것이라고" 당연히, 원세개는 자신도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사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노련한 Jordan은 원세개가 하는 말이 과장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원세개에게 일깨워 주었다. 만일 전쟁이 다시 터지면, '말로 하기 힘든 유혈과 재난이 올 것이고, 아마도 중국이 남방공화국과 북방군주국으로 나뉠지도 모른다" 이 말은 바로 원세개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 말이다.
1월 5일, 모리슨은 타임지에서 일하는 동료 브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청나라조정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나는 반드시 하나의 민국이 출현할 것이라고 믿는다. 원세개가 이 기간동안 암살당하지 않으면, 민국의 제1대총통이 될 것이다"
이 오스트레일리아인의 초일류의 통찰력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세력의 사이에서 손중산의 카드를 읽고, 청나라조정의 최후요구사항을 잘 알고 있는 원세개에게는 그것이 가장 적합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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