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법률/법률이야기

중국도로통행의 역사: 우측통행? 좌측통행?

중은우시 2010. 5. 21. 18:15

글: 주빈(朱斌)

 

1945년 6월 22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전문을 발송했다: "금년 10월 1일부터 전국에서 일률적으로 우측통행하도록 변경한다."

"자기 갈 길을 가라. 남이 뭐라고 하든" 이는 단테의 말이다. 그러나, 공공도로에서는 소통이 원활하기 위하여 사람과 차량이 마음대로 통행해서는 안되고, 일정한 규칙을 따라야 한다. 우측으로 갈 것인가? 좌측으로 갈 것인가?

 

<<고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도로에서 남자는 우측으로, 여자는 좌측으로, 차는 중앙으로. 당나라때, 차량이 우측통행해야한다는 규정이 나왔다. 그러나, 이 규정은 널리 시행되지 않았고, 연속되지도 못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통규칙은 자동차가 나타난 이후에 비로소 나오게 된다.

 

19세기후반부터, 중국의 남방도시 예를 들어, 상해, 절강, 광동등지에서는 영국의 영향을 받아, 보편적으로 좌측통행을 했다; 그런데, 산동, 직예등 동북도시에서는 미국등 나라의 영향을 받아 우측통행을 했다.

 

1930년대의 "신생활운동"에서 차량은 좌측통행한닥 규정했고, 동북등 일본점령지구에서도 좌측통행을 실시한다. 전국적으로 기본적인 통일을 이루 것이다. 그런데, 왜 10년후에 다시 우측통행으로 바꾸게 되었을까?

 

항전기간동안, 미국의 원조가 가장 많았다. 자동차는 미국에서 대부분 수입되었다. 미국의 도로교통규칙은 우측통행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차량은 중국에 도착한 후, 반드시 핸들등을 바꾸어야 했다. 여기에는 개조비용이 적지 않게 들었다. 1945년 12월 31일 <<신보>>에서 말한 것처럼, "개조비는 차량가격의 20%가 되었다. 전국차량이 개조로 지출하는 비용을 계산하면 엄청나다. 개조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이, 우측통행으로 바꾸게 된 이유의 하나이다."

 

항전기간동안 후방대도시와 항전승리초기의 상해, 천진, 성도, 중경등 도시에는 모두 일정한 수량의 미군이 주둔해 있었다. 미군은 중국의 좌측통행에 익숙치 않았다. 사실상, 미군에 의한 자동차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신보>> 1946년 2월 29일자에 보도한 바와 같이, "항전승리의 전날(민국33년 내지 34년) 후방의 여러 대도시중 중경, 곤명, 성도, 귀양등지에는 군용자동차가 운집했고, 운수량이 급증했다. 모두 자동차운행질서가 혼란에 빠졌다. 자동차사고로 다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각지에는 미군차량이 비교적 많았는데, 운수당국은 미국측 인사들이 좌측통행에 익숙치 않은 것을 보고 우측통행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는 행정원에 보낸 전문에서, 이렇게 개혁의 원인을 제시했다: "개조비용을 아끼고, 사고발생을 줄이기 위하여 수정한다."

 

이외에, 세계추세를 따르는 것도 개혁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1945년 9월 10일, 내정부가 사천성정부에 보낸 전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차량은 우측통행하고, 사람은 여전히 좌측통행하는 것은, 실로 세계추세에 적응하기 위함이다." <<신보>>에는 이렇게 적었다: "중앙정부에서 명년 원단부터 전국의 도로교통을 모두 우측통행으로 고치고자 한다. 그 원인의 하나는 각국다수의 추세를 따르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세계각국에서는 우측통행을 하는 나라가 확실히 많았다. <<신보>>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 소련, 프랑스, 터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카나다, 브라질, 칠레,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네덜란드, 그리스, 루마니아, 포르투갈, 이집트, 스페인 및 페르시아"등 21개국으로 전세계 국가의 70%를 차지했다. 좌측통행을 하는 나라는 영국,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스웨덴,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인도, 일본" 및 중국의 12개국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이 우측통행으로 바꾸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를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이 전문은 '일률적으로 우측통행"하는 개혁의 서막을 열게 된다. 행정원은 명령을 받은 후, 즉시 실행에 착수한다. <<시구 및 도로교통개선관리방법>>을 제정한다. 신법에서 차량은 일률적으로 우측통행이라고 규정한다.

 

이와 동시에, 우측통행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하여, 정부는 차량제한속도규칙을 만든다. 자동차의 최고속도는 시지역과 인구가 조밀한 지역에서는 시속20킬로미터였다. 다른 장소에서는 시속 50킬로미터였다. 대형차량은 시속 40킬로미터를 한도로 한다.

 

차량은 일률적으로 우측통행이지만, 도로의 행인에 대하여 국민당정부는 처음에는 "행인은 여전히 좌측통행"으로 하려고 했었따. 그 이유중 하나는 민중들이 이미 좌측통행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정부는 차량과 사람이 서로 마주하고 통행하면 사람이 더 빨리 발견하여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누가 의견을 낸다. 차량은 우측통행하고, 행인은 좌측통행하면, 차와 사람이 마주하고 갈 때 차가 사람을 부딪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이 규정은 조정을 해서, 인도가 있으면 인도로 걷고, 차도로 걷지 못하게 하고, 인도가 없으면 우측통행하도록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한다. 국민당정부는 접수업무에 바빠, 다른 것은 돌볼 틈이 없었다. 신중하게 하기 위하여, 도로차량의 우측통행개혁은 시간적으로 조정하게 된다. 군사위원회는 9월초에 각성정부, 전시운수관리국, 교통부에 통지하여, 도로차량의 우측통행 시행일시를 1946년 1월 1일부터로 하게 된다.

 

군사위원회의 전시운수관리국은 공고를 반포하여, 주의사항 6가지를 내놓는다:

 

(1) 35년 원단 영시부터 모든 차량과 도로를 통행하는 인력거, 수력거, 가마, 말등은 일률적으로 우측통행으로 바꾼다.

(2) 유궤, 무궤전차는 내년 원단부터 우측통행으로 바꾼다.

(3) 부대차량행군, 군중시위행열은 우측으로 가고, 차량과 일치시킨다.

(4) 행열에 차마가 있으면, 차마와 같이 우측통행한다.

(5) 보통행인은 인도로 걷는다. 인도가 없으면, 반드시 길가에 붙어서 걸어야 한다.

(6) 모든 차량 행인은 교통경찰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

 

각 지방정부도 적극 호응하여, 상응한 교통규칙을 제정하고 널리 선전했다. 상해시에서 반포한 주의사항은 더욱 구체적이었다:

 

(1) 행인주의사항: "전차, 버스를 탈 때 반드시 차량의 우측으로 오르내린다. 도로를 건너갈 때, 반드시 먼저 좌측을 보고, 길중간에 이르러 다시 우측을 보아 오가는 차량이 있는지 주의한다."

(2) 운전자주의사항: "차량은 모두 우측통행한다. 우회전때는 좁게 회전하고, 좌회전때는 크게 회전한다. 차량이 앞차를 앞지르려고 하면, 좌측으로 지나간다. 유궤전차를 추월할 때는 우측으로 지나간다."

 

정부와 민간의 준비와 선전이 비교적 충분했다. 교통질서도 제대로 유지되었다. 그리하여 시행당일인 1946년 1월 1일은 비교적 상황이 괜찮았다.

 

상해에서는 "차량이 우측통행했다. 어제는 질서가 평상시와 같았다." "많은 사람들 무리속에서 때때로 작은 무리의 어린이들이 지나갔다. 그들은 아주 귀엽고, 복장도 깨끗했다. 정신도 충만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그들은 놀러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교통유지업무를 하고 도와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차량우측통행의 첫날이기 때문에, 차량과 행인들이 습관이 들지 않아서, 교통질서가 문란하게 될까봐 우려해서였따. 그래서 시의 경찰, 청년단단원, 시당부 복무대대원과 온 시의 학생이 모두 지도업무에 참가했다. 그들은 가랑비가 내리는 와중에, 그들의 봉사정신을 충분히 발휘했다."

 

1월 1일 오전 9시의 성도에서도 "차량이 우측통행하고, 상황이 아주 좋았다." "도로국의 지도차량은 차량관리소, 도로관리국, 시정부공무과 3기관의 지도인원을 태우고 전시를 순시했다. 성경찰국의 서국장은 지프차를 타고 각 거리를 순시하며, 주요도로의 차량에게 우측통행하도록 지도했다. 성도의 동군분회는 동군 십여대를 보내어, 경찰국업무를 도왔고, 각 동군은 차량과 사람이 섞여있는 와중에 제 역할을 다 했다...행인과 차량이 이로 인하여 질서를 지킬 수 있었다. 하루동안의 상황은 아주 괜찮았다."

 

천진이 사전준비와 훈련도 치밀했다. "천진시가 차량우측통행을 실시한 후, 경찰국의 전체 경찰이 출동하여 지도하는 외에, 교통부 공로총국 천진운수처 인원이 각 주요도로입구로 가서 지휘를 했다." 그리하여, 1946년 1월 1일 차량우측통행으로 바꾸었지만, "결과는 아주 원만하였다." 그날 천진시 전운국처장, 경찰국부국장은 "직접 차량우측통행을 지도하였다." 전시의 주요도로입구에는 전운국직원과 정찰국 독찰분소장등이 지휘를 도왔다. "국민반점에서 금강교까지, 전도시에서 차량이 가장 많은 거리에는, 삼거리, 십자로, 육거리가 있어서, 경찰이 가장 많이 출동했다. 개혁첫날, "도로에서 차량충돌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일반차량의 작은 불편이라면, 교통지휘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것인데, 큰 일은 아니었다."

 

도시주민은 신기하게 생각하다가 점점 '우측통행'에 익숙해진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된 후에도 이 규칙을 그대로 따랐다.

 

"문화대혁명"기간동안 일부 도시의 홍위병들은 우측통행이 우경화(자본주의화)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하여, 차량을 좌측통행하도록 명령한 바 있다. 그들은 또한, 홍색은 혁명의 색인데, 어찌 '멈출' 수가 있느냐고 하여, 홍등에 차량이 통행하고, 녹색등에 차량이 정지하도록 하였다. 이 두 가지 조치로 인하여 단기간내에 많은 사고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얼마지나지 않아서 폐지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