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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에릭 리델(Eric Liddell): 중국에서 나고 죽은 영국인 올림픽금메달리스트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왕작화(王作化) 

 

1981년, 올림픽정신을 표현한 영국의 영화 Chariots of Fire(중국명 <열화전차>)는 오스카상의 7개분야에 노미네이트되고 최종적으로 4개분야의 오스카상을 받았다(최우수영화, 최우수각본, 최우수음악, 최우수의상). 영화는 진실한 이야기를 개편하여 만든 것이고, 주인공의 원형은 파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에릭 리델(Eric Liddell)이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고 중국에 묻힌 영국인이다.

 

에릭 리델, 1902년 1월 중국 텐진에서 출생한다. 스코틀랜드계로 중문이름은 이애예(李愛銳)이다. 리델은 어려서부터 중국어를 말하고, 중국복장을 입고, 중국문화의 훈도를 받았다. 그는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5살까지 살다가 영국으로 공부하러 간다. 리델은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청소년기에 비범한 운동재능을 보인다. 대학에 다닐 때, 그는 에딘버러대학 럭비팀에 들어간다. 그리고 럭비팀의 최고스타가 된다. 그는 달리기분야에서 뛰어난 잠재력을 보였다. 1924년 파리올림픽 남자400미터경기에서 리델은 일거에 금메달을 따낸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기록을 세우는데, 이 기록은 35년을 유지한다. 1959년이 되어서 비로소 깨진다.

 

파리올림픽이 끝난 후, 리델은 1925년 8월, 18년간 떠나있던 출생지 텐진으로 돌아온다. 그는 중국의 낙후한 교육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가 재직하고 있던 신학중학(新學中學)은 1902년에 건립된 영국교회학교였다. 이 학교는 신식교육을 통하여 오필현(吳必顯)등 여러 유명한 인재들을 배양한다. 이 학교에서 리델은 고등학교 이공과목과 영문을 가르킨다. 리델이라는 스코틀랜드출신의 달리기선수가 오자, 신학중학의 체육교육도 중시된다. 학생들이 배우는 바도 적지 않았다. 리델은 세계육상경기장의 기준과 자신이 경기에 참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텐진 민위안(民園)체육관을 개조하는데, 많은 귀한 의견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트랙의 구조, 조명설비, 관중석의 배치등. 개조후의 민위안체육관은 당시 중국에서 첫손꼽는 선진적인 경기장이 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국제적인 경기를 개최한다.

 

"9.18"사변이후 중공지하당의 영도하에, 텐진의 애국학생은 텐진학생연합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여러 형식의 구국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중국학생의 구국활동에 대하여 리델은 열정적인 관심과 지지를 보낸다. 백령묘대첩이후, 리델은 자신의 교사 및 선교사의 신분을 이용하여 사회각계에서 항일자금을 모금한다. 그리고 현재 교회는 집을 잃고 떠도는 동북등지의 난민을 수용하고 먹을 것을 준다. 그리고 전투에서 부상당한 난민을 기독교병원에 보내어 치료받게 해준다. 그는 사랑으로 이들을 돌본다. 노구교사변후, 리델은 현지교회와 신도들에게 인애정신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해줄 것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호소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일본군의 포화를 무릅쓰고 여러번 전투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와 민중을 운반한다. 같은 해 11월, 신학중학의 정상적인 교육이 중단된다. 리델은 전투중인 소장현으로 가서, 영국런던교회가 설립한 이 현의 한 자선병원에서 물자와 자금을 운송한다. 그리고 무상으로 참전하여 부상한 중국군인과 민간인을 치료한다. 1939년 2월, 일본군은 7명의 중국사병을 체포한다. 그 중 2명의 부상병은 큰 소리로 군중들에게 왜적과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일본군에 의하여 그자리에서 칼을 맞고 쓰러진다. 일본군이 떠난 후, 현지촌민은 그중 1명의 부상병이 아직 살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를 숨겨준다. 리델은 소식을 듣고, 즉시 자전거를 타고 이 존경할만한 부상병이 있는 곳으로 밤길을 60리나 달려간다. 그리고 적시에 그를 현지의 병원으로 보내서 목숨을 구하게 해주었다. 일본군이 당시에 공공연히 서방국가의 재중국 거주인원과 기구를 건드리지는 못했으므로, 이 항일군인은 교회병원의 치료로, 신기하게 살아났다.

 

일본군이 텐진을 전면점령한 후, 각 학교의 애국학생들은 '독서회'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각종형식의 항일투쟁을 전개한다. 리델은 핵심학생들을 보호해줄 뿐아니라, 항일전단을 보관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경비에서도 능력이 미치는 범위내에서 지원한다. 일본군이 엄밀하게 봉쇄하여, 근거지의 각종물자와 약품이 부족했다. 일부 중국항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국제우호인사들은 앞장서서 근거지물자운송임무를 담당한다. 리델은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이용하여, 텐진에 거주하는 얜징대학의 영국적 교수인 Mical Lindsay(林邁可), 오스트리아 의사인 Richard Frey(傅萊), 선교사 로란츠등과 함께, 무선전기통신기자재, 약품등 물자를 구매하여 근거지로 보내주었다. 얼마후, 텐진의 영국군이 철수하면서, 리델이 항일운동을 지지하는 활동은 아주 곤란해진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갖은 방법으로 밀수업자를 통하여 근거지로 필요한 소금, 사탕, 성냥, 건전지, 종이, 약품등 물자를 공급한다.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리델과 텐진의 외국인들은 교민신분의 보호를 상실한다. 임신한 부인과 두 딸을 보호하기 위하여, 리델은 그녀들을 카나다로 보낸다. 그후, 일본헌병특무기관은 돌연 급습하는 방식으로 텐진지구에서 생활하고 근무하는 모든 외국교민을 체포한다. 일본의 이번 대체포활동에서 레딜은 비록 사전에 소식을 들었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일본의 수색체포를 피하지 못한다. 1943년 3월, 리델은 산동 웨이현의 일본군포로수용소에 갇힌다.

 

웨이현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리델은 여전히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전쟁중 모두 2008명의 외국교민(司徒雷登같은)이 이 곳에 갇힌다. 거기에는 327명의 아동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화학 소책자를 써서 갇혀있는 아이들에게 보충수업을 해준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체육활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올림픽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나, 포로수용소내의 비인간적인 박해로 리델은 신체가 심각하게 망가진다. 사람이 살이 빠져서 뼈만 남는다. 마지막에는 뇌종양으로 진단받는다. 1945년 2월 21일 밤, 리델은 중국의 토지에서 사망한다. 나이 겨우 43살이다. 일본의 항복선언에서 175일이 남은 때였다.

 

지금 리델이 사망한 곳에는 중국인민들이 그를 위하여 세워놓은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의 비신(碑身)과 비좌(碑座)는 각각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에는 중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날개를 떨치고 높이 날아야 한다. 날개를 펼친 매처럼; 그들은 앞으로 달려나가야 한다. 영원히 피로하다고 하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