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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동악비(董鄂妃)의 신세내력

by 중은우시 2012. 6. 5.

글: 자일(子逸)

 

효헌황후(孝獻皇后) 동악씨(董鄂氏)는 바로 역사상 유명한 "동악비"이다. 그녀는 순치제(順治帝)가 평생 사랑한 홍안지기이다. 전설에 따르면, 순치제는 그녀가 병사하자,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동악비는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녀의 신세내력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지금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의 신세내력은 도대체 어떠할까? 필자는 여기에서 그녀의 신세내력의 수수께끼를 풀어보고자 한다.

 

동악비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사회에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진회하(秦淮河)의 명기(名妓) 동소완(董小宛)이라는 설

 

<청궁연의> <청궁십삼조>등 소설은 모두 효헌황후 동악씨를 진회하의 명기 동소완이라고 적었다. 간략한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청나라군대의 총사령관 홍승주는 원래 호색한이다. 일찌기 '진회팔염'(마상란, 변옥경, 이향군, 유여시, 동소완, 고미생, 구백문, 진원원)의 명성을 들었다. 특히 그중에서 동소완을 흠모했다. 홍승주는 강남을 점령했을 때, 과연 동소완을 생포한다. 그리고 그녀를 집안에 숨겨두고 혼자서 독점하고자 한다. 그러나 동소완은 죽어라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홍승주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부득이하게, 순치2년(1645년) 동소완을 황궁에 바친다. 그리하여 순치제의 총비가 된다. 일설에 따르면, 동소완은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에 포로로 잡혀서 입궁했다고 한다.

 

다만, 동소완설은 성립될 수 없다. 동소완은 역사상 확실히 존재한 인물이다. 이름은 백(白)이고, 자는 청련(靑蓮)이다. 명나라 천계4년(1624년)에 태어났고, 진회하의 명기이다. 숭정15년(1642년), 19살된 동소완은 기적에서 빠져나와 그녀보다 14살 많은 저명한 '사공자(四公子)'(방이지, 진정혜, 후방역, 모양)중 하나인 모양(冒襄)의 첩이 된다. 두 사람은 진지했고, 서로를 존경했다. 전란중에, 부부 두 사람은 유랑을 하면서 9년간이나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동소완은 결국 과도한 피로로 순치8년(1651년) 정월 초이틀 병사한다. 당시 나이 28살이었다. 여고(如皐) 창씨(昌氏)의 영매암(影梅庵)에 묻힌다.

 

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동소완과 동악비를 연결시켰을까? 아마도 두 사람의 성명에 '동(董)'자가 들어있고, 두 사람이 모두 경국경성의 절색가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부 문인들이 야사를 쓸 때,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하여, 혹은 청나라황제를 고의로 중상모략하기 위하여, 이화접목의 수법을 써서, 동소완을 동악비라고 한 것일 것이다.

 

둘째, 양친왕(襄親王) 푸진(福晋, 부인)설

 

현재 많은 저술과 영화, 드라마에서는 동악비가 원래 양친왕의 푸진(부인)인데 나중에 순치제에 의하여 궁으로 들어가서 총비가 되었다고 한다. <탕약망전>에는 탕약망의 이런 회고가 기록되어 있다: 순치제는 한 만주인인 군인의 부인에 대하여 불같은 사랑이 일었다. 이 군인은 이로 인하여 부인을 혼냈는데, 그 사실을 들어서 알게 된 천자는 친히 그의 뺨을 때린다. 이 군인은 그리하여 원한을 품고 죽는다. 혹은 자살하여 죽었다. 황제는 바로 이 군인의 미망인을 궁안으로 불러들여 귀비에 봉했다. 이 귀비는 1660년에 아들을 하나 낳는다. 황제는 그를 장래의 황태자로 정하려 했다. 그러나, 몇 주일후 이 황자는 사망하고, 그 모친도 얼마후 죽었다. 황제는 애통해 하며, 죽겠다고 난리를 치고, 모든 것을 상관치 않았다.

 

이 황자가 몇째 황자인지, 생모는 누구인지? 탕약망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푸린은 모두 8명의 황자가 있었다. 현엽을 제외하고, 7명의 황자중에서 황이자, 황오자, 황육자, 황칠자, 활팔자등 5명은 모두 강희제때 죽었으니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하면 황장자 뉴뉴(鈕鈕)와 황사자만 남는다. 뉴뉴는 순치8년(1651년) 십일월 초하루에 태어나서, 순치9년(1652년) 정월 삼십일에 죽는다. 겨우 89일간 살아 있었다. 생모는 서비(庶妃) 파씨(巴氏)이다. 이 아들은 비록 일찍 죽었지만, 순치만년에 죽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생모는 서비 파씨로 귀비에 봉해진 적이 없다. 그러므로, 뉴뉴와 파씨는 탕약망이 얘기하는 황자와 그 귀비가 될 수 없다. 이제 황사자만 남는다. 이 아들은 순치14년(1657년) 십월 초칠일에 태어나서, 순치15년(1658년) 정월 이십사일에 죽었다. 생모는 황귀비 동악씨이다. 즉 나중의 효헌황후이다. 동악씨는 순치17년(1660년) 팔월 십구일에 죽는다. 이렇게 보면, 탕약망이 얘기한 것은 황사자와 황귀비 동악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 차이가 있다. 하나는 황사자의 생년이 1657년인데, 탕약망이 얘기한 것은 1660년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황사자의 생모는 황귀비이지 귀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정사설(正史說)

 

효헌황후(1639-1660) 동악씨, 만주 정백기 출신, 내대신 악석(鄂碩)의 딸이다. 조적(祖籍)은 요녕 퉁가강(佟佳江)유역이다. 18세에 입궁한다. 세조는 그를 아주 깊이 아꼈고, 후궁중 가장 총애했다. 순치13년(1656년) 팔월, 현비(賢妃)가 된다. 십이월, 황귀비(皇貴妃)에 오르고, 행책입례(行冊立禮)한다. 그리고 파격적으로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 부친은 삼등백(三等伯)이 되었다. 다음 해, 동악씨는 황사자를 낳는데 겨우 3개월만에 요절하고, 이름도 지어주지 못했으며, 화석영친왕(和碩榮親王)에 봉한다.

 

동악씨는 순치17년(1660년) 팔월 십구일에 죽는다. 세조는 애통이 극에 달해서, 친히 행장을 지어 추모했고, 효헌장화지덕선인온혜단경황후라는 시호를 추서한다. 강희2년(1663년) 육월, 청동릉의 효릉에 합장한다.

 

동소완이라는 설은 이미 부정되었다. 남은 것은 양친왕의 푸진이라는 설과 정사의 설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양친왕 푸진이라는 설에 더 기울어진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만혼의 비밀. 청나라는 순치제때 규정했다. 만주족 팔기의 나이 13세부터 16세의 여자는 반드시 3년에 1회씩 있는 황제의 수녀(秀女) 선발에 참가해야 한다. 선발되면, 궁안에 남아서 황제를 모시며 비빈이 되거나 혹은 황실자손에게 하사하여 푸진이 된다. 수녀선발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은 시집갈 수 없다. 그런데, 동악비는 입궁시에 이미 18세였다. 일찌기 수녀선발의 나이를 넘어섰다. 결혼때 이미 '노처녀'인 셈이다. 만일 그녀가 악석의 딸이라면, 게다가 경국경성의 미모를 지니고 있다면, 어찌 이렇게 나이들어서야 황제에게 시집갈 수 있었을까? 이는 그녀가 황제에게 시집가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2) 시간의 우연일치. <청사고>의 기록에 따르면, "양소친왕(襄昭親王) 보모보고르(博穆博果爾)는 태종의 열한째 아들이다. 순치12년, 양친왕에 봉해진다. 13년, 죽었고, 시호를 내리다. 자식이 없으며, 직위는 박탈된다." <세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순치12년 이월 이십일일, 황제의 동생 보모보고르를 화석양친왕으로 봉한다. 순치13년 칠월 초삼일, 양친왕이 죽는다. 초사일 에부가 진언하여 화석양친왕의 장례를 후히 치러준다. 정해진 횟수보다 1번을 더 제사지낸다. 공부에서 분묘와 사당을 짓는다. 초육일, 황상이 건청궁으로 이주해 거주하고, 화석양친왕의 장례로 경하례를 하지 않는다. 초구일, 예부는 비를 책봉하는 길일을 팔월 십구일로 택한다. 황상은 화석양친왕이 사망하였음으로 거행을 차마 할 수 없다고 하다고 팔월 이후의 길일을 다시 잡으라고 하다." 양친왕이 칠월에 막 죽었는데, 팔월에 동악씨가 입궁하여 현비가 된다. 이 시간은 너무나 교묘히 들어맞는다. 그리고 관건은 이런 말이다. "예부가 비를 책봉하는 길일을 팔월 십구일로 택한다. 황상은 화석양친왕이 사망하였음으로 거행을 차마 할 수 없다고 하고, 팔월 이후의 길일을 다시 잡으라고 하다"라는 문구이다. 순치제는 원래 팔월 십구일에 비를 책봉하려 했는데, 차마 거행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가 책봉하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분명히 동악비일 것이다.

 

(3) 모후가 싫어함. 정사건 야사건, 모두 이렇게 동악비를 묘사한다: "동악씨는 천성적으로 빙기옥질이고, 국색천향이다. 행동거지가 법도가 있었고, 태도가 단정했다. 황후의 기품이 있었다. 그녀는 <여계> <열녀전>을 숙독했고, 또한 바느질이나 집안일이 모두 능숙했다.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유명했고, 칭찬을 많이 받았다. 입궁후, 모후를 존경하고 효도했으며, 부군을 사랑하고 아꼈고, 후비들과 우애있게 지냈고, 친정사람들은 나서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글을 읽어 이치에 밝았고, 용모도 뛰어나고 덕도 있었다. 시어머니에 효도를 다하는 며느리였다. 그런데, 효장황태후는 그녀를 좋게 보지 않았다. 설마 동악비가 후궁의 총애를 다 받아서, 순치제의 황후이자 효장황태후의 조카딸의 사랑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효장황태후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동악비가 후궁중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하여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효장황태후도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순치제의 원황후는 당시 도르곤과 효장황태후가 공동으로 정한 것이다. 순치제는 도르곤을 미워해서 황후를 싫어했다고 하더라도 이치에 맞는다. 하물며 동악비는 총애를 받는다고 하여 발호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좋은 며느리를 효장황태후가 좋아하지 않다니, 아마도 동악비가 입궁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원래 양친왕의 푸진이다. 순치제가 동생의 처를 강제로 빼앗은 것에 효장황태후는 불만이 컸다. 그래서 동악씨를 미워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동악비는 내대신 악석의 딸이다. 수녀선발때, 태종의 열한째 아들인 보모보고르의 푸진이 된다. 당시 청나라에는 귀족부인들이 차례로 궁에 들어가서 후비를 모시는 제도가 있었다. 동악비는 자주 후궁으로 가서 시중을 들었다. 이것은 순치제와 동악비가 만나서 서로 애정이 생길 기회를 부여해준 것이다. 동악씨의 미모와 재능은 순치제의 마음을 끌고, 동악비의 남편은 자주 전쟁터에 나가서 집을 비웠다. 혼자서 외롭게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순치제에게 호감이 생겼다. 순치제는 동악비를 데려가기 위하여, 동생에게 양친왕이라는 작위를 내린다. 이것은 양친왕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목숨을 잃는다. 순치제는 순조롭게 동악씨를 입궁시켜 비로 삼는다. 당시 청나라는 이미 장성을 넘어와 북경에 자리잡았으므로, 한족의 유가사상을 받아들였다. 동악씨는 명불정언불순(名不正言不順)의 며느리이다. 효장황태후가 차갑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는 승리자의 손에 쓰여진다. 정사는 자연히 순치제가 동생의 부인인 동악씨를 강제로 빼앗았다고 적지 않았다. 그저 이 부분을 누락시켰다. 동악씨가 18세에 입궁하였다는 숫자만 남겨두었다.

 

동악씨가 어떻게 입궁하였든지간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녀를 대했든지간에, 어쨌든 그녀는 순치제의 영원한 사랑을 얻는다. 이것은 순치제의 후궁들 중에서 다른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