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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브랜드

리닝의 곤경: 희망은 있는가?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환구기업가 

 

창업자 리닝(李寧)이 마침내 변화를 결정했다: 전임총재를 쫓아내고, 장기간의 내란을 평정했으며, 새롭게 본궤도로 올려놓았다. 일찌기 중국대륙 최대의 스포츠용품기업이었던 리닝은 다시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치명적 급소는 무엇인가? 

 

리닝유한공사는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만큼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마도 그때문인지, 무슨 조치를 내리더라도 모두 좋은 소식으로 주식시장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12년 7월 5일, 리닝은 공고를 통하여, 전 행정총재 장즈용(張志勇)이 퇴임하고, 이 회사의 창업자인 리닝 본인이 전면에 나서겠다고 한다. 이전에 리닝에 지분참여한 TPG의 파트너인 진전쥔(金珍君)은 집행부주석의 직위를 맡아 그룹의 내부업무와 운영을 책임진다. 그날 리닝의 주가는 한 때 5.33%나 올랐다.

 

2010년부터 쇠퇴하는 모습을 보인 리닝회사에 있어서, 이것은 확실히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작년7월호 <환구기업가>의 <리닝경몽>에서 우리는 리닝회사에 존재하는 각종 문제점을 분석한 후 결론을 하나로 내린 바 있다: 행정총재 장즈용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원인은, 그가 여전히 자신이 이미 붕괴직전까지 온 국면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리닝경몽>이 발표된 후, 리닝 본인이 본잡지와 연락하여 깊이있게 한번 논의한 바 있다. 오랫동안 일상경영에서 물러나 있던 창업자는 처음으로 그의 비지니스에 대한 생각과 리닝회사에 대한 생각을 완전하게 얘기한다. 2010년 리닝이 Logo교체를 대표로 하는 브랜드재건운동을 벌일 때, 이미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리닝 본인에 따르면, 2010년말 조정여부를 고민했지만, 최종적으로 "나는 경영진에게 3년의 시간을 주고 변혁을 이루도록 하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그는 경영진이 문제의 심각성을 부인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인정했다. "이것은 확실히 경영진이 바꾸어야 하는 것이고, 스스로 자신을 위하여 변명만 해서는 안된다."

 

리닝 본인으로 하여금 1년을 앞당겨 장즈용의 3년시험기를 끝내게 만든 것은 일찌기 중국본토 최대의 스포츠용품제조업에가 이미 바닥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리닝의 시장내 지위는 안타(安踏, Anta)에게 밀렸따. 비록 그룹판매수입으로 계산하면 리닝이 지난해 89.29억위안으로 안타보다 2500만위안이 많았지만, 리닝브랜드와 안타브랜드로 계산하면 이미 안타브랜드가 리닝브랜드를 추월했다. 순이익은 2010년의 11.08억위안에서 3.86어위안으로 곤두박질쳐서 65%나 하락한다. 이 숫자는 피크(匹克, PEAK)의 절반에 불과하고, 안타의 17억위안과는 차이가 너무 크다.

 

이와 비교하면, 다른 나쁜 소식들은 별 것이 아닐 정도이다. 리닝의 국제화는 이미 물거품이 되었다. 미국 포틀란드에 있는 설계센터는 이미 직원 절반이 나갔다. "나머지 절반이 남아있지만, 그들이 뭐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리닝에서 이직한 경영진의 말이다. 동시에 미국의 합작파트너인 Foot Locker Inc와의 계약도 이미 종료되었고, 스페인의 대리상과 만든 판매회사도 파산했다. 회사는 이미 4분기 주문량이 두자리수의 격감을 보였다고 경고한 바 있다. 금년의 영업수익과 이윤은 아마도 마이너스성장을 보일 것이다.

 

"90후 리닝"의 포지셔닝도 잘못되고, 브랜드재건에도 실패했으며, 판매는 하락하고, 재고는 쌓이고, 경영진은 이직한다. 이것들은 모두 표상이자 결과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 회사가 자신의 주항로에서 벗어났다는데 있다. 전임총재 장즈용을 쫓아낸 것은 리닝 보인이 혼란을 정리하는 첫걸음이고, 리닝브랜드, 스포즈정신과 국내시장을 재건하는 것이 근본을 다스리는 핵심관건이다. 이 전략은 확실히 리닝이 깊이 심사숙고한 결과이다. 작년이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다브랜드전략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원을 더욱 리닝이라는 브랜드에 집중시켜야 한다." "장즈용은 전체회사의 CEO이다. 그는 리닝브랜드의 CEO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리닝브랜드에 총경리가 필요하다." '진정 스포츠용품사업을 하는 방법은 전문성에 의존하여 잘해야 한다. 그 후에 대중화시장을 커버해야 한다. 전문과 유행은 서로 상반되는 양극이 아니다." 

 

묘수회춘의 약방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리닝은 원래 이 모든 것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수가 있었다. 심지어 그것은 리닝의 사무실에서 거리 멀지 않은 한 절대기밀실내에 있었다. 이 두 개는 암호가 ZIBA와 PPT(Pilot Project Team)인 프로젝트성과의 기밀보고서이다. 2006년과 2008년, 리닝 내부의 정예장병들은 두 번의 제품, 운영, 공급체인등 단계의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처음에 대성공을 거둔 후, 이 두 개의 보고서는 기이하게도 덮어두게 된다. 이 보고서의 표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중국의 신세대는 그들의 현실적인 우상을 찾고 있다. 리닝침은 솔선하여 그들을 격려해야 한다."

 

현재의 문제는 이것이다. 리닝에게는 아직도 구원할 방법이 있을까?

 

2008년초의 어느 저녁, 북경 798의 천하염찬 식당의 한 방안에서 리닝회사는 당시 가장 방대하고 가정 규격이 높은 진용의 디자이너집회를 가진다. 이들은 모두 리닝의 각 설계분야의 주디자이너였다. 회사의 가장 큰 보물들이라 할 수 있다. 장즈용은 그 자리에서 리닝의 전략을 다시 한번 얘기한다. 그의 말은 사람들을 흥분시켰고, 술잔을 부딪쳤다. 일부 사람들은 눈에 눈물이 글썽일 정도였다.

 

이것은 송별회였다. 이들은 곧 미국의 포틀란드로 가서 리닝회사가 자금을 가장 많이 투입한 변혁프로젝트에 참가할 것이었다. 강의를 하는 것은 바로 글로벌 최대의 각종 상을 가장 많이 받은 최고의 디자이너회사인 ZIBA였다. 이 프로젝트의 내부 암호는 ZIBA프로젝트였다. 목적은 리닝이 탈태환골의 변화를 꾀하기 위함이었다.

 

장즈용은 이에 대하여 믿음을 굳건히 가졌다. 이를 위하여 3000만달러를 쏟아붓는다. 이같이 대단한 제품부흥운동은 당시 중국축구계의 젠리바오브라질비밀훈련계획과 유사했다. 계획에 따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었을 때, 2013년 회사는 200억위안의 수입을 이루어, 2007년의 5배에 달할 것이었다. 그 1년전에 리닝은 큰 돈을 글여서 프로젝트구성원들에게 1년에 걸친 영어교육을 시켰다. 한 참여자는 당시 업무가 바빠서 기간내에 영어과정을 마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돈을 2만위안 들여서 스스로 영어를 배울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천재일우의 학습기회이고 2만위안의 개인 돈을 들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강의는 꼬박 1개월간 지속된다. 교육의 주요임무는 ZIBA의 제품개발이념에 따라 리닝의 기존 프로세스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오전은 수업시간이고, 오후는 실제설계과목이다. 디자이느는 이국타향에서 소비자리서치를 해야 하고, 특정유형의 소비자를 찾아냈으며, 특정대상을 위한 창의디자인을 제공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시에 꿈에 부풀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나이키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리닝이 최고라고 여겼다." 한 참여자의 말이다. 학습기간동안, 일부 사람들은 헤드헌터회사로부터의 국제전화를 받기도 했고, 하나같이 모두 거절했다.

 

이 동화같은 학습생애는 미국식 소고기스테이크와 함께 끝이 난다. 초청자닌 당시 ZIBA프로젝트 책임자였던 우센용(伍賢勇)이었다.

 

귀국후에 모든 사람은 승진한다. 일부 사람은 심지어 다른 부서의 몇가지 직위를 겸직하기도 했다. 이때는 정말 투지가 넘치던 시기였다.

 

이들 기세등등한 젊은이들은 회사내에서 제품혁신의 바람이 불 것이고, 그들이 '태풍의 눈'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ZIBA프로젝트는 일찌기 "Define your game"이라는 구호를 내놓은 바 있다. 두뇌폭풍에서 일부 디자이너들은 회사에 생산과 인터넷을 연결시키는 간편한 장비를 건의했다. 이런 생각은 나이키의 Nike+시리즈의 이념과 유사한 점이 있다.

 

ZIBA의 변혁경험에 따라, 리닝은 신발의류 디자이너의 팀을 나누고 프로젝트책임자를 둔다. ZIBA는 리닝에 종전처럼 유행의 추세와 종단판매수치에 따라 제품을 설계하던 방식을 버리고, 이를 거꾸로 하여, 새로 소비자를 연구하고, 그들의 수요를 이해하며, 이를 통해서 추세를 예측하도록 건의한다.

 

기밀보고서내에는 ZIBA가 리닝의 소비자집단을 "중국개혁개방의 제1대창조자"(불행하게도 이 포지셔닝은 나중에 여러가지로 비판받는 '90후리닝'으로 바뀐다)로 포지셔닝한다. 그리고 소비자들을 전문선수, 운동참여자, 운동애호가로 분류하며, 제품라인을 이 순서에 따라 전문운동, 도시경운동, 운동생활의 3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나는 당시에 ZIBA이후,리닝이 즉시 최고급브랜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ZIBA프로젝트 참여자의 말이다. 사실은 간접적으로 이를 증명한다. 리닝회사는 일찌기 농구경기복에 대하여 목표소비자들에게 리서치를 진행하는데, 상표를 떼어낸 리닝경기복을 나이키, 아디다스와 나란히 놓고 반응을 조사했는데, 결과는 사람들이 흥분할 만했다 .리닝이 이긴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때의 리닝은 잘나갔다. 낙관적인 사람들은 ZIBA가 리닝에게 급속히 전세계 최고급브랜드가 될 수 있는 방법론을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했다. 먼저 브랜드포지셔닝에 대하여 연구하고 그 후에 제품의 실현 및 시장의 프로모션을 보며, 최종적으로 판매계통의 브랜드포지셔닝의 채널전략과 판매혁신이다. 남은 것은 이를 어떻게 집행하느냐이다.

 

그째 장즈용은 더욱 젊은 수퍼 브랜드를 만드는데 조급해 했다. 그래서 실제소비자군의 연령이 지나치게 높은 것이 제품브랜드의 프리미엄을 실현하는데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더욱 높은 프리미엄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주류소비자의 연령을 끌여내려야만 했고, 그들의 환심을 사야 했다. 리닝의 경영진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새로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제품변혁을 하는 것보다 더욱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시장마케팅계통에서는 브랜드를 업그레이드하려면 반드시 Logo를 교체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 리닝회사의 CMO이던 팡스웨이(方世偉)는 항공, 화공, 물류등 분야에서 로고를 교체하여 성공한 사례를 들었다. ZIBA프로젝트의 목표대상도 "중국개혁개방제1대창조자"에서 "90후리닝"으로 명확히 정립된다. 잘못된 씨는 이때 뿌려진다. 내부인사들은 바로 ZIBA의 보고서의 목표대상집단에 대한 포지셔닝때문에 장즈용본인이 나중에 브랜드재정립의사결정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불행한 것은 장즈용 본인이 ZIBA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혁신적 제품의 프로세스개선에 직접 관심을 둬본 적이 없다. "ZIBA는 확실히 의도를 벗어나서 집행되었다. 장즈용은 당시에 제품전형에 더욱 관심을 두어야 했고, 브랜드는 그 다음이었다."

 

잘못은 이것만이 아니다. 장즈용은 금방 ZIBA의 프로젝트 책임자인 우셴용을 전보보낸다. 그를 대체한 사람은 새로 취임한 부총재 겸 CPO인 쉬무춘(徐懋淳)이다. 쉬무춘은 운동생활시리즈제품에 전문가이다. 그는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가지고 심지어 ZIBA가 리닝에게 설정해준 다른 두 개의 구체적인 제품라인인 전문운동, 도시경운동까지 커버해버린다. 사후에 확인되는 것처럼 이것은 큰 재난이었다.

 

영어이름이 Morrison인 쉬무춘은 지위가 높고 권한이 컸다. 당시 제품계통에서 그의 한 마디로 모두 결정되었다. 쉬무춘은 새로운 제품설계프로세스를 도입하는데 확실히 공로가 있었다. 그의 창도하에, 모든 제품설계인원은 반드시 VLP(virtual load map) 모의설계를 해야 했고, 디자이너들은 반드시 조사연구데이타, 스토리, 창의 및 초안등을 제공해야 했다. 프로젝트초기에, 리닝은 정기적으로 제품경리와 디자이너간의 kick off미팅을 가졌다. 이를 통하여 각 분야에서 두뇌폭풍을 진행한다. 이것은 나이키에서 사용하는 개발프로세스를 리닝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리닝의 제품경리들은 설계사들에게 제품구조도만을 주었고, 다른 것은 주지 않았다.

 

인원배치분야에서, 쉬무춘은 전문화를 꾀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인맥관계를 이요하여 리닝이 3명의 제품총감 및 1명의 창의총감을 스카우트한다. 이들은 모두 홍콩사람과 서양사람이다. 나이키, 리복등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운동생활시리즈제품에만 열중했고, 전문체육분야는 잘 몰랐다.

 

부정적인 효과는 이러했다.리닝은 예전에 제품총감이라는 자리가 없어서, 디자이너들은 그냥 제품경리와 의사소통하면 되었고, 통상적으로 양자간의 의견이 엇갈리면, 디자이너들의 의견이 최종적으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쉬무춘의 출현은 이러한 시대를 마감시킨다. 디자이너는 그저 프로세스의 한 단계이고, 전부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들 낙하산들 중에서, 리닝 운동생활총감 Meta는 가장 쉬무춘의 신임을 받는다. 이전에 두 사람은 나이키에서 함께 6년간 일한 바 있다.  Meta는 총명하고, 예쁘며, 유행에 민감하다. 전형적인 미국식 사고를 지니고 있다. 그녀의 '귀매(鬼妹)'성격은 쉬무춘의 심미관 및 개성과 아주 가까웠다. 쉬무춘의 지지하에, Meta산하의 운동생활은 점점 리닝회사의 주류제품으로 성장한다. 그 주문량이 한때 60%에까지 달한다.

 

쉬무춘은 디자이너들의 천마행공식의 창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제품창의컨셉트는 반드시 리닝의류창의총감인 독일인 K D Waltner가 정하도록 규정한다. 리닝의 디자이너들이 보기에, K D의 창의는 너무나 평범했고, 그가 제기하는 개념은 통상적으로 미적지근한 것이었다. ZIBA의 참여자들은 급진적인 창의기풍을 좋아했다. 예를 들면, 중국품격을 제창하거나, "십팔반무예"로 명명된 전문농구시리즈등이 그것이다. 이 제품라인은 겨우 10여종류이지만, 한때 농구주문량의 30%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쉬무춘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원인은 바로 Morrison이 아주 서구화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찌기 동방요소를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한 디자이너의 말이다. 희극적인 것은 쉬무춘에게 아주 중국적인 별명이 몰래 붙여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지나치게 독재를 하여 그를 '마오주석'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하여 쉬무춘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가 잘 이해되지 않는 동방요소에 비하여 쉬무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베크롬비식의 미국식 캠퍼스 풍격이었다. 일종의 폴로셔츠에 깃을 세운 설계감각이었다.

 

방관자들이 보기에, 쉬무춘의 결점은 분명했다. 그는 운동생활의 전문으로 인하여 전문운동제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 디자이너들은 쉬무춘이 지나치게  Meta가 있는 운동생활부서를 편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의로 전문체육류개념과 도시생활류개념을 냉대한다고 생각한다. 일부 창의성이 있는 생각은 이로 인하여 묵살된다. 2010년말, 리닝의 농구 주디자이너가 제기한 '근육'개념은 인체근육섬유와 매운동부위의 근융기능을 연구하고, 리닝 신제품기능과 이미지를 부여한 것이었다. 이 창의방안도 부결된다. 나이키가 나중에 내놓은 근육을 강조하는 Nike Pro의 몸에 달라붙는 운동복은 크게 환영받는다. 그외에 부정된 제품창의 방안은 "잠능(潛能)" "암능(暗能)"등이 있다.

 

고위직의 쉬무춘은 갈수록 디자이너들의 신뢰를 잃어갔다. 디자이너들이 보기에, 쉬무춘은 리닝브랜드의 DNA에 대한 이해가 너무 앝았고, 개인의 호오가 분명했다. 2010년의 한 Kickoff미팅에서, 쉬무춘은 농구시리즈에서 그가 좋아하는 가장 자주보이든 파란색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이를 대체한 것이 짙은 커피색이었다. 그래서 크게 화를 낸다. 그는 농구 주디자이너에게 원인을 따진다. 그 디자이너는 커피색제품은 원리 로스앤젤레스에서  NBA스타인 Baron Davis를 인터뷰한 결과이며 이는 데이비스가 아주 좋아하는 특수한 색깔이며, 도시에서 잘 팔릴 수 있는 요소라고 말한다. 쉬무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색깔이 너무 늙어보인다고 한다. 그의 이 말은 많은 디자이너로부터 집단공격을 당한다.

 

충돌은 여전히 내재되어 있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설계계통의 전체회의에서, ZIBA프로젝트 참여자중 한명이자, 리닝농구 주디자이너가 전체 디자이너들 앞에서 쉬무춘을 조롱한다. 그는 이렇게 비웃었다: "너의 집에 있는 루이비통과 에르메스는 모조리 커피색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그 색깔리 늙어보인다고 말하느냐?" 그러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가가대소를 한다.

 

내분은 결국 큰 문제를 일으켰다. 위험신호는 2010년부터 제품주문량이 감소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동방요소를 가미한 창의제품이 연이어 부정되면서, 일부 불만을 가진 디자이너들은 이식을 하기 시작한다. "내 업무는 이미 허수아비가 되었다. 지금은 따뜻한 물로 청개구리를 삶는 것과 같다. 재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다. 더 이상 회사에 무슨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없다" 한 디자이너는 쉬무춘에게 보낸 사직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디자이너들의 불만은 프로세스에서도 나타났다. 그들은 도면제작의 권리를 박탈당한다. 창의총감의 창의는 전문적인 도안설계사가 도면을 그린다. 그 후에 디자이너에게 준다. 설계사는 세부도면으로 설계방향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이런 좌절감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도면그리는 도구화하였다고 느끼게 만들어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고, 이전에 배운 것은 모두 헛배운 것이라는 그낌을 갖게 만들었다.

 

새로운 설계프로세스는 악세사리도안은 전문가가 책임지기로 되어 있다. 쉬무춘은 홍콩에서 여러명의 도안사를 모집한다. 다만 양자간의 간격이 너무 컸다. "네가 홍콩인에게 한가지 방안을 주면, 그가 만들어내는 것은 네가 생각한 것이 아니다." 내부인사들은 홍콩디자이너들은 아주 크고 과장된 알파벳을 가슴에 두는 도안을 좋아한다. 그러나, 리닝의 디자이너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촌스럽다고 여겼다. 계속되는 충돌이후, 갈등은 결국 직위의 고저로 해결되었다. 통상적으로 홍콩팀의 직위와 급여가 리닝의 대륙직원보다 높아서 그들이 이겼다. 그래서, 기괴한 현상 하나가 타나난다. 리닝의 대륙 디자이너들이 설계도면효과가 좋지 않다고 느껴도 '엉망인' 제품을 수정할 수가 없었고, 그저 '엉망인' 제품인채로 시중에 출시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디자이너들은 침묵했다.

 

대륙의 한 디자이너는 의복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수정의견을 홍콩의 도면제작사에게 보내어 수정을 요구했다. 그런데, 홍콩이 도면제작사는 대노하여 길다란 영문이메일로 반박하여 이를 쉬무춘에 CC한다. 서신에서 도면제작사는 자신이 수십년의 경험을 지니고 있는데, 대륙의 디자이너가 그 작품을 비평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은 절대로 고칠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쉬무춘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의사표명도 하지 않았다.

 

리닝의 디자이너팀들이 보기에, 이것은 쉬무춘이 지나치게 "일단 문제가 생기면, 그는 우리에게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질책했다. 우리는 도안사들이 우리가 알려준대로 고치지 않았고, 의견을 내놓아도 수정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엉망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쉬무춘은 홍콩사람들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우리에게 의사소통능력이 부족하다고 탓을 한다. 계속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다. 나중에 우리는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게 되었다." 한 익명의 이직한 디자이너의 밀이다.

 

이런 황당한 국면이 2010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었다. 내부인사들은 리닝의 디자이너들이 설계방향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 어떻게 8개 분기의 제품을 완성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시장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은 2011년초에 거행된 2분기 주문금액이 판매가와 도매가로 계산할 때 각각 똑같고 6%하락한 것으로 나왔다. 3분기에는 각각 15%씩 마이너스 성장을 한다.

 

만일 리닝이 미리 정해둔 착오시정매커니즘대로라면, 실수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찌기 2006년, 리닝은 내부에 PPT프로젝트팀을 둔다. 그 뜻은 CPFR이라는 협력식 공급체인재고관리시스템으로 재고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월마트가 처음 만든 것으로  IT시스템을 통하여 소매기업과 생산기업이 협력하여, 생산계획, 재고계획, 배송계획, 판매계획을 통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공급체인프로젝트가 아니다. 판매상과 협력하여 수요공급예측을 하고, 리스크회피설계를 하며, 재료공유를 하는 정교한 생산모델이다. 장즈용이 시급히 건설하고자 했던 비지니스모델이다. 이전에 리닝은 매 제품마다 대략 반년의 공급주기가 있었다. 만일 ZARA식의 급속회전모델을 채택한다면 공급체인은 14일로 단축할 수 있다. 리닝 PPT프로젝트는 2007년에서 2008년의 운영결과 모의예측에 따르면, 공급체인의 재고를 40주에서 12주로 단축시킬 수 있고, 공급에서의 재고를 70% 줄일 수 있으며, 판매율을 10%제고시키고, 점포별 제품부족율을 75% 감소시키고, 물류비용은 20% 하락시키며, 운영자금점용을 30% 개선시키며, 전체 판매액을 9% 늘일 수 있고, 순이익은 33% 늘일 수 있다. 프로젝트초기에 결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장즈용은 일찌기 프로젝트팀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하고 자신이 PPT프로젝트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2007년 봄/여름상품 주문회에서, 최적화된 31개의 단품은 놀랍게도 220만건의 주문량을 기록했다. 금액은 2.09억위안에 달한다. 당시 리닝의 영업수익이 겨우 43.49억위안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것이다. PPT프로젝트는 종류는 적지만 정교한 킬러급 제품을 내놓는 것으로 유명했다. 10%의 제품으로 주문량의 25%이상을 차지했다. 시험공급주기는 20일가량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의류업종에서 이것은 대단한 숫자이다. PPT프로젝트의 최초책임자는 당시 운영총감을 맡고 있던 궈젠신(郭建新)이어는데, 그는 이후 고속승진하여 COO가 된다.

 

PPT프로젝트팀은 효율높은 운영으로 유명했다. 효율은 각 부서에서 최고였다. 빠른 대응, 공급체인비용, 재고관리, 단품효율등등이 모두 1위였다. PPR는 등대와 같았다. 어느 곳에 두더라도 효율의 모범이 되었다. 제품시스템, 운영시스템이건 판매시스템이건 모두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뛰어난 성적은 리닝회사내부에서 제품, 공급체인, 판매등 부서의 두려움을 불러왔다. 오랫동안, 리닝의 공급체인은 주기가 60-90일이었다. 공급체인부서는 공급주기를 줄이고자 하지 않았다. 새로 공급상을 선정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판매팀도 마찬가지였다. 판매예측은 분기별로 1회하는데, 이를 PPT프로젝트처럼 매주 1회로 줄이는 것은 어려웠다. 각 부서의 비협조는 결국 PPT프로젝트를 고립무원의 지경으로 빠트린다. 전면적으로 PPT모델을 시행했더라면, 제품설계, 공급체인, 판매상의 개조 및 공장의 프로세스의 개조등에 모두 변혁을 불러왔을 것이다. OEM공장에 있어서도 걸핏하면 백만건인 대량주문을 포기하고, 급속하고 탄력있는 수만건의 제품생산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만일 정확하게 실현했더만, 공급상의 생산능력과 재료율을 정확하게 계산해야 하고, IT시스템에서 완성품주문과 재료주문을 일치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공급상은 생산능력과 대외발주가공을 초과보고하지 않을 것이고, 재료율을 초과보고하여 재료로 돈을 벌 수 없었을 것이다.

 

여러 분야의 이익이 관련되다보니, PPT는 여하한 부서에도 예속되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부서의 적이 된다. 리닝의 CPO인 쉬무춘은 일찌기  PPT프로젝트팀이 대량제품부서의 일거리를 빼앗아간다고 질책한 바 있다. PPT프로젝트조의 구성원들은 오히려 대량제품부서의 비효율과 무능을 조롱했다. 결국 PPT의 독립제품기획권한은 이렇게 하여 박탈된다.

 

불행한 점은 PPT프로젝트가 결국 권력유희의 도구로 화했다는 점이다. COO를 맡은 후, 궈젠신도 PPT프로젝트를 고의로 약화시킨다. "궈젠신은 PPT의 능력이 너무 강대하다는 점을 알았다. 누가 그것을 얻더라도, 누구든지 천하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이미 COO의 위치에 앉았다. 더 이상 PPT를 이용하여 승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PPT는 오히려 골치거리가 된 것이다." 2007년 4월, 장즈용은 당시 전략총감으로 있던 장휘(張輝)를 보내어 PPT프로젝트를 인수하게 하여 궈젠신을 견제했다.

 

음미할만한 일막이 일어난다. PPT축하행사때 궈젠신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여러분은 모두 회사의 엘리드이다. 그러나 오늘의 성적을 얻은 후, 나는 프로젝트팀의 다음 행보가 어떤 방향일지 모르겠다. 나는 이후의 길이 어느 길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어서 발언한 장휘는 이렇게 반박한다: "나는 PPT프로젝트가 채용한 운영모델이 반드시 세계 최선진의 모델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반드시 미래에 리닝회사에 공헌이 가장 큰 경영모델이 될 것이다." 그러나, 1년후, 장휘는 PPT프로젝트를 회사 전체로 확대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장휘는 거의 쫓겨났다. PPT프로젝트의 빠르게 반응하는 공장은 대량제품의 주문을 받지 못했다. 대량제품체계는 암암리에 PPT제품을 취급하는 공장에는 주문을 주지 않기로 한다. PPT주문은 모두 소량주문이고 1회의 주문량은 아주 적다. 만일 대량주문을 받지 않으면 OEM공장으로서는 수지를 맞추기 힘들다.

 

여러가지 방해가 있었지만, 장휘는 LNG제품을 PPT프로젝트의 새로운 모델로 삼고자 한다. 2009년, PPT프로젝트팀은 브랜드계획시 가격을 당시 리닝의 판매가격보다 10% 내지 20% 낮게 설정한다. LNG는 아이다사 오리지날 제품라인과 유사하다. 포지셔닝은 유행 패션이고, 모브랜드인 리닝이 전문운동에 집중하는 것과는 구별되었다. 프로젝트팀은 재고를 모두 5단계로 나누어 통제하여, 분기별 주문량이 30만건으로 하였지만, 재고는 거의 없었다.

 

그후의 변고는 이 모든 것을 파괴시킨다. 2011년초, 동사회의 토론결과는 LNG의 포지셔닝 및 판매가격을 니닝, 러투(樂途)보다 50%, 30% 이상으로 정한다. 그리고 마케팅비용은 전혀 없었다. "회사가 한푼도 주지 않으면서, 리닝보다 높은 고급브랜드를 만들라는 것이 가능한가?" 한 LNG의 핵심구성원의 말이다.

 

LNG는 채널에서 막혔다. 회사는 LNG에게 단독으로 새로운 대리점을 개설할 수 없도록 하였다. LNG구조에는 독립된 판매조직이 없다. LNG점포는 각 대지구의 리닝의 TOP 판매점에 개설된다. 리닝의 대지구의 판매대표가 대신관리한다. 그후, 리닝동사회는 다시 LNG를 인터넷판매브랜드로 잘못 규정한다. 이렇게 큰 결정이 하룻밤만에 결정되었고, LNG는 결국 실패한다.

 

이번의 치명적인 타격은 단기적인 재무에 치우친 전략때문이다. 리닝회사의 여하한 프로젝트보고서에도 모두 전년도의 수지균형을 요구한다. 이것은 거의 리닝이 숨은규칙 된다. PPT도 마찬가지이다. PPT프로젝트팀은 최초에 LNT에 설정한 개점목표가 매년 100개점포였다. 약간의 결손을 보더라도 통상적으로 3년내에 수지균현을 맞추는 것은 업계에 보편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후 경영진은 실적의 압력하에, LNG의 점표개설목표를 맹목적으로 300개로 상향조정한다. 이것은 재무부서의 추산에 근거한다. LNG가 수지균형을 맞추려면, 연간 3억위안을 실현해야 하고, 총이윤이 1.5억위안이 되어야 한다. 이런 수입을 올리려면 300개의 점포를 개설해야 하는 것이다.

 

장휘는 일찌기 PPT를 홍쌍시(紅雙喜) 브랜드에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신발의류제품으로 발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부결당한다.

 

장휘는 결국 떠나기로 결정한다. 장휘가 만든 리닝회사의 전략은 장즈용에게 인정을 받았었다. 리닝동사회의 보고서도 이전에는 모두 장휘가 썼다. 그러나 그후 "09-13전략"에 대한 이견으로 두 사람은 사이거 발어진다. 이 계획의 핵심은 2013년 리닝이 판매수익 200억위안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내부인사들에 따르면 장휘는 일찌기 이 전략에 반대하여 초안작성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후, 동사회보고서는 장휘의 아랫사람인 전략부경리 천샤오원(陳紹文)이 작성한다. 내부인사에 따르면, 천샤오원은 장즈용의 말이라면 그대로 따르면서 부총재까지 급속히 승진하였다고 한다. 그 후의 사실이 증명한다. "09-13전략"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풍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장즈용이 일찌기 내부에서 리닝회사에서 단 두 사람만이 전략을 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은 자기이고 다른 한사람은 천샤오원이라는 것이다.

 

권력투쟁으로 인한 해악은 아주 컸다. 타격을 받은 또 다른 경영진은 COO 궈젠신이다. 궈젠신의 지위는 한때 장즈용의 바로 아래였다. 내부에서는 총재직을 이을 유력한 경쟁자로 보았다. 분권을 위하여, 장즈용은 CMO, CPO등 여러 고위직을 만든다. 계속하여 권한을 빼앗기게 된 궈젠신은 결국 COO의 직위만 유지하고, 실권은 없게 된다. 그가 장악한 부서는 판매계통뿐이다. 이는 판매회사 총경리인 후난(胡南)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온다.

 

후난은 리닝의 원로중 하나이다. 능력이 출중하고, 의리가 있다. 판매상과 판매계통 내부에서 '지하영수'의 풍모를 지녔다. 심고기오(心高氣傲)의 후난도 결국 회사를 떠나버린다.

 

궈젠신도 승리자는 아니었다. 궈젠신은 당시에 판매, 제품과 브랜드시스템에서 계속 배제되고, 제품방향과 판매계통을 관리할 수 없었고, 시장자원도 관리한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COO로서 운영에 대한 평가압력은 받았다. 각 부서간의 상호 책임떠넘기기가 가장 큰 두통거리였다. 그외에 궈젠신은 공급체인에서 빈발하게 일어나는 품질문제에 대하여도 책임을 추궁당한다. 궈젠신은 결국 사직한다. "나귀는 방아를 돌릴 수도 있지만, 나귀고기를 구워먹을 수도 있다" 궈젠신이 사적으로 화를 내며 한 말이다.

 

궈젠신의 이직은 여러 고위직중에서 가장 암담한 것이었다. 환송회도 없고, 아무도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리닝의 하락은 두 가지 중요한 분수령이 있다고 한다. 후난과 궈젠신이 떠난 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이로 인하여 판매계통의 인심이 동요하고 운영층이 대거 교체된다. 시장의 실적이 크게 영향받게 된다. 또 하나의 분수령은 2008년 9월 리닝의 전 CFO 천웨이청(陳偉成)의 이직이다. 천웨이청은 2003년 리닝의 CFO를 맡는다. 그는 리닝의 상장업무를 주관했고, "효율선생"으로 불리웠다. 그의 임기동안, 리닝의 공급체인효율과 재고회전율이 한때 계속 하락하여, 2004에는 2003년과 비교하여 23%나 하락하고 124일까지 내려갔다. 2007년에는 다시 70일이하로 내려간다. 자본시장에서 짧은 4년만에 천웨이청은 리닝의 주가를 최고 33홍콩달러까지 끌어올린다. 천웨이청이 사직했다는 소식이 나온 후 리닝의 주가는 9.68%가 폭락한다. 그후 리닝의 주가는 더 이상 회복되지 않았다.

 

리닝 본인은 회사에 대하여 분명한 판단을 하고 있다. 이번에 대외에 공표한 3년 구조조정계획은 그가 얻은 교훈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포함되어 있다. 왜 자원을 리닝브랜드레 집중해야 하는가? "(각 자브랜드)는 상대적으로 독립되어야 한다. 독립되지 않으면 안된다. 큰밥솥을 같이 먹는 방식으로는 자원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정 핵심적인 콘텐츠를 갉아먹는 것이다." 금년초, 리닝의 내부에서는 이미 2007년에 창립한 자브랜드 신동(Z-Do)를 철저히 포기했고, 러투도 업무를 장정 중단한다. 홍쌍시의 확장계획도 삭감당한다.

 

1년전의 대화에서, 리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리닝이 오랫동안 운동과 패션의 양극단을 오가면서 동요한 문제점을 알고 있다. "우리는 기실 동요한 것이 아니다. 전문화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전문화되면, 패션도 전문화되는 것이다. 전문적이지 않아서, 우리가 마치 패션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최근의 주문회에서 리닝 본인이 돌연 나타났고, 여러번 그 자리에 있던 디자이너 및 고위층에게 '전문화'를 요구한다. 그는 장즈용의 전략중 농구를 주요자원으로 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는 잘못이라고 말한다. 린즈링(林志玲)을 광고모델로 삼은 것도 실패작이라는 것이다.

 

회사의 내분에 대하여도 그는 본체만체하지 않겠다고 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부서를 어떻게 하면 더 잘하고 일류가 될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낙하산의 문제에 관하여, 그는 회사가 아직 이들 낙하산들이 더욱 큰 작용을 발휘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본다. 다른 사람들이 이들 낙하산의 전문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협력할 줄 모른다고 보고 있다.

 

리닝은 확실히 바뀌어야 한다. TPG는 이미 10여명의 핵심팀을 만들어 4월초에 리닝에 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들은 스포츠용품, 시장프로모션, 소매, 구매 및 공급체인의 경영전문가들이다. 앞으로 리닝회사의 핵심부서를 주재할 것이다. 그리고 각 부서의 중간층부터 만나서 문제점의 소재를 파악할 것이다. TPG가 내놓은 약방은 CPFR로 회사의 업무를 새로 정리하고, 다시 PPT프로젝트모델로 돌아가는 것이다. TPG는 회사내부에서 이 프로젝트를 잘 아는 관리자를 찾으려 했다. 난감한 일은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원은 모두 회사를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닝 본인과 TPG에 있어서, 현재는 그저 경영상의 과도기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스포츠용품브랜드정신을 잘 알고, 집행력이 강한 전문경영인을 찾아서 총재직을 맡기려 한다. 그러나 도전은 시장과 경쟁상대방이 이미 그가 다시 한번 대륙의 최대스포츠용품브랜드의 왕위에 오르도록 시간을 그다지 많이 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