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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차기 상해시서기: 멍젠주(孟建柱) vs 한정(韓正)

by 중은우시 2012. 7. 8.

글: 김청(金晴)

 

베이징당대회후, 베이징의 인사배치는 공청단파의 승리로 끝났다. 누가 상하이를 차지할 것인가가 현재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멍젠주와 한정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해외소식통에 따르면, 상하이의 관료사회, 시위와 시정부는 모두 멍젠주가 18대이후 다시 상하이로 복귀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만일 멍젠주가 상하이로 되돌아간다면, 그와 상하이관료사회의 10년전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분석가에 따르면, 멍젠주가 상하이로 돌아가는 것도 그가 정치국 상임위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역시 가능성이 있다.

 

당초 멍젠주와 천량위(陳良宇)가 상해시장 자리를 놓고 경쟁할 때, 장쩌민은 천량위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후 멍젠주는 후진타오편에 붙은 것으로 알려졌고, 장쩌민과 장쩌민파의 인사들은 멍젠주에 대하여 앙금이 있다.

 

현재, 외부에서는 현임 상하이시장인 한정이 시위서기로 될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다. 한가지 분석에 따르면, 한정은 상하이에 정치적 뿌리가 깊어서, 한정이 정치국 위원의 신분으로 다른 성의 성위서기로 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혹은 중앙의 모 부위의 부장으로 갈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할 것인지는 시진핑의 태도가 관건이다.

 

금년 4월, 멍젠주가 장악한 공안부 대변인 우허핑은 왕양계통의 <남방도시보>와 후진타오가 장악한 <중국청년보>의 취재에 연속으로 응하여, "정보를 장악한 사람이 막으면 막을수록 유언비어는 더욱 성행한다"고 말하여 후진타오, 원자바오의 편을 들었다.

 

또 다른 상하이 관료에 따르면, 장쩌민의 조카인 우즈밍은 멍젠주를 본척 만척했고, 멍젠주도 우즈밍에 대하여는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홍콩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90년대초, 장쩌민의 아들인 장몐헝이 외국에서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황쥐(黃菊)이 그에게 수십억위안을 넘겨주어, 1994년 상하이롄허(聯和)투자유한공사를 설립하고 장몐헝이 동사장을 맡고 총경리는 양슝(楊雄)이 맡는다. 장몐헝은 이 플랫폼을 이용하여, 여러해동안 경영하여 상해의 곳곳에 손길을 미치는 방대한 자본제국을 만든다.

 

2001년 2월, 장몐헝은 양슝을 정계로 되돌려 보내어, 상하이시 부비서장을 맡게 한다. 2003년 2월, 상하이시 부시장이 된다. 2007년 5월 중공상하이시 상임위원, 상하이시부시장이 된다. 2008년 1월 중공 상하이시위 상임위원, 상하이시 상무부시장으로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다.

 

소문에 따르면, 장쩌민은 일찌감치 후진타오에게 상하이시 상무부시장 양슝을 한정의 후임으로 상하이시장을 맡게 하도록 요청한 바 있으나, 후진타오는 시간을 끌며 응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상하이는 상하이방의 본거지이다. 게다가 장몐헝이 상하이에서 여러 해동안 힘써 기반을 닦아 놓았다. 장몐헝은 상하이롄허투자공사를 통하여 상하이의 대부분 경제명맥을 통제하고 있다. 현재 상하이는 이미 장몐헝, 양슝, 우즈밍을 우두머리로 하는 신노 상하이방이 한데 뒤엉킨 난국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언급할 것은 장쩌민의 외조카인 우즈밍이다. 상하이 정법위 서기로 그는 상하이를 자신의 독립왕국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 대항하여 왔다.

 

최근의 상하이 당대회에서 원래 상하이시장을 맡아 한정의 뒤를 이을 것으로 소문이 무성하던 현임 상하이시 상무부시장 양슝은 상하이시위 상임위원에 당선되지 못했다. 상임위원의 신분을 잃은 사람에는 장쩌민의 외조카인 우즈밍도 들어 있다.

 

현재 두 명의 장쩌민파의 핵심인물이 쫓겨남에 따라, 상하이방은 이미 상하이의 인사발언권을 잃었고, 장쩌민파의 본거지가 함락되었다. 멍젠주는 상하이를 장악할 촛점인물의 하나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만일 충칭에서 왕리쥔과 보시라이의 스캔들이 없었더라면, 3월 베이징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상하이대표단이 촛점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료사회에는 이미 소문이 무성했다. 상해의 인원들이 크게 움직일 것이고, 중공18대에 위정성이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올라가고, 후임 시위서기는 신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홍콩매체에 따르면, 후진타오이건 시진핑이건, 한정에 대한 인상은 모두 괜찮다고 한다. 1990년대초 한정은 2년간 공청단 상하이시위서기를 지냈으므로 그는 공청단파로 볼 수도 있다. 후진타오와는 '단파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관계로, 한정은 천량위가 몰락한 후에도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정이 시장으로 있을 때, 상하이는 시위서기를 3명이나 모신다. 처음에는 천량위와 팀이 되어 하마터면 사회보험사건에 연루될 뻔 했다; '후계자' 시진핑이 상하이시위서기를 맡았을 때, 한정은 천량위사건으로 곤혹스러운 때였다. 그러나 시진핑은 그에게 안심하고 일을 맡겼다; 17대후, 시진핑이 '후계자'가 되고, 위정성이 상하이의 시위서기가 된다. 한정은 여전히 자리를 단단하게 지켰다.

 

2007년 3월하순, 시진핑이 정식으로 시위서기에 부임하자, 이것은 당시 대리시위서기로 있던 한정에게는 큰 좌절이었다. 시진핑은 17대이후 상하이를 떠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하이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한정의 부패에 관한 소문도 있었지만, 그에게 일을 대거 맡겨서 하게 했다. 그리고 한정의 협력과 태도는 시진핑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처음 상하이로 갔던 시진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매체의 통계에 따르면, 시진핑이 상하이에 낙하산으로 내려간 후, 시진핑의 모둔 중대한 활동에는 한정에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거의 매주 "시위서기 시진핑고 시위부서기, 시장 한정"의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 심지어 상하이의 일반시민들까지도 이번 '간부'들은 아주 단결이 잘된다는 인상을 갖게 했다.

 

중공17대가 개최된 후, 상하이에서 반년간 시위서기로 있던 시진핑은 '후계자'로 낙점되고, 당시 항간에는 여러가지 소문이 돌았다. 그를 보좌하는데 공이 있는 한정이 이번에는 시위서기로 올라갈 것이라고.

 

그러나, 당시 후베이성위서기를 맡고 있던 위정성이 상해로 옮겨와서 시위서기를 맡아 시진핑의 뒤를 잇는다. 다시 한번 한정은 시위서기로 올라설 기회를 잃은 것이다. 위정성이 상하이로 와서 주재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또 다시 소문이 돌았다. 상하이시장이 곧 교체될 것이고, 중앙에서 사람을 보내어 위정성과 팀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그리고 한정은 외지로 나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당시 외국의 보도에서는 이렇게 평론했다. 한정은 연령으로 보아, 여전히 승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천량위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오점을 씻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몇년 후, 한정의 비바람에 흔들리던 불안한 지위는 안정된다. 그 원인은 간단히 말하자면, 바로 위정성이 한정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엑스포'라는 큰 행사가 곧 막을 여는데, 새로운 사람을 불러서 그르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정은 시세흐름을 잘 읽었고, 풍향을 잘 파악했다. 위정성에게 이용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자, 점점 자신감을 회복한다. 그는 한번도 상하이를 떠나본 적이 없고, 인맥이 얽히고 설켜 있다. 비록 위정성에게 고개를 숙이지만, '작은 움직임'은 계속 보였고, 민원은 계속 일어났다. 그러나 위정성은 이해관계를 형량해본 후, 그래도 그를 남겨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중앙에서 여러번 시장을 바꿀지에 대한 의견을 그에게 물어보았고, 그에게 왕민(王珉), 천더밍(陳德銘)등을 추천하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상하이시위의 소식통에 따르면, 곧 상하이를 떠날 위정성은 사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정은 요 몇년간 상하이에 '공헌이 크다' 상하이의 '안정'을 위하여 한정에게 남아서 상해시위서기를 맡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위정성이 한정을 시위서기로 강력하게 밀고 있는 주요한 원인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위정성은 상하이에서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한정이 자신의 세력을 연장해서, 위씨집안의 상하이에서의 관계와 이익을 보호하고 돌봐주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다.