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섭징충(葉澄衷): 청나라말기 상해의 거부

by 중은우시 2012. 6. 29.

글: 김만루(金滿樓)

 

전해지는 말 중에 초기 닝보(寧波) 사람들이 상해탄(上海灘)을 주름잡을 때 "세 자루의 칼(三把刀)"이 있었다고 한다: 전도(剪刀, 가위), 채도(菜刀, 부엌칼), 이발도(理髮刀). 즉, 재봉, 식당, 이발의 3대업종에 많이 종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닝보방(寧波幇)"의 선구자인 섭징충에 있어서 그가 의지한 것은 한 척의 작은 삼판(Sampan, 舢板)이다.

 

섭징충은 자가 성충(成忠)이고, 절강성 진해(鎭海. 지금의 닝보) 사람이다. 그가 출생하였을 때는 미침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한 때였고, 진해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주산(舟山, 定海縣)은 격렬한 전투가 발생했다. 전쟁이 끝난 후,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가 통상항구로 개방된다. 겉으로 보기에 섭징충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같은 이 일이 실제로는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다.

 

섭징충은 어려서 부친을 잃었다. 겨우 반년정도 글을 배운 후, 도제로 간다. 도제생활은 힘이 들었다. 14살 때 그는 고향사람을 따라 상해탄으로 간다. 여기서 그는 물만난 고기같았다. 처음에 상하이에 갔을 때, 섭징충은 어느 잡화점에 고용되여, 평소에는 황포강에서 삼판을 조종하며 일용품, 식품등을 강에 정박한 외국배에 팔았다.

 

17살 되던 해에 섭징충은 명성을 크게 얻는다. 그가 한 일은 상해의 각 외국신문에 앞다투어 등재되었고, 반세기후 <청사고>에는 <효의전(孝義傳)>에까지 실린다: "서양인이 가죽주머니를 길가에 놓고 갔다. 성충(섭징충)은 이를 지키고 있다가 돌려주었다. 보상금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성을 떨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물건을 사게 되니 점차 재물을 모은다."

 

여기에 언급된 것은 어떤 일인가? 원래, 당시 한 양행(洋行)의 사장이 섭징충을 고용하여 삼판을 타고 강을 건넜다. 배가 강안에 닿자, 그 서양인은 급한 일이 있었던지 공문이 든 지갑을 삼판에 놔두고 내린다. 섭징충이 열어보니 지갑 안에는 돈이 아주 많았고, 반지, 공문등의 물건도 있었다. 그가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면, 이걸 가지고 사라질 수도 있었다. 아마도 여러해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도 문제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섭징충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는 원래 자리에서 계속 기다린다. 그 서양인이 급히 되돌아오자 지갑은 원상 그대로 돌려준다.

 

양행의 사장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중국의 쿠리 한 명이 이렇게 성실할 줄은. 그래서 그는 크게 감동을 받는다. 그후 그 서양인 사장은 섭징충에게 사업을 소개해주었을 뿐아니라, 신문에 그를 칭찬하는 뉴스를 대거 싣는다. 얼마후 섭징충은 그동안 번 돈으로 "순기오금양잡화점(順記五金洋雜貨店)"을 차린다. 왕래하는 선박에 오금(금속) 부속품등을 판매했다. 이것은 그의 사업성공의 첫걸음이었다.

 

당시, 오금사업은 신흥업종으로 섭징충은 기회를 붙잡아 오금점포의 규모를 확대한다. 그리하여 차례로 "신순기" "남순기" "북순기"등의 분점을 낸다. 8년후, 섭징충은 독일인이 열었던 "가치철호(可熾鐵號)"를 인수한다. 이때부터 석탄철광사업에 뛰어든다. 그리고 강남제조총국, 복주선정총국등 대기업이 공급업체로 성장한다.

 

1873년, 34세의 섭징충은 큰 거래를 하나 한다. 당시 상해의 한 전장은 4만은량으로 소주하 북안일대의 백무(1무는 200평)이상의 토지를 저당잡는다. 그런데, 연말에 정산할 때까지 업주가 돈을 갚지 못한다. 전장도 자금이 부족하여 곤경에 빠진다. 전장의 사장은 섭징충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섭징충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먼저 조계 공부국에 물어본다. 그리하여 공부국이 소주하에 다리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후 그는 즉시 토지를 매입하고, 공부국에 다리건설비용의 1/3을 부담하겠다고 제안한다. 다리가 완공되자, 소주하 북안의 땅값은 급격히 상승한다. 이전의 4만은량의 투자로 순식간에 100만냥의 가치가 된다. 이윤이 놀랄 정도라 아니할 수 없다.

 

부동산사업은 투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항상 좋은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니다. 진정 섭징충에게 안정적이고 풍성한 수익을 가져다 준 것은 미부양행(美孚洋行)과의 합작이다. 1870년, 미국의 록펠러는 "Mobil(중문명 美孚)" 석유회사를 만들고, 10년후에 "Mobil"은 상하이로 진출한다. 주영업인 등유사업은 일찌감치 영국의 아시아석유회사와 미국텍사코석유회사가 선점했다. Mobil이 섭징충을 찾았을 때, 섭징충은 이에 대하여 낙관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에 조계를 제외하고, 등유를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지와 농촌으로 시장을 개척하려면, 네트워크와 채널을 건설하는데 시간과 힘을 들었고, 비용도 아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담판과정에서, 섭징충은 3개의 조건을 제시한다. 첬째는 독점대리이고, 둘째는 커미션을 25%까지 올리는 것이고(다른 회사는 20%였다), 셋째는 대금은 물건을 인수후 3개월결제조건이다. Mobil과 협상이 이루어진 후, 섭씨집안의 사업은 갈수록 커졌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셋째 조건이었다. 섭징충은 이 3개월의 결제기간차이를 십분 활용하여, 자금운용이 여유가 생겼을 뿐아니라, '외국돈을 가지고 돈을 벌었다' 이러한 단기자금이 계속하여 전장으로 들어가고 실업에서도 이자를 지급할 필요가 없었다. 섭씨집안의 재산은 나날이 증가했다.

 

1890년, 섭징충은 섭창(燮昌)성냥회사를 만든다. 이것은 당시 상해 최대의 민족성냥공장이었다. 서양상인들과의 격렬한 경쟁과정에서 섭창은 도산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갈수록 잘되어 상하이시장의 1/3이상을 장악한다. 그후 섭징충은 다시 한커우에 분공장을 만들어 두 공장의 1일 성냥생산량은 40여만갑에 이른다. 중국의 거의 절반지역에 팔려나갔다. 그외에 섭징충은 나사공장도 만들고 항운업에도 뛰어든다. 그가 경영하는 전장은 전성기에는 백개가 넘었다. "진해섭가"는 이로 인하여 상해에서 명성을 누리는 9대전장가족중 하나가 된다. 19세기말이 되어, 섭징충이 보유한 자본은 약 800만냥에 이른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 거부라 할 만했다.

 

섭징충은 무역으로 시작하여 실업, 금융까지 진출한다. 그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다. 하나는 "감위천하선(敢爲天下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근신종사(謹愼從事)"하는 장사의 도리였다. 양자는 완벽하게 결합하여 결국 이 빈곤한 가정출신의 소년은 일약 '닝보방'의 최고부자가 된다. 그는 돈을 번 후에, 사회공익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고아과부를 도와주고 긴급히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 인망을 얻는다. 당시 이런 속담이 있었다. "의징충, 불우궁(依澄衷, 不憂窮)"(징충에 의지하면 가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1888년, 섭징충은 거액을 내놓아 절강의 재해를 구조하여 청나라조정의 상을 받는다. 그리고 "낙선호시(樂善好施)", "용어위선(勇於爲善)"이라는 두 개의 편액을 하사받는다.

 

1899년, 섭징충은 상하이 홍커우 장자완의 30무 땅과 10만냥의 돈을 출연하여, "징충학당(澄衷學堂)"을 건립한다. 아쉽게도 교사가 완공되기 전에 섭징충은 사망한다. 나이 겨우 59세때의 일이다. 그후 가족들은 계속 자금을 출연하여, 학교를 설립운영한다. 이 학교에는 호적(胡適), 예정욱(倪征燠), 축가정(竺可楨)등을 배출한다. 그외에, 섭징충은 고향에도 학교를 만들어, 포옥강, 소일부등이 이 곳에서 공부를 했다.

 

1921년 4월, "징충학당"의 교우들은 돈을 모아서 섭징충의 동상을 세운다. 그런데, 동상은 비단옷을 입은 것으로 만들어졌다. 나중에 후손들이 섭징충은 비단옷은 입은 적이 없고 베로 만든 옷을 입었다고 말한다. 후손들에 따르면, 섭징충은 절대로 말이나 차를 타지 않았고, 항상 걸어다녔다. 서양상인들이 그에게 5벌의 양복을 선물해주었는데, 그는 하나도 자신이 입지 않고 모두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