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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조이용(曹利用): 권신(權臣)의 최후

by 중은우시 2012. 6. 27.

글: 안건회(晏建懷)

 

조이용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은 송(宋)나라를 대표하여 요(遼)나라와 전연지맹(澶淵之盟)을 체결하면서 최후의 양보선을 잘 지켜내는데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아, 전쟁으로 도탄에 빠질뻔한 북송왕조를 구해냈다는 것이다.

 

경덕원년(1004년) 요성종 야율융서와 그의 모친인 소태후는 20만대군을 이끌고 대거 남침한다.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송나라조정은 송진종(宋眞宗)이 재상 구준(寇準)의 설득하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간다. 송나라와 요나라의 양군은 황하북안의 전주(澶州, 지금의 하남 복양시)에서 전투를 벌인다. 혼전가운데,송나라군대의 화살이 요나라군대의 총사령관 소달(蕭撻)의 목숨을 끊으면서 요나라군대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다. 이런 유리한 시기를 틈타 송진종은 조이용을 사신으로 요나라 군영에 보내고 소태후와 담판을 벌인다.

 

그가 떠나기 전에, 송진종은 조이용에게 당부한다: "거란이 남침한 것은 땅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얻기 위함이다. 관남의 땅은 송나라에 귀속된지 오래이니 허가할 수 없다; 한나라에서도 선우에게 옥과 비단을 하사한 사례가 있다."(송사. 조이용전). 그 뜻은 영토를 떼어주는 것은 안되지만, 나머지 재물을 주는 것은 협의해도 좋다는 말이다. 조이용은 자신의 세치 혀를 이용하여,소태후와 협상을 벌인다. 마지막에는 30만의 세폐(歲幣)를 주기로 하고 요나라군은 철군하며 변방은 안정을 회복한다. 이는 조정 대부분의 뜻에 부합했고, 송진종의 최후양보선도 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이용은 국가의 공신이 된다. 얼마후, 의주(광서성 의주시)에 쿠데타가 일어나서, 영남지방에 소동이 벌어진다. 상황이 아주 위급했다. 송진종은 다시 조이용을 생각해냈고, 그를 광남안무사로 임명하여 병력을 이끌고 가서 평정하게 한다. 조이용은 군대를 이끌고 교묘한 전술로 적을 무찔러 영남을 금방 평정하고 개선한다.

 

거란에 사신으로 간 것와 영남의 반란을 진압한 두 번의 공로로 조이용은 다른 동료들이 평생을 들여도 쌓을 수 없는 자본을 지니게 되고, 명성과 이익 및 관직을 얻는다. 그는 계속 승진을 거듭했고, 대중상부7년(1014년)에는 송진종이 그를 추밀사, 동중서성하평장사로 임명하고 나중에 다시 시중을 겸임하게 한다. 이리하여 재상과 맞상대할 수 있는 최고군사장관이 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삼군총사령관에 해당한다.

 

조이용은 고위관직에 오래 있게 되자,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자랑했다. 그는 자신을 재상 이적(李迪)과 비교하곤 했다. "글을 쓰는 것이라면 나는 이적만 못합니다. 그러나, 감히 몸을 던져 오랑캐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면 이적이 저보다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공로에 대한 자부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삼군총사령관으로서, 그는 자주 재상과 서열 다툼을 벌였다. 원래의 규칙은 추밀사는 비록 시중, 상서령을 겸한다고 하더라도, 조정의 서열상 재상의 아래였다. 그러나 조이용은 추밀사의 직을 가지고 자주 자신의 위치를 재상보다 앞에 두곤 했다. 송진종도 체면을 고려해서, 그의 요구에 맞추어 주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재상 왕증, 장지백보다 윗자리에 앉곤 했다.

 

대권을 장악한 사람이라면 권력이 열이면 일곱, 여덟만 쓴다. 그래야 아래 위가 모두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열의 권력을 열하나, 열둘로 써버리면, 쉽게 분쟁이 일어나고, 공신에서 권신으로 바뀌게 된다. 공신과 권신의 구분은 이렇다: 공신은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고, 권신은 자신의 공을 드러낸다. 조이용은 항상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썼고, 심지어 월권하여 사용했다. 조금만 지나치면 조정의 권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건흥원년(1022년)이 되자, 그를 백퍼센트 신뢰하던 송진종이 병사한다. 13살된 송인종(宋仁宗)이 즉위한다. 장헌유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고아과부가 정권을 잡으니 신경이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고, 특히 권신이 유형에게는 경계심을 가졌다.

 

유태후도 처음에는 조이용을 아주 존경했고, 자주 대신들의 앞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친절하게 그를 '시중'이라고 불러주었다. 다른 대신들보다 더욱 친근함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조이용은 유태후와 송진종의 심리차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 친근한 배후에는 그를 시험해보려는 심리가 숨어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송진종시대보다 더욱 오만방자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화가 닥치기 직전까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둔감해졌다. 유태후가 그와 국가대사를 상의할 때면, 그는 자주 자신의 옷이 허리띠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유태후가 자신의 곁에 있는 환관이나 친정집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은혜를 베풀려고 하면 극력 반대하곤 했다. 사람들 중에는 유태후에게 태후가 은혜를 베푸려는데 조이용은 이에 반대하고, 만일 사람들이 뒷문으로 조이용의 처를 찾아가서 부탁하면 즉시 이루어지곤 한다고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었다. 유태후는 그 말을 듣고는 놀라서 사람을 시켜 시험을 해본다. 과연 시도해보니 바로 통했다. 그러자 유태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얼마후 한 사람이 조이용의 조카인 조주병마감압 조예(曹汭)는 술에 취하면 황마괘를 입고 집안사람들에게 그를 만세라고 부르게 한다고 고발한다. 조예는 법에 따라 장형을 받아 죽는다. 조이용도 이에 연루된다. 유태후는 그의 추밀사직을 박탈하고, 등주(하남성 등주시)로 먼저 귀양보낸 후 다시 수주(호북성 수주시)로 보낸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는 지겨에 처한다. 사면초가에 처하자, 낙정하석(落井下石)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된다. 조이용이 경령궁의 공금을 사적으로 인출해서 썼다고 고발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이용은 다시 방주(호북성 방현)으로 귀양보내어진다. 조이용은 거의 하룻밤만에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그는 만장의 심연으로 빠지게 된다. 그가 귀양가는 길에 환관이 계속 따라오면서 그를 괴롭혔다. 굴욕을 견디지 못한 조이용은 마침내 방주로 귀양가는 길에 자결하고 만다. 이리하여 그는 공신에서 권신으로, 다시 권신에서 죄신(罪臣)으로의 일생을 마치게 된다.

 

이것은 정사의 기록이다. 야사에는 조이용이 몰락하는 것에 대하여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때의 왕질(王銍)이 쓴 <묵기(默記)>를 보면, 조이용은 조정대신으로서 은혜를 베푸는데 각박했다. 그리하여 유태후의 곁에서 일하는 환관이 그에게 원한을 품는다. 조카인 조예의 부인과 계집종(婢女)이 총애를 다투어 시끄럽게 싸웠다. 조예는 어쩔 수 없어 계집종을 시집보내버린다. 그러나 옛 정을 잊지 못해서, 걸핏하면 계집종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리하여 그 계집종의 남편이 분노한다. 한번은, 조예가 다시 그 계집종을 찾아왔는데, 계집종의 남편은 그가 색옷을 입은 것을 보고는 일부러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만세'를 외친다. 그러자 이웃사람들까지 모두 와서 이 광경을 보게 된다. 환관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그들 숙질이 못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발하고, 조정은 호부랑중 왕박문을 보내어 이 사건을 조사한다. 왕박문은 고문을 통하여 진술을 받아낸 후 조예를 큰 솥에 넣고 삶아서 죽여버린다. 조이용도 이 일로 벌을 받는다. <묵기>는 구양수의 셋째아들인 구양비(歐陽棐)가 재상 왕증의 집에 갔는데, 유태후가 왕증에게 보낸 서신을 친히 목격했다고 한다. 서신에는 "조이용과 그의 조카가 모반을 꾸민 일은 분명하니, 하루빨리 죽여야 한다.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후회막급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송사>의 기록은 조이용이 스스로 잘못하여 벌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묵기>는 유태후가 조이용을 제거하기 위하여 준비했다는 것이다. 사실진상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건, 유태후의 음모이건, 그 근본을 따져보면 조이용이 권신으로 유씨모자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고, 황권에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황권과 맞선다면 결말은 불을 보듯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