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설이(雪珥)
유요해(劉堯海)는 정말 기뻤다.
이 대명제국의 양광총독이 즐거워하는 이유는 외국인들이 스스로 나서서 대명제국을 위하여 '해적'을 소탕해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는 만력18년(1580년) 팔월의 어느 날이었다. 유요해는 마카오에서 온 특수한 손님을 접견했는데, 마카오 현지인인 오장(吳章)과 통역 채흥전(蔡興全) 등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금발벽안(金髮碧眼)의 불랑기(佛郞機) 사람(지금의 포르투갈인)들이었다.
외국인들은 통역을 통하여 총독대인에게 그들이 스스로 선박과 무기를 준비하여, 조정을 도와 섬라(暹羅, 태국)로 가서, 그곳에 자리잡고 있던 중국 '해적' 임도건을 소탕하겠다고 말하였다.
이때, 마침 섬라의 밀사(密使)인 오쿤나라(握坤哪喇)도 광저우에 와 있었다. 그는 막 유요해를 접견했고, 임도건이 그 나라에 와 있으며, "상인들에게서 물건을 빼앗고, 대니국(大泥國)을 차지하려고 한다"고 했다.
이런 내용을 보고받은 후, 유요해는 기뻐하며 섬라의 밀사에게 '은패를 하사하고' 섬라군대에게 '우리 군대와 힘을 합하여 공격하자'고 얘기했다.
이때, 복건순무 경정향(耿定向)도 임도건이 섬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하여 다음 해(1591년) 사자로 주종목(周宗睦), 왕문림(王文琳)을 캄보디아로 파견하였다. 캄보디아에게 섬라와 힘을 합쳐서 함께 공격하자고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이르러, 대명왕조의 주도하에, 중국, 섬라, 캄보디아, 마카오 포르투갈인들로 구성된 '국제연합군'이 형성되고, 임도건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이전의 모든 '해적'과는 달리, 임도건은 가난한 백성출신이 아니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차오저우(潮州) 청하이(澄海) 출신의 임도건은 일지기 차오저우의 정부기관에서 '하급관리'를 지냈다. 그러나 어느 부서에서 어떤 직위에 있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관청위주의 사회에서, 젊은이가 안정된 공무윈직위를 버리고, 밀수와 무장밀수의 '리스크'를 지닌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징해현지>>에 따르면, "임도건은 차오저우에서 관직에 있는 동안 죄를 지어 해상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개락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그의 잘못과 밀수사업에 뛰어든 것은 분명히 관련이 있을 것이고, 아마도 그는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밀수업자와 결탁하여 이익을 챙겼을 것이다. 그러다가, 감사등에 적발되어 쫓겨난 것일 것이다.
정부기관을 떠난 임도건은 징해현의 남만에서 무리를 글어모았다. "처음에는 모인 무리가 백명이 되지 않았는데, 오정배를 무너뜨리자 이백여명으로 늘었다. 남만은 바닷가에 있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밀수하기 좋은 곳이었다. 만일 단속이 나오더라도 쉽게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때의 '해적'세계에서는 여러 두목들이 있었다. 오평, 증일본등이 그들이다. 정부는 주요 정력을 이들에게 쏟았다. 척계광과 유대유등 항왜명장들도 큰 해적은 붙잡지만 작은 해적은 놓아두었다. 그들은 역량을 집중하여 큰 해적무리를 소탕했다. 이 와중에 임도건은 실력을 키워갈 수 있었다.
임도건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하는 일을 저지른다. 가정42년(1563년), 3월, 임도건은 돌연 전선 50여척을 이끌고 남오도에서 조안현 남촌 토위와 기하촌 토위를 공격한다. '불태워 죽인 자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일시에 나라를 놀라게 하지만, 곧이어 유대유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여, 대만으로 퇴각한다.
남오전투는 명나라때 '항왜'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전투를 잘하는 척계광과 유대유는 대단한 적수를 만난다. 그 적수는 당시 최대의 '해적'인 오평(吳平)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저항한다. 관군들이 놀란 것은 해적들이 죽을 때까지 투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투의 막바지에는 해안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자결한다. 전투정신이 아주 투철했다. 관군은 포로로 잡은 '해적'을 참형에 처하는데, 그 수가 15000여명에 달하였다. 오평의 잔여부대 700여명은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남오도는 피가 흘러 강을 이루었고,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룰 정도였다. 민간에는 "유룡척호(兪龍戚虎), 상인여토(殺人如土)"라는 말이 돌았다.
사실, 해적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것은 바로 수년전 정부가 신의를 저버리고 왕직(王直)을 유인살해한 때문이었다. 해적들은 더 이상 정부를 믿지 않았다. 차라리 끝까지 싸우는 길을 선택한다. 정부의 수차에 걸친 배신은 오평집단의 상하 모두 결사의 항전을 하겠다는 마음만 굳혀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오전투에서 해적들은 죽을 지언정 굴복하지 않았다.
남오전투는 비록 주류사학자들이 보기에 항왜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지만, 정부신용의 '파산'을 의미했다. 이는 아주 치명적인 부산물이었다. '가짜초항(招降)'은 결국 '가짜투항(投降)'을 가져온다. 이것은 이후 임도건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조안에서 패배한 임도건은 유대유의 추격에 몰려 팽호로 퇴각하고, 다시 대만으로 간다. 그리고 타구항(打狗港)에 정박하니, 지금의 까오슝(高雄)항이다.
타구항이라는 이름은 원래 원주민인 Makatao족들에게서 유래한다. 그들은 사방에 날카로운 대나무를 심어서 외적을 막았는데, 여기서 '죽림(竹林)'이라는 뜻의 Takao라고 불렀다. 그 발음이 복건어의 "타구(Kakau)'와 비슷하다보니, '타구(打狗)' 혹은 '타고(打鼓)'가 이 지역의 이름으로 굳어진다.
임도건은 무리를 이끌고 타구항으로 오는데, 이는 대륙에서 대만으로 온 첫번째 대규모 이민무리였다.
임도건은 대만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 이 곳은 오래 머물 곳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일부 인마를 남긴 후, 그는 대부대를 이끌고 멀리 점성(占城,)으로 간다. 지금의 월남 중남부이며, 중국에서는 '임읍(林邑)'이라고 불렀었다.
기이한 것은 임도건에 대한 공식기록에는 그가 백성의 고혈을 빨아 배를 만든 악마의 이미지인데, 대만에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대만에는 많은 민간전설을 남겼다. 이는 한족이 대만으로 이주한 초기의 구술역사에서 중요한 구성부분을 차지한다. 어찌되었건, 임도건은 대만개발의 서막을 연 것이다. 그후, 다른 해적들, '임봉(林鳳)', 안사제(顔思齊)' 및 이후의 정지룡(鄭芝龍), 정성공(鄭成功) 부자는 대만 초기개발이 주역이 된다.
임도건은 대만을 떠난 후 점성으로 갔다가, 다시 차오저우 부근으로 되돌아온다.
이때, 정국은 거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가정제가 죽고, 그 아들이 즉위하니 바로 명목종이다. 연호는 '융경'이다. 항왜의 제일선에서 활약하던 관리들이 '개혁개방'정책을 신속히 추진하고, 제국은 해금(海禁)을 풀어준다고 선포하며, 민간인들이 동서이양(東西二洋)으로 멀리 무역을 할 수있도록 한다. 이렇게하여 근본적으로 '왜란'을 다스린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융경개관(隆慶開關)"이다.
바로 이해(1567년)의 연말에, 임도건은 부대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두번에 걸쳐 차오저우의 중요거점 징해 계동채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신속히 세력을 확장한다.
이때, '융경개관'의 개혁물결이 밀려왔다. 정부는 '해적'에 대하여 더 이상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쓰지 않고, 회유정책을 쓰기 시작한다. 이들 '화외지민(化外之民)'을 가능한 한 받아들여서 '편호제민(編戶齊民)'하고자 한다. 그리고 해적들간이 갈등을 이용하여, '이적제적(以賊制賊)'하고자 한다. 횡해장군 곽성상, 조양지현 진왕도의 건의를 받아, 정부는 임도건을 회유하여, 그를 이용해서 또 다른 강대하고 명성이 높아서 고위층이 우려하고 있는 '해적' 증일본(曾一本)을 상대하게 하고자 한다. 임도건에게는 '공을 세워서 이전의 잘못을 속죄받으라'고 한다.
그리하여, 융경4년(1570년) 임도건은 신분을 바꾸어 '관군'이 된다.
임도안은 관청에 귀순한 후, 정부를 도와서 작은 해적무리를 소탕한다.
임도건은 귀순시기의 평화로운 발전기회를 이용하여, '다단계'와 비슷한 방식으로 무리를 끌어모은다. 통상적으로 보자면, 정부가 해금을 해제한 후, 밀수 특히 무장밀수는 크게 줄어들어야 한다. 연해의 백성들도 더 이상 법을 어기는 위험한 해적이 되지 않으려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임도건의 세력은 더욱 커질 수 있었을까?
원인은 바로 '융경개관'이 억지로 이루어진 개혁이라는 것이다. 해상무역은 그저 조그마한 틈만을 허용했고, 복건 해징의 월항을 유일한 개방'특구'로 삼았던 것이다. 연해의 모든 대외무역상선들은 모두 이곳으로 와서 번잡한 수속을 거쳐야 했고, 이곳에서 화물을 싣고 출발하며, 입항하여 화물을 검사받아야 했다. 모든 선박은 반드시 '선유(船由, '文引'이라고도 하며 오늘날이 영업허가증에 해당함)'를 받아야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이 제도는 발전되어 나중에는 바다로 나가는 선박의 건조와 운영에 대하여 총량규제를 하게 된다. '동서이양은 각각 선박 44척으로 제한한다'. 피차간에 월경무역을 금지하며, 바다로 나간 후 기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증빙을 모두 갖추고 있더라도 '통왜죄(通倭罪)로 다스린다'고 하였다.
이같이 각양각색의 제한과 엄격한 법집행으로, 상인들은 힘들어했고, 관리들만 배불렸다. '선유'와 '상인(商引)'의 인허가권을 장악한 관리들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해외무역에서는 반드시 담당관리들의 가혹한 잡세를 부담해야 했다. 만력중기에 이르러서는 세수가 심지어 3배까지 징수했다(관세가 300%에 이름). 그리하여 많은 상인들이 파산한다. 다른 한편 관리로부터 착취도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융경개관이후 밀수는 일시적으로 완화되었지만, 곧 권토중래하게 된다.
이번의 새로운 밀수붐은 이전의 해금시기와 차이가 있었다: 해금때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부에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해금만 풀리면, 밀수는 소멸할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체제내의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중앙정부에 개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 해금이 풀렸지만, 관료기구의 착취로 실제로는 인정(仁政)이 가정(苛政)으로 변모한다. 오히려 대외무역상인들의 희망을 꺽어놓고, 밀수를 해야한다는 결심만 굳혀준다. 이러한 절반짜리 개혁은 도 다른 형식으로 핍량위창(逼良爲娼)의 결과를 낳는다. 법을 지키는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쁜 법' 하에서는 '나쁜 백성'이 나오기 마련이다.
'체제내'에서 효과적인 질서를 부여하지 못하자, '체제외'에서 이를 담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지하질서, 그림자질서가 나타난다. 임도건은 풍부한 밀수전과를 지니고 있을 뿐아니라, 수하에 많은 병력을 거느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그가 '관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필마온에 임명된 손오공과 같았다. 천궁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도 그러기 힘든 상황이었다. 자본은 이익을 추구한다. 임도건도 '보호비'를 받기는 하지만 그 비용은 정부의 가혹한 잡세나 관리의 착취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신용도도 정부보다 훨씬 높았다. 그리하여 임도건의 휘하로 들어오는 자가 매일 백명이상을 헤아릴 정도였다.
관복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천도복숭아를 훔치고, 금단을 훔치려 했다. 이러한 원숭이를 조정이 그냥 둘 리가 없다. 양광총독을 맡고 있던 은정무(殷正茂)는 관군에 밀령을 내려 기회를 보아 임도건을 소탕하도록 지시한다. 이때 임도건은 조카로 팽형국(彭亨國, Pahang, 지금의 말레이시아 동부)에서 도이사(都夷使)를 맡고 있던 임무(林茂)의 서신을 받고, 그곳으로 떠나버린다.
이때가 만력원년(1573년)이다. 임도건은 정부에 귀순한지 3년만에 무리를 이끌고 남하한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의 이러한 거동은 중국인의 해외개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임도건은 무리를 이끌고 차오저우를 떠나, 그해(1573년) 이월 십오일, 캄보디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징해 고향사람인 양사(楊四)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는다.
만력6년(1578년) 칠월, 임도건은 캄보디아를 떠나, 차오저우고향으로 되돌아온다. 1달여동안 그는 예전에 숨겨두었던 금은보화를 끄집어내고, 다시 100여명의 무리를 새로 모집한 다음 남하하여 경애(瓊崖)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서 복건양식운송선단과 맞부닥친다. 그는 그 선단을 약탈하고, 남녀200명을 데리고 떠난다.
그후, 임도건은 무리를 이끌고 섬라 부근에 웅거하고, 이름을 임오량(林浯梁)으로 고치고, 상인들을 약탈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였다. 그리고 대니국과 공동으로 공격하겠다는 태도를 취하자, 섬라는 어쩔 수 없이, 임도건과 협상을 하고, 피를 내서 맹세를 한다. 섬라는 절대로 명나라사신이 임도건을 붙잡아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장거정과 민광양성의 관리들과의 서신을 보면, 임도건은 이때 다시 섬라와 연합하여 캄보디아를 공격하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캄보디아의 쑤(蘇)씨성의 국왕과 원한을 맺는다. 장거정은 북경순무 경정향에게, 캄보디아 국왕을 이용하여 임도건을 붙잡드라고 지시한다. 이렇게 하여 만력8년(1580년) 팔월, 섬라의 밀사가 광저우로 와서 임도건의 동향을 보고했을 때, 마침 포르투갈인들도 중국조정을 위하여 일해주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연합군이 결성된 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이 임도건 소탕작전에 가담한 것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이때의 바다에는 실제로 명나라정부, '해적' 및 서방인들의 삼각세력이 각축을 벌였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삼각구도였다.
명나라정부는 서방을 협력파트너로 잡고, 자신의 '해적'을 소탕하려 했는데, 그 이유는 금발벽안의 외국인들은 그저 경제적인 이득을 노릴 뿐이고, 강산을 차지하는데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조대국은 원래 상업이익에는 관심이 없다. 예전에 정화도 하서양때 곳곳에 돈을 뿌려댔을 뿐이다. 해외교민들은 더더구나 명나라가 중시하는 보호대상이 아니었다. 이들 '천조기민(天朝棄民)" 혹은 "천조도민(天朝逃民)"은 명성조 주체의 조령에 따르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비록 멀더라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雖遠必誅)". 그러나, 외국국가를 대하는데 있어서는 명나라정부가 아주 관용적이었다. 그저 칭신납공(稱臣納貢)만 하면 되었다. 자바국왕은 100여명의 천조 사절단을 살해한 악성사건을 일으켰지만, 마지막에는 벌금만 내게 하고 끝을 냈다. 포르투갈인들은 또 하나의 '말잘듣는' 외국에 지나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이 보기에, 중국의 무역상인들은 자신의 합작파트너이면서, 자신들의 경쟁상대방이었다. 명나라가 완전히 쇄국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중국밀수업자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들을 통하여 상품과 보급을 받았다. 명나라가 해금을 풀어버리자, 포르투갈인들은 이제 '냇물을 건넜고 다리를 철거했다' 심지어 왕년의 합작파트너에 대하여도 밀고를 했다. 이를 통하여 조정에서 더 많은 특권을 따내려 한 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은 적극적으로 소탕작전에 가담했을 뿐아니라, 이것을 모두 자비로 했다.
포르투갈인들이 조금씩 삼투해들어온 것은 거의 바닥에 엎드리고 자신을 낮추면서 '화평연변(和平演變)'한 것이다. 일찌기 가정33년(1554년)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정부를 도와서 하아팔(何亞八) 해적집단을 소탕했다. 이를 통하여 광저우와 주변지방에 진입할 수 있었고, 마카오에서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정36년(1557년), 포르투갈인들은 향산 호경오의 '아마적'(마조를 모시는 해적)을 진압하고나서, 마카오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은 명나라정부에 의하여 '천조를 위하여 바다의 문을 지켜서 바깥 방위를 튼튼하게 한다"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증일본을 진압하는 전투에서도 포르투갈인들은 사람도 보내고, 돈도 내고, 배도 내놓고, 총도 내놓는다. 강력한 해적을 앞에 두고도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없이 몸을 사리지 않고 적을 죽였다'(Antonio Bocarro의 순년사의 13). 그들은 상당히 후한 보답을 받았다. 명나라정부는 마카오에 '향세제(響稅制)"를 시행한다. 선박의 크기에 따라 과세하는 것이다. 이는 포르투갈상선에게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578년부터, 즉, 포르투갈인들이 임도건을 진압하겠다고 자청한 해로부터, 원래 1년에 1번 개방하는 "광교회(廣交會)"는 1년에 2회로 늘어난다. 이는 제도화되어 숭정4년때까지 지속되었다.
명나라가 앞장서서 연합군을 결성하기 전에, 복건순무 경정향은 사신 진한승등을 캄보디아로 보내어, 캄보디아에 섬라와 함께출병하도록 요청한다. 이 일을 양사가 알게 된다. 양사는 비밀리에 임도건에게 이 일을 알려준다. 임도건은 선수를 서서, 진한승을 죽이고, 다른 사신과 수행인원을 노비로 삼는다. 이때, 명나라의 연합군을 결성하는 사신이 다시 캄보디아에 도착한다. 임도건은 이미 섬라로 떠나버렸고, 양사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캄보디아국왕은 양사를 체포하고, 다른 사신과 수행원들을 석방해서, 사절단에게 넘겨주어 중국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금서 1엽, 상아 200근, 봉랍 200근을 공물로 바친다.
연합군의 공격하에, 임도건은 대패한다. 사서에서는 "요참건(腰斬乾, 임도건의 허리를 베었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임도건 본인의 허리를 잘랐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그의 세력의 허리를 잘랐다는 말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 해(1581년) 봄, 은정무는 다시 사신 주종목, 왕문림을 캄보디아에 파견한다. 그들에게 섬라와 협력하여 게속 임도건을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섬라국왕은 곽육관에게 병력을 딸려 보내는데, 임도건에게 발각되어, 선공을 당한다. 임도건은 "여러 무리를 죽이고, 배를 빼앗았으며 바다의 섬으로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모른다(莫知所終)"
장거정은 '해적'문제의 근원은 '관료체계가 청렴하지 못하여, 탐관오리들이 해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다. '근본을 다스리려면 관료를 잘 단속해야 한다'고 보았다.
임도건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모른다' 그저, <<만력무공록>>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책은 권위있는 책이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모호한 부분이 많다. 각 사건의 전후순서와 인과관계가 뒤섞이기도 했다. 실제로 임도건은 배를 타고 남하하여, 차오저우출신의 부하 2000명을 데리고, 선박 100척으로, 섬라 남쪽의 대니국(大泥國)(北大年)으로 갔다.
태국에 보존되어 있는 <<북대년년지>>(대니부지)의 기록에 따르면, 임도건은 이 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곳의 부마가 된다. 부하들을 이끌고 대니의 해변가 봉토를 개간하여, 항구를 만든다. 나중에 사람들이 "도건항(道乾港)"이라고 명명한다. 해적 임도건은 건설자가 되고, 현지의 '객장(客長)'으로 존경받는다. 그는 심지어 적극적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하기도 했고, 이곳에 이슬람사원을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세 번이나 벼락을 맞는 바람에 포기한다.
이때, 명나라 고위층에서는 관료체제의 부패가 해적이 끊이지 않는 근원이라고 판단한다. 단순히 해금정책때문은 아니라고 본다. 만력6년(1578년)에 임도건이 캄보디아에서 차오저우로 돌아와 병력을 모집할 때, 명나라의 수보(首輔)인 장거정은 양광총독 유요해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광중(廣中)지역에서 여러해동안 많은 해적이 발생한 것은 백성들이 난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관료가 부패했기 때문이다. 탐관오리가 해를 가한 것이다. 관리가 부패하면, 좋은 백성은 마음이 떠나고, 간사한 백성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적들은 충분한 이익으로 회유하고, 충분한 위력으로 겁을 주니, 어찌 도적이 되는 것을 꺼리겠는가. 재물을 아껴쓰고, 관리를 잘 단속하여,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게 하는 것이 긴요하다." 다음해에 다시 유요해에 서신을 보내어 "근본을 잘라야 한다. 관료를 잘 단속해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평소에 즐겁게 사는 마음이 생긴다."
정치부패는 영웅을 도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중국은 해양에서 더 이상 강국으로 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때, 서방의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포르투갈인들은 이미 중국의 문앞까지 왔다. 나중에 더 많은 나라들이 연이어 온다. 원래 중국상인의 세력범위이던 동남아는 점차 이들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때의 대명제국은 포르투갈인과 손을 잡고, 캄보디아와 섬라에서 활약하던 임도건을 소탕하려 한다. 그리고 또 다시 스페인인과 손을 잡고 또 다른 해적두목 임봉을 여송(필리핀)에 건립한 거점을 소탕한다. 이렇게 하여 두 손으로 서양세력에 동남아를 바친 꼴이 되었다. 그런데, 서양세력이 해적을 소탕한 것을 '의거'라고 하여 표창까지 하였다.
이같은 해외동포들에 대한 '비록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죽인다"는 정신은 해외화교집단의 목에 걸린 밧줄이 된다. 그들은 현지 토착정부의 협조를 구한다. 임도건을 포함하여, 중국인들은 해외에 적지 않은 정착지를 확보했다. 심지어 일부는 정권까지 건립한다. 그러나, 아무도 끝까지 지켜내지를 못했다.
수백년간, 어린 싹이 자라서 하늘을 덮는 큰 나무가 되었는데, 중국인들은 여전히 손님이었고, 교민이었다. 그 곳의 주인이 될 수가 없었다. 유태인과 같이, 부유하지만 안전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내정외교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 똑똑했던 장거정등은 역사가 물려준 이러한 비극을 보고 있는 것인가?
임도건이 사망에 대하여, 주류의 전설은 그가 총포공장을 만들어 먼저 대포 2개를 만들었는데, 세번째 대포를 만들어 점화를 했는데, 발사되지 않아서, 그가 다가가서 보다가 폭발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동남아의 화교들 사이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임도건은 총을 만들다가 자기가 죽었다." 이 속담은 바로 이를 일컫는 것이다. 이익을 구하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 것을 말한다.
임도건의 여동생인 임꾸냥(林姑娘)은 동남아 화교들이 경배하는 신이 되었고, 지금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임꾸냥묘의 향불 속에서 후세인들은 무엇을 기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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