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소미(夏小米)
유구는 명,청시대에 중국의 번국(藩國)이었다. 17세기초, 일본 사쓰마번(薩摩藩)은 무력으로 유구를 침입하고, 나중에 일본의 속국으로 취급한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후, 사쓰마번은 가고시마번(鹿兒島藩)으로 바귀나 여전히 유구를 관장한다. 그러나 유구는 청나라와도 특수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에 강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유구는 1854년, 1855년, 1859년 각각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때 사용한 것은 모두 청나라의 함풍(咸豊)연호였다.
1874년 5월 18일, 일본군은 대만을 침략하기 시작한다. 영국공사 웨이드의 조정하에, 청일쌍방은 여러번의 담판을 거쳐 1874년 10월 30일, <청일대만사건전약>을 체결한다. 청나라정부는 굴욕적으로 타협한다: 일본애 무휼(撫恤), 건물신축등 비용 50만냥백은을 지급하고 일본군의 대만철수를 얻어낸다. 그리고 전약(專約)에는 일본이 제출한 문구를 추가시킨다: "대만생번은 일찌기 일본국 속민을 함부로 살해하였다." 일본의 대만침략은 원래 "백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거였다."는 등의 내용이다. 이는 유구가 일본의 속국이라는 것을 묵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1872년 10월, 일본은 유구왕자가 일본에 축하하러 온 기회에, 유구국왕 상태(尙泰)를 유구번왕(琉球藩王)으로 봉하고, 일본 화족(華族)에 편입시킨다. 외무성은 관리를 유구에 파견하여 유구의 외교를 주재한다. 대장성은 관리를 파견하여 유구의 조세납부를 책임진다. 동시에 서방각국에 조회를 보내어 유구가 이미 일본에 귀속되었다고 말한다. 유구와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삼국과 체결한 조약을 일본정부가 체결한 조약으로 고친다.
1875년, 일본정부는 유구에 일본연호를 쓰도록 강제한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중국에 조공하던 것과 청나라황제가 즉위시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던 관례를 폐지시키기로 결정한다(그 해에 광서제가 즉위한다). 복주(福州)의 유구관을 폐쇄하고, 일본의 주하문영사관이 유구의 무역사무를 관장한다. 유구국왕즉위시 중국황제의 책봉을 받던 관례도 폐지하고, 동시에 병력을 파견하여 유구에 주둔시킨다.
1876년, 일본은 다시 유구의 사법권, 경찰권을 인계받는다. 유구인이 중국에 가려면 반드시 일본이 발급한 여권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유구국왕이 고위관리를 중국에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나, 청나라정부는 일본과 무력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단순히 "이치를 다져서 힐문한다(據理詰問)"는 방침으로 일본과 담판한다. 그러나, 청나라의 주일본공사 하여장(何如璋)이 일본외무성에 여러번 질문과 항의를 제기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다.
1879년 4월, 일본은 철저히 유구를 병합한다. 유구번을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개명한다. 국왕 상태와 왕실인원을 동경으로 이송한다. 이렇게 유구국은 멸망하다. 7월 2일, 유구국 상태의 매제인 향덕굉(向德宏)등이 천진으로 가서, 이홍장을 알현한다. 그리고 글을 올려 도움을 요청한다. 청나라정부는 이를 가지고 일본과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출병하지는 않는다. 유구국의 상방통사(上訪通事)인 임세공(林世功)은 북경에서 자살로 항의한다.
전하는 바로는, 유구국에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며, 유구국 사신이 오문의 바깥에서 오랫동안 무릎꿇고 대곡(大哭)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자신을 챙기기도 급급했고, 유구에 대한 책임을 부담할 힘이 없었다.
2차대전말기, 미, 영, 소, 중의 4대국이 일본패전후, 중국이 일본점령에 참여하기로 했으며,유구의 지위에 대하여는 당시에도 논쟁이 있었다. 1943년 5월 <송자문일기>를 보면 중국의 주미대사 송자문은 일찌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후에 중국이 동북, 대만 및 유구를 회수해야 한다고 말했고, 루스벨트는 유구를 중국에 넘기는데 동의했을 뿐아니라, 월남, 한반도까지 중국에 관할을 넘기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카이로회의에서, 유구문제는 논의되지 않는다. 아마도 송자문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과 관련있을 것이다.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돌연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냉전이 시작된다. 중국내전이 발발하여 대륙과 대만성이 대립한다. 그리하여 이 일은 결론이 나지 않는다. 미국은 단독으로 일본과 유구를 점령한다. 1972년 미국은 유구를 일본에 넘겨주기로 결정한다. 조어대(센카쿠제도)문제도 이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당시 대만의 국민정부는 항의를 표시한다. "중화민국외교부"는 오키나와에 독립사무처를 두었다. 이를 통하여 유구가 이미 일본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는 것을 나타냈다. 2006년 5월, 민진당이 대만에서 집권하면서, 유구귀속을 인정하는 입장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중유문경협회주유구판사처'를 "대만주일경제문화대표처주유구판사처"로 바꾼 것이다. 주일대표처가 직접 관할하도록 바꾸었다. 이것은 정식으로 유구가 일본에 귀속되었다는 현상을 인정한 셈이다.
국제적으로 유구복국운동이 있었으나, 지금은 미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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