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대청왕조의 제일재자(第一才子)는?

중은우시 2012. 8. 15. 23:50

 

글: 양영춘(梁迎春) 

 

역대왕조에는 모두 재자(才子)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대청왕조도 마찬가지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나란싱더(納蘭性德), 기효람(紀曉嵐), 주어황(周漁湟)과 조설근(曹雪芹)이 있다. 이 봉모인각(鳳毛麟角)의 네명중 누가 대청왕조의 제일재자일까?

 

먼저 모두 잘 알고 있는 조설근을 보자. 그의 이름은 점(霑)이고 자는 몽완(夢阮), 호는 설근 도는 근계(芹溪), 근포(芹圃)이다. 그의 재능과 흥미는 비교적 광범위했다. 금기서화, 공예미식에 모두 정통했다. 그리고 의학에도 정통하여, 중의분야에 조예가 있었다. 이처럼 우수한 인물이 그 뜻을 펴지 못했다. 이유는 죄신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를 칠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것은 그가 일생동안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뜨거운 가슴을 지니고 있었지만, 나라에 보답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명성을 떨치려면 다른 길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설근은 인생의 쓴맛을 다 보았고, 세태의 염량을 깊이 느꼈다. 생활의 곤경을 겪으면서 그는 봉건사회에 대한 깊이있는 인식을 갖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끈기를 가지고 10년에 걸쳐 <홍루몽>을 창작하고 그 수정작업에 온 정신을 쏟는다. 사후에 <홍루몽>전80회의 원고를 남긴다. 그외에 <폐예재집고>가 있다. 후세에 조설근을 소설가, 저명문학가로 칭하게 된다. 조설근재자의 명칭에 대하여 역대이래로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조설근이 확실히 재자이다. 홍루몽이 대대손손 내려오면서, 고전명저로 남았다. 오랫동안 읽어도 그 재미가 계속 더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주어황은 귀주 청암고진에서 태어났다. 대학사로 강희자전의 편찬을 주재한다. 그는 여러 책을 암송했고, 황력을 거꾸로 외웠다. 그래서 청조제일재자라 불린다. 그는 당시의 교육부장관이다. 주어황은 자신의 재주를 믿고 오만했다. 특히 고향 귀주에 대하여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일찌기 귀주에서는 농민조차도 대련을 할 줄 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일에 대하여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주어황이 강남에서 과거시험의 주고관으로 있을 때, 누군가 귀주에서 그와 같이 뛰어난 문재를 지닌 인물이 나타난 것을 납득하지 못하여, 대련을 내서 그를 시험한다. 그러나 주어황은 하나하나 가볍게 대련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대련은 귀주에서는 농민들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강남의 선비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주어황과 함께 귀주로 가서 확인하려고 한다. 정말 교묘하게도 그들이 막 귀주경내로 들어섰을 때 한 농민이 분뇨를 매고 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 강남선비는 즉시 상련을 내놓는다: "칠층첨탑사방육릉팔각(七層尖塔四方六棱八角)". 그 농민에게 하련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누가 알았으랴. 그 농민은 강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뜻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하던 농사일을 계속했다. 그 강남선비는 농민이 답을 하지 못하자, 주어황을 조소했다. 그러자 주어황은 바로 맞받았다. 기실 그는 이미 하련을 내놓았는데, 당신이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 강남선비는 멍해진다. 주어황은 말한다. 그는 이미 손을 흔들어 너에게 얘기하지 않았느냐. "일장평양오지삼고양왜(一掌平陽五指三高兩矮)". 그러자 그 강남선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저 전설이다. 그러나 주어황이 자신의 고향사람들의 재능을 자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실제로는 그 자신을 끌어올린 것이다.

 

나라싱더의 원이름은 성덕(成德)이다 자는 용약(容若)이고, 호는 능가산인(楞伽山人)이며, 만주 정황기 사람이다. 청나라초기의 유명한 대사인(大詞人)이다. 그는 제일학인, 제일재자, 만청제일재자등으로 불린다. 이처럼 많은 칭호를 얻은 것을 보면 나란싱더의 재능을 알 수 있다. 그는 명문집안출신으로 무영전대학사 밍주(明珠)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양호한 교육을 받았다. 나란싱더 본인은 총명하고, 문무를 모두 겸비했다. 과거시험때 전시 2갑 제7명으로 강희황제는 삼등시위를 내린다. 나중에 1등으로 승진하고, 무관 정삼품이 된다. 나란싱더의 주요성취는 사(詞)이다. 그의 사로 현존하는 것은 349수가 있다. <측모> <음수>집이 있는데, 나중에는 <납란사(納蘭詞)>라고 많이 부른다. 풍격이 청신하고 준수하며, 애감완염(哀感頑艶)하다. 남당후주의 유풍이 있다. 왕국유가 이렇게 평한다': '북송이후로 한 사람뿐이다."(北宋以來, 一人而已). 그의 시사는 청나라때 사단에서 아주 높은 명망을 누렸을 뿐아니라, 전체 중국문학사상 '납란사'는 사단에 빛나는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시대가 나란싱더를 만든 것이다. 그의 생활은 만한이 융합되는 시기였다. 귀족가정의 성쇠는 왕조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그는 비록 제왕을 모시지만 평범한 생활을 그리워했다. 이런 특수한 생활환경과 배경에 그 개인의 뛰어난 재주를 합하여 시사의 창작에서 독특한 개성과 선명한 예술풍격을 나타냈다.

 

기효람. 그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몇년전 TV드라마에서 그려진 그의 이미지는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다. 역사상 진정한 기윤(紀昀)은 자가 효람, 춘범(春帆)이며 말년에 호를 석운(石雲)이라 한다. 도호는 관혁도인(觀奕道人)이다. 그는 옹정, 건륭, 가경의 세 황제를 모셨고, 82세까지 살았다. 그가 '민이호학가위문(敏爲好學可爲文), 수지이정무불달(授之以政無不達)"(공부를 열심히 잘하여 '문'이라 하였고, 맡긴 일은 이루지 못한 것이 없어 '달'이라 한다)으로 그는 시호를 "문달(文達)"이라고 받는다. 고향에서는 대대로 그를 '문달공(文達公)'이라고 칭했다. 기효람은 24살 때 순천향시에 제1명으로 거인이 된다. 31세때 진사가 된다. 그는 재능이 넘치고, 생각이 기민했으며, 공부를 열심히 하고, 고금에 모두 정통했다. 그의 기지와 유머는 자주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건륭37년 사고전서관을 개설하는데, 기효람이 총찬관이 된다. 이 업무는 19년간 지속되었다. 마침내 거작 <사고전서>가 완성된다. 기효람의 일생의 재능과 학술성과는 아주 두드러진다. 기효람은 청나라때 공인된 문단의 태두, 학술영수였을 뿐아니라, 일대문학종사였다.

 

네 사람의 품격, 재주와 성취를 보자면, 정말 그 고하를 가르기가 힘들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조설근은 성취로 따지자면 1등이다. 다만 이름을 얻은 것이 너무 늦었다. 청조제일재자는 만년의 조설근의 것이 아닌 것같다. 만일 재주로 논한다면 주어황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재주를 믿고 오만했다. 진정한 재자는 고귀한 품격을 지녀야 한다. 이것은 나란싱더와 들어맞는다. 그는 명성이 있을 뿐아니라, 문재도 널리 인정받았다. 최근 몇년동안 나란싱더의 사는 다시 한번 인기를 끌고 있다. 이것이 모두 설명해준다. 기효람은 비록 재능과 품격을 갖추었고, 성취도 크지만 그는 TV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풍퓨적이고 멋있지 않았다. 조설근, 주어황, 기효람, 나란싱더를 비교한다면 누가 청조제일재자일까? 답은 나온 듯하다. 나란싱더가 청조제일재자가 되는데 부끄럽지 않다.

 

기실 누가 제일재자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대청왕조의 사람들이고, 서로 다른 시대에 생활했다. 문학가치를 어찌 함께 놓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