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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임진왜란: 명, 청, 조선의 관계변화

by 중은우시 2010. 12. 10.

글: 장개봉(張凱峰)

 

가정연간의 어느 날 밤. 명나라의 요동대원수 이성량(李成梁)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시종으로 하여금 발을 씻게 하고 있었다. 시종이 이성량이 발을 보니 발바닥에 점이 3개 있었다. 이성량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의 복과 관운은 모두 이 점 세 개 덕분이다." 그러자, 시종이 대꾸한다: "내 발바닥에는 점이 7개나 있는데, 왜 복과 관운이 없는 건가요?" 이성량은 민간에 '북두칠성을 밟는 진룡천자가 나타나서, 명나라와 싸울 것'이라는 전설을 생각해내곤, 그를 죽여버려야 겠다는 마음을 품는다. 이성량의 소첩중 하나가 이 시종을 좋아했다. 이성량이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알고는 밤중에 그 소첩이 시종을 도망치게 해주었다. 이 죽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시종이 바로 만주족의 영웅 누르하치이다.

 

여진족의 역사는 길다. 대대로 동북에서 살았고, 일찌기 중원으로 남하하여 금(金)나라를 세운 적도 있다. 금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여진족들이 거의 멸족당한다. 단지 동북의 옛 땅에 살고 있던 부락만이 살아남아서 계속 대를 이어갔다.

 

명나라때, 요동의 여진족은 해서(海西), 건주(建州), 야인(野人)의 세 부로 크게 나눌 수 있었다. 누르하치는 비교적 선진적인 건주부에 속했다. 당시 여진족의 각 부족들은 내분에 열중했고, 강한 부락이 약한 부락을 치고, 인구가 많은 부락이 인구가 적은 부락을 못살게 굴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마치 접시위의 모래알과 같았다. 그리고 명나라는 여진족이 강대해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누구든지 강해지면 그를 공격하거나, 혹은 그들이 서로 싸우도록 교사했다. 많은 우두머리들이 명나라에 의하여 피살당한다.

 

당시 명나라에서 요동을 지킨 이성량은 척계광(戚繼光)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 명장이었다. 크고 작은 유목민족부락들과의 전투에서 1;1이건 1:다수이건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여진인들에 대하여 이성량은 마음대로 처리했다. 걸핏하면 마을로 직접 쳐들어가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여버렸다. 많은 여진인들은 깊은 산속에 숨어서 겨우 살아남았다. 나이어린 누르하치도 이렇게 이성량에게 붙잡혀서 노비가 된 것이다.

 

조선도 여진인들을 괴롭혔다. 명나라초기, 조선의 성보(城堡)는 여진의 변경지역을 못처럼 파고들었다. 여진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계속 퇴각한다. 압록강과 도문강이남이 땅은 모조리 내주게 된다.

 

어른이 된 누르하치는 점차 여진의 다른 부락을 집어삼키며 여진을 통일하기 위한 행동에 돌입한다. 여진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본 명나라와 조선이 막 연합하여 공격하려고 할 때,  돌발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16세기말, 일본에서 전투가 끊이지 않던 전국시대가 끝이 난다. 의기양양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보다 더 넓은 곳으로 진출할 것을 결심한다. 그는 먼저 조선을 정복하고 조선을 발판삼아 중국을 정복하고, 마지막으로는 인도로 쳐들어가서 아시아대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1592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상륙한다. 그후 공격은 순조로웠다. 여러해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았던 조선군대는 줄줄이 무너졌다. 짧은 2개월만에 조선의 3도(한성, 개성, 평양)이 함락되고, 8도가 전부 함락된다. 조선국왕은 압록강변까지 도망가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명나라 조야는 난리가 났다. 일본의 광망과 야심은 오랫동안 궁궐 속에 틀어박혀있던 명신종을 격노시켰다. 그는 바로 명령을 내리자, 이미 낡아서 녹이 슬어가던 제국의 기기가 돌연 고속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몇달만에, 최정예의 10만대군을 뽑는다. 그리고 이성량의 아들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군대를 통솔하여 조선을 지원하도록 한다.

 

대명제국에서 출병하였다는 소식은 조선에 들어와있던 일본군에게 청천벽력과 같았다. 4개월만에 명나라군대는 반도를 휩쓸게 된다. 그후 일본군은 명나라군대의 전투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5만명이 한성을 굳게 지켰다. 문을 걸어잠그고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3만의 명나라군대가 한성을 포위한다. 700명의 명나라결사대는 일본군의 요지를 급습하여, 하룻밤만에 13개의 양식창고를 불태워버린다. 일본은 한편으로, 명나라군대에 평화협상을 요구하며 시간을 끌면서, 다른 한편으로 본국에 증원을 요청했다. 쌍방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돌연 사망한다. 일본의 10여만명의 군대는 조선에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다.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는 이 기회를 틈타서 반격하여,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해상에서도 불꽃이 솟고, 전선위로 불화살이 날았다. 일본군의 병사들중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사람이 수만을 헤아렸다. 선박도 거의 전부 불에 탄다.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난 것이다.

 

의기양양한 명신종은 파격적으로 자금성 오문(午門) 에서 삼군을 위로한다. 그리고 동생에게 대하듯이 조선국왕에게 와신상담하여 국가를 재건하라고 충고한다. 양국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진다. 그러나, 여진인의 어두운 그림자는 더욱 크게 덮여오기 시작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이 조선에 상륙하였을 때, 누르하치는 일찌기 명나라조정에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지원가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명나라조정과 조선이 이구동성으로 모두 반대한다. 왜냐하면 누르하치가 전투에서 공을 세우게 되면, 여진 각부족내에서 세력과 인기가 상승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좋은 뜻으로 제안했다가 거절을 당한 누르하치는 자신의 역량을 강화하기로 마음먹는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출병한 다음 해에 누르하치는 가장 강한 경쟁상대방인 해서여진을 격파한다. 그리고 20여년에 걸쳐 기본적으로 여진족을 통일해버린다. 1616년, 누르하치는 자칭 "천명한(天命汗)"에 오르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한다. 역사서에서 "후금(後金)"이라고 불리는 나라이다. 후금은 명나라에 골치거리이자 떼어버릴 수 없는 악몽이 된다.

 

확실히 이는 치명적인 20년이었다. 명나라와 조선이 어찌 좌시하고 가만두려 하였겠는가? 모두가 토요토미때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는 모두 원기를 상하여, 누르하치를 견제하고 싶어도 힘이 없었다.

 

일본과 싸우기 위하여 명나라는 거의 모든 국력을 쏟아붓는다. 병력이 수십만이고, 비용이 은으로 800만냥에 달했다. 국가재정이 텅텅 비어버리게 된다. 조정은 심지어 관리들의 급여까지 국가에 헌납하도록 하여 급한 불을 끄고 있었다.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명신종은 사방으로 광산감독관, 세금징수관을 내려보낸다. 그렇게 되니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 요동의 군대는 거리도 가깝고, 전투력도 강하여,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선발되었다. 그러다보니, 요동이 비어 누르하치에게 다른 부락을 집어삼킬 기회를 제공해주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요동군의 손실을 막대했다. 이는 직접적으로 후금을 진압하는 능력에 영향을 준다. 조선도 거의 모든 국토가 일본에 유린되어, 백성이고 국가이고 모두 빈털털이가 되었다. 전쟁후의 경작지면적은 전쟁전의 1/3도 되지 않았고, 곧이어 전염병이 돌아서 수백만이 목숨을 잃는다.

 

후금의 확장을 제어하기 위하여, 명나라는 80세가 된 이성량에게 다시 요동군을 맡긴다. 그러나, 이성량은 예전의 위용을 되찾지 못했다. 일찌기 건립했던 전략요충지 관전6보를 포기한다. 후세인들은 이성량이 호랑이를 키웠다고 비난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와 누르하치의 관계가 남다르다고 의심했다. 사실 요동병력은 약화되었고, 근본적으로 변방이 안전을 유지할 핌이 없었다. 그리하여,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이성량으로서는 부득이 이런 철수정책을 쓰게 된 것이다.

 

1619년, 명나라는 후금에 대한 대규모공격을 계획한다. 그러나, 명나라군대의 전투력은 예전같지가 않았다. 많은 사병들은 엎드려울면서 산해관을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적지 않은 장수들도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울면서 호소한다. 4로의 명나라군대 12만여명이 살이호에서 누르하치에게 5일만에 궤멸당한다. 주장(主將) 두송(杜松)의 갑옷은 녹이 스어 있었고, 화살이 뚫고 들어와서 몸에 18발의 화살을 맞고 죽는다. "죽은 자가 산과 들에 늘렸고, 피가 흘러서 도랑이 되었으며, 무기와 시체가 훈하로 들어가서 얼음이 녹아 돌아내려가는 것처럼 흘러내려갔다." 이때부터 누르하치는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략을 바꾸고, 명나라의 동북에서의 통치력은 완전히 궤멸된다.

 

1627년, 청태종은 3만의 군대를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 평양을 점령한다. 조선국왕으로 하여금 "형제의 맹"을 맺도록 강요한다. 1636년. 청태종은 다시 한번 친히 군대를 이끌고 한성을 함락시키고, 조선국왕의 왕비, 자녀와 대신을 포로로 잡고, "군신의 맹"을 맺도록 강박한다. 삼십년하동, 삼십년하서(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 조선국왕이 걸어서 성을 나와 청태종에게 스스로 신하로 칭하는 순간이 올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의 선왕들은 이들 '야만인'들을 어떻게 대우했던가? 1644년, 누르하치의 자손들은 산해관을 넘어 대명제국을 정복하고, 새로이 중국을 2백년간 통치하는 왕조를 개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