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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황종희(黃宗羲)에서 여유량(呂留良)까지: 명나라유민의 백년정신항쟁

by 중은우시 2012. 9. 20.

 

글: 모검걸(毛劍傑) 

 

 

 

1660년, 51세의 황종희는 16년전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사태(天崩地解. 즉, 명왕조의 멸망)"이후 가장 편안하고 여유있는 한 해를 보낸다. 이 해의 팔월부터 십일월까지 황종희는 여산(廬山)을 올라, 풍경을 감상하고, 여유량등 임간(林間) 항청인사(抗淸人士)들과 교분을 맺고, 방이지(方以智), 염이매(閻爾梅)등 유민들과 밤을 새워 얘기를 나누었으며, 일찌기 청나라군대와 격전을 벌인 바 있는 동릉(銅陵)등지를 찾아간다.

 

그후, 일찌기 대명의 형부대당에서 부친을 죽인 원수를 찌르고, 주산고도에서 '노왕' 주이해(朱以海)와 '해는 지고 파도는 미친 듯이 치는데 군신으로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고, 일찌기 "세충영"을 조직하여 청나라의 철기와 직접 싸우기도 했던 피끓는 문인인 황종희는 절강동부의 여요 사명산 아래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용호초당"을 짓고 생활한다.

 

환관이 득세하고, 철기에 짓밟히는 명나라말기에 태어나서 17세때 부친 황존소(黃尊素)는 금의위에 의하여 감옥에 갇히고, 나중에 왕조가 붕괴되며, 청나라의 철기가 북에서 내려오며 중원을 석권하고, 신주의 주인이 바뀐다. 남아있는 산하에서 황종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항쟁의 반평생을 보낸다. 그는 일찌기 파도를 헤치고 죽음을 무릅쓰며 '노왕'에게 의탁한 적도 있으나, 일찌감치 10년전에 모든 것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전 1년, 청나라군대는 운남, 귀주, 사천, 광동,광서를 평정했고, 남명의 영력제 소조정은 거의 와해되었다. 정성공, 장창수는 부대를 집결시켜 북정에 나섰지만, 전부대가 궤멸하며 실패로 끝난다. 동생인 황종염(黃宗炎)은 사명산에 산채를 세워 청군에 항거하려했지만, 청군의 일격에 궤멸당하고 만다. 복국의 꿈은 이미 요원해졌다. 황종희는 그저 탄식하며, 무기와 전마를 버리고, 국구가한(國仇家恨)을 감춘다. 황종희는 스스로 "유득잔년사경운(留得殘年事耕耘)"이라 했다. 이때부터 기나긴 저술생애가 시작된다: <명이대방록>, <명유학안>, <송원학안> ....

 

이때의 황종희는 무력으로 청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그저 저서입설(著書立說)하고 학생을 교육시키고 이론적으로 만청정권의 합법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도통(道統)공방

 

"이하지변(夷夏之辨)"은 원래 중국역사상의 큰 주제이다. 매번 왕조교체때마다 중국의 선비들을 괴롭혀온 문제이다. 특히 이민족이 통치하게 될 때, 이런 괴로움은 더욱 심해졌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 중국유생들은 더욱 큰 곤경을 맞이한 것이다.

 

무력으로 천하를 탈취한 후, 청정부는 자신의 통치합법성을 구축하고자 애썼다. <명사>를 편찬할 때 만청의 선조가 명나라에 예속되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만청입관은 "명나라를 위하여 복수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외에, 더욱 중요한 것은 이론과 실천의 두 방면에서 동시에 증명하고자 했다. 청나라 '통치'는 한족 선비들의 마음 속에 있는 '도통'합일이라고 하여, 사상,문화적으로 그들의 '이하지변'의 관념을 뒤집어 버렸다.

 

그리하여, 강희제때부터, 만청은 이전의 군사정복과 민족고압으로 위엄을 세우는 편협한 정책을 벗어나, '문화' 도통을 새로 구축하고자 한다. 1668년 4월 15일, 친정을 막 시작한 강희제는 처음으로 예부의 신하들을 데리고 국자감으로 가서 시찰한다. 이를 통하여 "공자를 존중하고 유가를 숭상한다"는 것을 보인다. 다음 해, 강희제는 다시 "효제를 돈독히 하고, 인륜을 중시한다"는 등 유가가치를 핵심으로 하는 성유십육조를 내린다.

 

강희16년, 강희제는 <어제일강사서해의서>를 내는 기회에 더더욱 명확하게 "도통도 있고, 치통(治統)도 마찬가지로 있다"고 밝힌다. 치교합일(治敎合一). 이것은 깊은 의미에서 유가의 사상경계와 들어맞는다. 일반적인 사대부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왕부지(王夫之)의 결절(決絶), 고염무(顧炎武)의 평온(平穩)과 비교하자면 황종희의 입장은 통달(通達)이라 할 수 있다. 벼슬에 나서는 것을 거절하고, 큰 절개를 지키는 외에 자제나 문인들이 청나라정부에 참여하는 활동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일부 청나라의 관료들과의 내왕을 거절하지 않았다.

 

통달이외에 황종희는 동시대인들보다 더욱 넓은 안목을 지녔다. 그의 사고는 확실히 이미 한 왕조의 흥망을 넘어섰다. "천하의 큰 해는 임금 뿐이다." "천하의 난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의 성의 흥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우려와 즐거움에 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황종희 사상의 빛나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모두 황종희가 돌연 무장항청을 포기하고, 종일 머리를 쳐박고 책을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청나라조정이 관리인 강희철(姜希徹)등과 함께 서원을 창립하고, 나중에 심지어 청나라정부의 일부 정무나 조치에 대하여 한도는 있지만 지지와 긍정을 보냈다.

 

그후에 쓴 글에서 그는 거의 전부 강희, 순치등 연호를 사용하고, 청왕조를 국조(國朝)라고 부른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본조(本朝)"라고 부르기도 했다. 강희제에 대하여 황종희는 찬미의 글을 남겼다. "금성천자무유불촉(今聖天子無幽不燭)", "천자유심문치(天子留心文治)".

 

이상할 것도 없다. 이전의 동료, 친구가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그중에는 함께 출생입사(出生入死)한 동생 황종염, 황종회(黃宗會)도 있었다. 사람들은 한 때 심지어 황종희가 이미 '변절'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같은 항청인사인 친구 여유량은 이로 인하여 황종희와 절교한다. 여유량은 일찌기 청나라조정의 과거에 참가한 바 있으나, 황종희의 영향을 받아 나중에 포기한다. 그러나, 여유량이 무장항청사업을 다시 하려고 하는데, 황종희는 자제를 교육시켜 과거에 참가시켰다. 그리고 그 자신도 청나라관리들과의 왕래를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결렬원인은 여기서 그 씨가 심어졌다. 나중에 여유량은 황종희를 크게 욕한다: "의론괴곽(議論乖角), 심술계박(心術薄)"(논의하는 것이 이그러지고 모나며, 마음 씀씀이는 야박하다). 황종희는 여유량을 "석문일광자(石門一狂子)"(석문의 미치광이)라고 칭한다.

 

여유량은 황종희에게 은거할 것을 권했다. 그의 <우경시>에서 "각유호산사편왕(各有好山思便往), 경무장책노상최(竟無長策老相催)". 황종희는 그러나 <송석문화망천도>에서 "오가이백팔십봉(吾家二百八十峰), 구제피륙창화시(九題皮陸唱和始)"라고 써서 여유량의 은거요청을 완곡히 거절했다.

 

은거에 대한 입장차이는 그래도 두 사람의 우의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황종희의 <복진등엄서>와 여유량의 <종채시>는 두 사람의 인생태도의 차이를 더욱 드러나게 보여준다. 여유량은 이미 대세가 기운 상황하에서도 전력을 투입하여 정주리학(程朱理學)의 연구와 보급에 매진하고 청나라조정에 대하여는 대항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황종희는 일찌기 적극적인 항청에서 저서입설로 방향을 바꾸면서 청나라조정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다.

 

천지원기(天地元氣)

 

지천명에 들어선 후의 이런 변화는 아마도 바로 황종희가 '통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황종희는 일생동안 여러번 청나라조정의 부름을 거절한다. 큰 절개에 있어서는 지적할 만한 점이 없다.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는 결심은 황종희가 <사시부선생묘지명>이라는 글에서 분명히 밝혔다: "유민(遺民)이라는 것은 천지(天地)의 원기(元氣)이다. 그러나 사(士)에게는 각각의 분(分)이 있다. 조정에 앉지 않고 연회를 베풀지 않는다. 사의 직분은 벼슬에 나가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일 뿐이다." 확실히 그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不仕)"를 유민의 최고원칙으로 삼았고, 죽을 때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황종희는 너무 장수했다. 1695년까지 살아서 향년 86세였다. 오래 살다보니 욕을 많이 본다. 역사는 황종희와 그의 고통속의 기나긴 인생을 오해했다. 그러나 그가 역사에 보답한 것은 천추에 남을 문화의 장성이다. 그의 후반생의 모순심리상태는 청나라조정을 유한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청나라정부의 문화해소정책앞에서 전체 한족선비의 무리가 전체적으로 몸부림치고, 망설이고 배회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마도 황종희가 임종시, 시신이 빨리 썩도록 기이한 유언을 남긴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산발하고, 변발로 묶지 말아라; 맨몸으로 묻고, 만주족의 이민족 수의를 입히지 말라; 석관에 놓고, 빨리 썩게 하라.

 

황종희의 마음 속에 그의 일생은 실패한 것이다; 부친이 피살되었을 때, 그는 함께 대항하지 못했다; 스승인 유종주(劉宗周)가 단식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그는 항청을 위하여 급히 떠나버린다; 친구들이 항청전투에서 순국했을 때, 그는 여전히 구차한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전투도 하고, 항쟁도 하였지만, 전쟁터에서 죽지 않았다. 오히려 80여세의 고령까지 살아남았다. 그의 만년의 사업은 세상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단절되지 않은 불의 씨

 

황종희가 죽었을 때, 일찌기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한 적이 있는 전우 및 그와 나란히 이름을 날렸던 동시대의 유로(遺老)들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심지어 그보다 스무살이나 어리고 처음에는 지동도합(志同道合)하였으나 나중에는 악어절교(惡語絶交)한 여유량도 이미 168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55살까지 살았던 강남재자는 명나라유민의 정신항쟁사를 그의 사후 수십년까지 이어갔다. 사상으로 말하자면, 주자를 받들고 왕양명을 배척한 여유량은 황종희 혹은 왕부지보다 뛰어난 견식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유량은 "입지중절(立志重節)"을 아주 중시했다. "춘추의 대의는 군신의 관계보다 커서 역중(域中) 제일사(第一事)이다"

 

그가 보기에, 이하지변, 민족절개는 천하역중 제일사일뿐아니라, 더더욱 사람으로 살아가고 입신하는데 근본이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그가 황종희의 절개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의 우의는 이미 회복할 수없는 금이 가게 된 것이다.

 

여유량은 존군비신(尊君卑臣, 임금을 받들고 신하를 낮추다)을 반대했고, 황제와 신하의 관계는 부자관계와 같지 않으며, 의(義)를 중시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는 신하가 임금을 모실 때, "모두 백성을 위하여야" 하고, 고관후록을 위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집안에 엄청난 재산을 모아놓고 국은을 입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아주 멸시했다.

 

이런 이단사상은 아직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지 못한 청왕조에 있어서 아주 위험한 것이었다. 불이 씨는 뿌려졌다. 그러면 넌젠가는 불이 붙는다. 그가 죽은 후 수백년간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한 것은 그가 죽은지 49년후에 벌어진 '문자옥'이다. 여유량이 사망한 후, 그의 제자 및 호남 사람인 증정(曾靜)등은 그의 학설을 받들어,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나중에 증정은 천섬총독 악종기의 반란을 부추긴다. 그리하여 고발당해 하옥된다. 심지어 여유량의 두 제자도 만청의 칼아래 희생당한다.

 

이번 문자옥은 반청선전에 관련되었을 뿐아니라, 실질적인 모반활동까지 있었다. 그리하여 더더욱 옹정제가 친히 나서서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을 써서 스스로를 변명한다. 그리고 여유량과 변론한다.

 

죽은지 수십년된 여유량은 만청황제를 아주 화나게 만들었다: 강희제때의 '주삼태자안', 옹정때의 증정모반안, 건륭때의 제주화(齊周華)반서안은 모두 여유량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만청조정의 전성기인 3대황제때 모두 이 붓을 든 문인때문에 골치를 썩였다. 그래서 증정사건이 발생한 후 여유량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나중에 60여명이 모두 북방으로 유배보내어진다.

 

궤이한 것은 청나라조정이 여유량의 관을 열었을 때, 그의 시신위에 붉은 비단이 덮여 있는데, 비단에는 "중견천일(重見天日)"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불의 씨는 확실히 꺼지지 않았다. 신해혁명후, 혁명당인이며 국학대가인 장태염은 특별히 동북으로 가서 여유량의 후손을 찾는다. 그는 보았다. 여씨집안의 자손은 춥고 힘든 땅에서 여전히 조상의 유훈을 지켰다: 후예들은 많은 사람이 훈장, 의약, 상업을 업으로 삼았다. 비록 태예(台隸)이지만, 스승을 구하는 자들은 여씨를 모셨다. 죄를 범한 관리들이 변방으로 유배를 오면 반드시 그들을 찾았다. 그래서 선비들이 감히 가볍게 보지를 못했다. 그 후예들도 스스로를 굽히지 않았다. 처음에 개원, 철령이외는 모두 오랑캐의 땅이었고 글을 읽고 글자를 아는 자가 없었다. 치치하얼사람들을 책을 읽을 줄 아는데, 여용회의 후예가 유비를 가서 가르친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니, 용하변이(用夏變夷)의 공로가 현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