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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청나라 황제들과 티벳불교

by 중은우시 2012. 6. 9.

글: 낙방진사(落榜進士)

 

청태종은 티벳의 국면을 아주 중시했다. 당시 중원은 명나라의 통치하에 있었으나, 이미 부패가 극심해서, 전국각지에 농민반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티벳도 당시에 각종 세력이 병존했다. 청태종은 당시 티벳의 세력분포를 감안하여, 달라이라마를 주요한 친구로 삼고 이를 유지하고자 한다.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한 후, 순치제는 여러번 달라이라마를 북경으로 초청한다. 1653년, 달라이라마 5세는 삼천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티벳에서 출발하여 북경에 도착한다. 순치제는 최고의 예의로 그를 접대하고 후한 상을 내린다. 달라이라마 일행은 청나라로 하여금 티벳과의 단결을 이루게 하였을 뿐아니라, 다른 소수민족의 민심을 얻게 만들었다. 청나라의 티벳지역을 회유한 것은, 변경정책에서 커다란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순치제는 불교를 아주 좋아하여 거의 광적인 수준이었다. 그의 일생은 전설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는 탈속한 승려생활을 흠모했을 뿐아니라, 동악비를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동악비가 낳은 유일한 사내아이는 요절하고 만다. 그리고 동악비는 아주 비통해하며 22살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동악비가 죽은 후, 순치제는 감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하루종일 우울해 힜다. 그는 불교의 장례의식으로 동악비를 화장하고, 그녀가 불교의 비호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심지어 민간에서는 순치제가 동악비를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서 승려가 되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청나라황ㅇ제중 강희제는 가장 개방적이고 중국과 서양의 학문을 모두 익힌 황제이다. 그러나, 강희제때 일찌기 '예의지쟁'이 일어나고, 그는 선교사에 대하여 아주 엄중한 조치를 취한다. 그는 그들을 마카오로 쫓아내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부터, 청나라는 백년간 서양종교를 금지하게 된ㄴ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티벳불교의 국내전파를 도와준 셈이 되었다.

 

옹정제는 불교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 정도는 청나라때의 그 어느 황제도 비할 바가 못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불교경전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심지어 자신이 불교선종어록을 편찬하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 "원명거사(圓明居士)"라 칭하며, 일생동안 승려들과 널리 사귀었다. 그리고 대사의 지도하에 좌선을 하여 불교의 '삼관(三關)'을 돌파한다. 그리하여 아주 높은 불법의 경계에 도달한다. 옹정8년, 옹정재는 큰 병을 앓는다. 병을 치료하고 건강장수하기 위하여 옹정제는 전국각지의 '술사'를 구하고 이때부터 그는 연단에 푹 빠진다. 중국역사상 제왕들은 장생불로를 기구했다. 그러나 15,6명의 황제는 모두 단약중독으로 사망한다. 옹정제가 일찍 죽은 것도 많은 사학가들은 그가 단약을 지나치게 복용하여, 납, 수은, 유황, 비소등의 중독으로 죽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황제가 되기 전에 거주했던 옹왕부를 황제에 즉위한 후 옹화궁으로 개조한다. 건륭제때는 라마사묘(喇嘛寺廟)로 개조하여 현재에 이른다. 옹화궁은 관광지일 뿐아니라, 많은 외지인들이 이곳에 와서 향을 사르고 기도한다. 듣기로 아주 영험하다고들 한다.

 

건륭제도 불교를 신앙했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장춘거사(長春居士)"라 한다. 그는 일생동안 6번 강남을 순유하고 많은 명산과 사원에 가보았다. 또한 친히 편액을 써서 주기도 했다. 그는 "주공(周孔)"사상으로 선학(禪學)을 지도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통일불교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건륭47년(1780년), 칠월, 건륭제는 승덕 피서산장에서 당시 티벳의 정치를 주재하던 판첸라마 6세를 접견한다. 그리고 판첸라마를 위하여 판첸행궁을 별도로 만든다. 판첸 6세의 일행은 건륭제의 다가오는 70세 생일을 축하라러 홨다. 판첸 6세는 북경에서 2개월간 불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아쉽게도 돌연 천연두를 앓아 세상을 떠난다. 기실 건륭제가 피서산장에서 판첸일행을 접견한 것은 그들이 천연두에 감염되지 않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것은 당시에 회복할 수 없는 슬픔을 가져다 준다.

 

가경제, 도광제에 이르러, 티벳불교를 중시하는 정책은 약간 약화된다. 그러나 '강건성세'를 거친 후 청나라의 국력은 이미 쇠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순치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때는 만주족의 주도하에 티벳불교가 높은 응집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만주족, 티벳종, 몽골족의 3개민족을 정신적으로 연합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하여 변방을 안정시키는 정치적 도구가 된다. 동시에 중앙을 공고히 하는 하나이 수단이었다. 청나라의 통치자들은 성공적으로 종교로 북방과 서남방의 민족들을 통합시킬 줄 알았고, 국가의 통일과 단결을 유지하는데 커다란 작용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